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42
@42. 황제의 시녀라고?
키론 제국은 신분이나 집안 등에 맞춰 정해진 상대와 결혼하게 되는 일이 꽤 잦았다.
연애를 못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사교계 소문, 집안에서의 입김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굉장히 많지.
그래서 애초에 연애를 시작할 때도 정보가 많고 발이 넓은 귀부인들을 통해 중매로 시작하는 일이 많았다. 혹은 잘 아는 집안끼리 연결해서 젊은 자제들을 서로 이어 주거나.
이런 분위기 속이니, 자만추가 일반적인 생각은 아니긴 할 것이다. 뭐, 그래도 연애할 사람은 다 하지만.
‘이아페도 이 일을 하면서 칼린느와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을 테고.’
그보다 연애 스타일이라. 나는 약간의 취기를 빌려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아페는 어때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올인하는 스타일인가요?”
이아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가 잔 받침대를 살짝 만지작대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이내 입술이 열리고 나지막한 대답이 들렸다.
“아닌 줄 알았는데….”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였다.
“그런 모양이더군요.”
“오올!”
이아페의 대답에 주변에서 호들갑이 이어졌다. 나도 따라서 “와!” 하고 의식적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목이 탔다.
소설에 나온 이아페의 행보를 보았을 때 ‘올인’이란 말은 너무도 적합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의 이유가 칼린느였지.
아마 오늘은 많이 아쉬울 것이다.
칼린느는 오늘 이곳의 꽃을 피운 후, 다시 바쁜 일정으로 떠났으니까. 온 김에 정말 북부까지 시찰을 하러 간 것이다.
나도 이렇게 아쉬운데 이아페는 더 아쉽겠지? 칼린느와 함께 축제를 즐기지 못한 게.
그런데 참 이상하지.
왜 이렇게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아무래도 조금 취한 것 같았다.
* * *
아르비나 후작저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분주했다. 북부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아가씨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 바쁜 소음의 정도가 조금 더 커졌을 때. 비알로는 슬며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저택에 이르러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부모님이 밖으로 나가는 것 같기에, 비알로도 방을 나섰다.
과연 향료를 얼마나 사 왔으려나. 일부는 방에 두고, 일부는 외출용 향낭을 만들고… 그런 생각으로 그는 은근히 들떠 있었다.
“아오, 허리야.”
“고생하셨어요, 아가씨!”
리나가 반가움을 한가득 담아 시샤의 짐을 받아 들었다.
제게 일 시킬 사람이 돌아온 게 저리도 기쁠까. 비알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드디어 집에 왔구나, 시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없는 일주일은 정말 마음 편하고 행복했건만, 막상 네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자니 이제야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시샤는 착실히 놀다 온 것인지, 제가 게임을 어떻게 이겼는지, 거기서 본 꽃밭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재잘대었다.
‘시샤가 이렇게 생각 없이 놀러 다니는 아이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비알로는 피곤하게 그녀를 지켜보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노임포턴스 가문을 붙일 필요도 없었겠지.
그는 어쩌면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오빠가 지을 만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향료는 언제 주는 거지?’
시샤는 북부에서 사 온 쿠키와 장신구, 넥타이 등을 기념품이라며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향료는 없었다.
혹시 짐에서 깜빡하고 빼지 않은 것인가?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분명 향료를 가지고 비알로의 방으로 올 것이다.
몇 시간이 지났다.
시샤는 오지 않았다.
결국 조금 이른 밤, 펜을 놀리며 생각에 잠겼던 비알로는 시샤의 방을 찾아가고야 말았다.
“폐하께서 시찰에도 널 데려가시다니.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구나.”
비알로가 시샤의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살짝 열린 문틈 새로 어머니인 티오라 아르비나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폐하? 비알로는 그대로 굳은 채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제가 그러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참, 마성의 매력이 있나 봐요.”
“하하, 배포까지 마음에 드는군. 기억해라, 시샤. 시녀 일로 쌓은 신뢰가 장차 네 앞길에 큰 주춧돌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야.”
우뚝, 그 자리에 가만히 선 비알로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황제의 시녀 일을 하고 있었다고?’
시샤가 직접 그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어머니가 연결 지어 준 것이 분명하다.
제게는 그저 묵묵히, 더 탄탄히 준비하라 하였으면서. 그만한 자리를 주지 않았으면서.
얼굴이 붉어진 비알로가 비틀대며 벽을 짚었다.
“그럼, 쉬거라.”
티오라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비알로는 황급히 벽의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또각또각.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말을… 해야 하나? 시샤가 얼마나 저주받은 힘을 가진 아이인지.
티오라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비알로가 기둥 뒤에서 빠져나와 걸음을 옮기던 찰나.
“비알로, 내 고민 좀 들어 줘.”
