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44
@44. 카일라인 사태
“사실 지난번 딜리오스가의 가면무도회에서 뵈었는데, 그날 제가 가르쳐 드린 놀이들이 너무 흥미진진하다 하셔서 전수해 드리기로 하였거든요.”
“놀이?”
“…시샤 게임이란 것이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 제가 그날 시샤를 에스코트했더라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알리진 않았을 텐데….”
비알로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으쓱했다.
“뭐라도 이름을 알리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 너의 이름으로 유행을 시키다니… 흐름을 주도하는 감각이 있나 보구나.”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공작가에서 배우러 올 정도라면, 나도 궁금하긴 한걸. 시샤.”
방금까지만 해도 답답하다는 모션을 취하던 비알로가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껴들면 곤란하다.
“오빠한테는 따로 가르쳐 줄게. 이번엔 공자님께 일대일 강습을 해 드리기로 약조한 것이라….”
“공자께서 많이 기대하고 있겠구나.”
아마 속으로는 공작가는 뭐 하는 집안이길래 행운의 편지를 보낸 걸로도 모자라 게임 강습까지 받으러 오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비알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딱히 공작가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 오해하게 두기로 했다.
“하지만 일대일이라니! 그놈이 시샤에게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올지 모르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테드릭. 그리고 젊은 애들끼리 잠깐 만나고 헤어지고 그래도 문제 될 건 없지. 시샤가 뭐 대차게 차여서 머리 밀고 산에 들어가겠다 할 애도 아니고.”
“딸꾹!”
어머니의 자리를 편 것 같은 지적에 뜨끔해서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내게 차를 후후 불어 건넸다.
“…하지만 확실히 그 집안이랑 너무 깊게 엮이진 않는 것이 좋긴 하겠군. 그 일 이후로 너무 많이 변해 버렸으니.”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차를 들이켜던 나는 멈칫했다.
“그 일이라면….”
“…아니다. 시샤 너는 너무 어릴 적 일이겠군.”
“카일라인 사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어두워진 표정에 멈칫한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라인 사태.
약 13년 전, 공작 후계 자리를 놓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
결국 이아페의 아버지인 펠트너 카일라인이 공작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아내를 잃었다.
5명의 다른 이와 함께 불에 타서 죽은 것이다.
그리고 권력 투쟁 속에서 어머니를 잃은 이아페의 나이는, 불과 8살이었다.
그는 기댈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권력을 잡은 대신 사랑을 잃은 공작은 그를 보듬어 주지 못했다.
형인 일로제 카일라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아페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었으나, 그날 이후 점점 이아페를 밀어 냈다.
집안에 환멸을 느낀 일로제와 공작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일로제는 어느 날 이아페에게 아무 말도 없이 홀연히 떠나 버렸다.
그렇게 12살의 이아페는 정말로, 허허벌판에 지지대 없이 홀로 남겨졌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아페의 아련함을 더 돋우기 위한 장치이자 설정으로 쓰였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고 보니 더 이상 단순히 설정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겠구나. 지금은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드는 생각들로 마음이 답답해 오곤 했다.
“아무튼 시샤, 부족함 없게 준비 철저히 하고.”
“네, 걱정 마세요.”
어머니가 던진 말에 감상에서 깨어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릭, 딸 연애사보다는 당신 옆에 있는 나한테 더 집중해.”
어머니는 쿠키 하나를 집어 아버지의 입으로 넣어 주었다. 아까 떨어뜨려서 못 먹었잖아, 무심하게 던지는 말과 함께.
그 장면은 어쩐지 닭살이 돋아서,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 * *
오랜만에 부자가 함께하는 식사 자리. 어린 양고기 스테이크와 화이트 버섯 스튜의 향은 저절로 군침이 돌게 할 만큼 빼어났다.
하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아무리 좋은 음식일지라도 풍미를 잃게 만들 만큼 싸늘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간헐적으로 포크가 그릇에 맞닿아 챙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또한 가끔이었다. 아주 가끔.
지금 당장 특별 메뉴라도 준비해 올려 분위기를 환기해야 하나. 사용인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쯤.
“물빛 축제 땐 일로제가 수도로 올라올 거다.”
펠트너 카일라인이 구세주처럼 입을 열었다.
사용인들은 기대에 찬 눈초리로 이아페 쪽을 바라보았다.
일로제. 그나마 저 이름이 그들 부자 사이에서 ‘사무적이지 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제였기에.
하지만 이아페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더 무감했다.
보통 타지에 있는 가족이 제 고향을 방문하면, 본가를 찾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아페는 알고 있었다.
일로제는 절대로 이 집에 얼굴을 비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몇 달 전, 그의 형이 남부 기사단 부기사단장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이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을 때.
이제는 공작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러니 언제든 집을 찾아도 좋다고 형에게 말했다.
그 말에 보였던 일로제의 표정이란.
그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시 그 집에 갈 일은 없어. 잘 들어. 나는 공작에게 쫓겨난 게 아냐, 이아페.〉
〈쫓겨났다니, 그런 뜻이 아냐. 그저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둘 사이?〉
일로제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난 내 발로 나온 거야. 그 집에 있으면 미칠 것 같아서.〉
〈…….〉
〈설령 공작이 죽어 버린다 해도 그 집으로는 안 돌아가. 그러니 이아페, 너도 이제 날 찾아오지 마.〉
〈일로제, 나는….〉
〈너랑 나는 남이야. 이제는 다시 와도 안 봐. 절대로.〉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던져진 시선은, 이아페가 어릴 적에도 몇 번 받은 적이 있는 것이었다.
카일라인가의 방계 귀족들이 일으킨 불의의 화재로 어머니가 죽은 이후.
그의 형은 이따금 이아페를 보면서 마치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원망을 담은 형형한 눈빛. 그것에 이아페는 몇 번이고 몸을 움찔했다.
그럼에도 이아페가 일로제를 너무도 의지한 것은, 눈을 감았다 뜨면 방금의 그것은 착각이라 여겨질 만큼 다정한 형으로 자리했기 때문이다.
함께 있으면 전부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아페의 희망일 뿐이었다.
어느 날, 일로제가 공작과 대화를 나눈 후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힌 날이 있었다.
이아페는 자신이라도 형의 마음을 풀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다.
하지만 그 방에, 일로제는 이미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아페가 공작에게 이 사실을 전했으나, 그는 너무도 무감하게 한마디를 뱉었다.
〈그러냐.〉
그때 이아페는 확신했다.
이 사람이 일로제를 나가게 만든 것이다.
제 유일한 버팀목을 뺏어 버리고 만 것이다.
심지어 펠트너는 일로제가 남부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아페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형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면서.
분명 제 마음 따위는 아무렇지 않기에 그런 것이겠지.
그렇게 혼자가 된 이아페는 5년이 지난 후에야 형을 다시 만났다.
일로제는 이아페를 반기지 않았으나, 아주 잠깐의 시간이라도 꼬박꼬박 내주었다. 예전보다 훨씬 표정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일로제가 펠트너의 입김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자리를 잡은 지금이라면.
마음 놓고 공작저에 머무를 수 있을 듯해 언제든 집을 찾아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일로제가 이아페를 끊어 내는 트리거가 되었다.
항상 품고 있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을 터뜨리듯, 일로제는 이아페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다.
〈대체 왜 그래, 일로제. 나도 알아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할 수 있어.〉
이아페는 일로제를 붙잡았다. 하지만 일로제는 뿌리쳤다. 화병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로제가 괴로운 표정으로 뱉은 답은 이아페의 심장을 뜯어내 나락까지 추락시켰다.
〈…네가 어머니가 타들어 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면,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 걸지도 못해.〉
어머니는 온몸이 탄 채로 죽었기에, 그 모습이 잔혹해 이아페는 장례 날에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그 모습을 일로제가 봤다고?
이아페의 눈이 잿빛으로 흐려졌다. 그래서 이 집에 발을 들이기가 싫은 거구나. 이 집과 연관된 모든 게 싫은 거구나.
이아페는 다시 수도로 올라오는 며칠 내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을 짓누르는 압박이 수시로 그를 잠식해, 라온마저도 당황케 했다.
만약 그때, 가면무도회에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끝이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었겠지.
어찌 됐든 일로제가 이 집에 다시 발을 들인다니, 신변에 위협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애초에 제 앞에 앉은 저 남자가 직접 일로제에게 연락을 했을 리도 없다.
아마 남부 기사단에서도 축제 기간 수도 방위를 위해 몇을 파견 보낸다는 소식을 들은 것뿐이겠지.
“얼굴을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확신하는구나.”
펠트너가 입에 머금은 와인을 삼키며 담담히 대답했다.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혹은 누군가 다시 한번 사실을 상기시켜 주길 바라는 걸지도.
“공작님께서 그리 만드셨으니까요.”
펠트너의 시선이 이아페를 향했다.
어릴 적엔 저 무심한 눈초리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일로제를 내보낼 때도, 친척들이 혼자 남은 이아페를 향해 손가락질할 때도, 숱하게 마주했던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하지만 지금의 이아페는 그보다 더 무심한 어조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가 끊어지고, 다시 아슬아슬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아페는 조용히 와인을 입에 댔다. 그저 이 적막한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며.
주말에 있을 그녀와의 시간이 더욱 절실해지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