다급한 표정의 시샤가 제 팔을 붙잡았다.
비알로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샤가 밖을 휘휘 살피더니 조용히 비알로에게 물었다.
“이리로 오는 길에 어머니 마주치지 않았어?”
“…아니. 난 정원이랑 통하는 작은 문으로 와서. 어머니랑 같이 있었나 봐, 시샤?”
시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가 이 밖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일단 들어와 봐.”
시샤가 방 안으로 저를 끌어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그녀가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 했던 뒤로는 처음 들어오는 것이었다.
“뭔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살짝 치켜든 비알로에게서 퉁명스러운 어조가 튀어 나갔다.
황제 폐하의 시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뭘 어쩔 셈이었지? 갑자기 고민을 들어 달라고 하면 내가 들어줄 거라 생각한 건가?
갖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 시샤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어쩌다가 황제 폐하의 시녀가 되었거든.”
이 말을 지금 꺼내는 건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인데. 비알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쩌다가?”
“예전에 황궁에서 열린 파티에 갔었잖아. 그때 내가 우연히 폐하의 구두를 닦아 드렸단 말야.”
“말이 돼? 네가 뭘 흘린 게 아니라면….”
“그래, 그거야! 내가 음료를 흘렸거든. 그런데 내가 그걸 말끔히, 아주 빛이 날 정도로 닦아 드린 게 매우 마음에 드셨나 봐.”
“…그래서 시녀로 데려가셨다는 거야?”
“맞아. 나는 말야. 궁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잖아? 그럼 진짜 다채롭고 즐거운 생활이 펼쳐질 줄 알았거든? 그런데….”
시샤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입을 벙긋대다가, 불만을 토해 내듯 말했다.
“청소만 하고 있어. 혼자서 말야.”
“청소를 한다고?”
시녀라는 직종은 하녀와는 조금 다르다. 심지어 황제의 시녀라면, 일반적으로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목욕 시중을 드는 정도일 터.
그런데 청소를 한다고?
“그래서 고민이 뭐냐면, 이게 진짜 시녀가 하는 일 맞아? 나는 하루 종일 청소만 한단 말야. 이번에도 사실 북부에 가서… 후, 말도 마. 폐하가 신으실 신발을 25켤레나 닦았다고.”
비알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자칫 미소가 지어지려는 것을 참느라 버거웠다.
그것을 보지 못한 시샤는 계속해서 고민을 늘어놓았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폐하와 잘 아는 줄로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은 폐하를 볼 일도 거의 없거든. 그런데 괜히 이렇게 말했다가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릴까 봐 말을 못 하겠어. 비알로, 이렇게 계속 다니는 게 맞을까? 너는… 이런 거 나보다 잘 알 것 아냐.”
비알로가 눈꼬리를 아래로 당기며 위로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너무 걱정 마, 시샤. 시녀가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는 거지.”
“정말…?”
“그래. 아마 널 시험하고 계실 가능성도 높아. 네가 묵묵히 일을 잘할 수 있는지 말야. 계속 거기에 있으면 아마 곧 폐하께서 너를 찾아 주실 거야.”
비알로의 말에 시샤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비알로. 계속 열심히 해 볼게.”
“그래. 어머니한테는 아직… 어떤 일을 하는지는 얘기하지 말고.”
“왜?”
“곧 좋은 자리가 올지 모르는데, 괜히 실망시켜 드리면 좀 그렇잖아.”
“응, 그래. 역시 네 말대로 하는 게 좋겠다.”
비알로가 옅게 웃음 지으며 시샤를 토닥였다. 내 동생이 폐하의 시녀가 되다니, 정말 자랑스럽다, 그런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고.
“아참, 그런데 시샤.”
“응?”
“향료는… 어디에 있어?”
“향료? 무슨 향료?”
비알로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걸 보고 시샤가 제 입을 막더니,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을 뱉었다.
“미안, 까먹었다!”
비알로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게 분명하다. 그것을 까먹다니.
그는 솔직히 조금 화가 났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동생은 시녀가 아닌 하녀로 채용이 되었다. 하긴, 시녀 같은 신뢰가 필요한 자리를 20년간 평민으로 살아온 시샤가 꿰찰 수 있을 리 없지.
그녀의 어머니는 시샤에 대해 한껏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듯하니… 그것을 증폭시키고, 또 증폭시켰다가 나중에 터뜨려야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암튼 시샤, 내가 말할 때까지는 어머니께 이야기하지 말고.”
“으응, 비알로. 너밖에 없어.”
한층 후련해진 표정의 시샤와 비알로가 오랜만에 사이좋은 오누이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굿나잇 인사를 전했다.
‘멍청한 시샤.’
문이 닫히고 제 방으로 걸어가는 비알로는 콧노래가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