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45
@45. 이아페와 르디엘
이아페와의 주말 특별 과외는 오늘도 유리온실에서 하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좀 남아 있었기에, 그가 오기 전 잠시 정원을 거닐었다.
여기 살게 된 지 길다면 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못 가 본 곳들이 많았다.
그래서 탐험하듯 정처 없이 걷다가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다다랐을 때.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보자 르디엘이 해사한 미소와 함께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햇살 청년.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르디엘이 쪼르르 달려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아르비나 기사단의 훈련복에 모래가 묻어 있었다.
“훈련 중이었어요?”
“네, 잠깐 꿀 같은 휴식이죠. 테드릭 단장님께 훈련이 너무 강도 높다고 건의 좀 해 주실래요?”
“싫어요.”
“단호하시군요. 그나저나 어디 가고 계셨어요?”
“음… 출발점으로?”
“흠, 심오하네요. 오늘은 음악극 보러 안 가세요?”
“네. 손님이 오기로 해서.”
“휴, 다행이네요! 저는 오늘 평소보다 3배나 힘들게 훈련 중인데 아가씨만 음악극 보러 가시면 배 아플 뻔했어요.”
“마음을 정말 곱게 쓰네요. 엄살도 심하고요. 배우고 싶어요.”
“뭘요, 그 정도는 아닌걸요.”
비꼬는 말에도 르디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후원의 분수대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르디엘이 갑자기 분수대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그 앞에서 뭔가를 줍는 듯 허리를 숙였다.
“뭐예요? 동전?”
분수 앞이니까 누군가 동전을 던졌는데 그게 옆에 떨어진 건가? 말도 없이 혼자 줍다니, 역시 돈독이 올랐군.
현장 검거를 위해 몸을 옆으로 기울여 그를 보려는데, 바닥의 무언가를 만지작대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동전보다 좋은 거죠.”
르디엘이 이리로 와서 내 왼쪽 귀 뒤에 뭔가를 꽂았다. 살짝, 그의 손이 귀에 스쳤다.
손을 내린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아가씨.”
그의 맑은 비취색 눈이 웃음을 머금은 채 나를 담았다.
‘그래, 인정. 저 사람은 성기사가 맞다. 아니면 사람 얼굴에서 저렇게 빛이 날 리가 없다.’
이번에는 신성력으로 빛을 낸 게 아니었지만, 그냥 빛이 느껴지는 외모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르디엘은 봐 봐요, 하고 말하며 나를 살짝 이끌었다.
분숫가에 다다른 나는 옆으로 걸터앉아 내 모습을 물에 비쳐 보았다. 그도 내 옆에 함께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내 귀 뒤에는 작은 꽃 두 송이가 꽂혀 있었다. 하얀색에 연분홍색 물감이 흩뿌려진 것 같은 무늬를 가진, 특이하게 생긴 꽃이었다.
나는 귀 뒤에 꽂힌 것 중 하나를 뽑아 르디엘에게 내밀었다.
“죄책감 드니까 하나만 꽂을래요.”
“죄책감이요?”
그가 꽃을 받아 들었다. 내 시선이 다시 물에 비친 내 모습으로 향했다.
“꽃을 함부로 꺾으면 안 돼요.”
불과 최근까지 꽃이 피지 않아 황폐하게 마음이 시들어 버린 지역에 있다 왔는걸.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괜히 내 모습을 물에 계속 비춰 보고 있었다.
그때 물에 비친 풍경들 사이로, 르디엘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죄책감을 나눈 걸까요, 아가씨?”
르디엘이 분숫가에 올린 제 한쪽 무릎을 껴안은 채, 고개를 옆으로 살짝 숙이고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한쪽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고, 내게 받은 꽃을 꽂은 채였다.
넋을 잃고 바라볼 뻔했다.
갑자기 순정 만화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날씨 좋은 날, 맑은 물이 있는 우아한 분수대 버프를 받아 괜히 몽글몽글한 감각이 차오를 때쯤.
“웽….”
웽?
“웨엥!”
고막을 울릴 듯한 진동 소리가 들리더니, 내 귀 뒤에 꽂혀 있던 꽃에서 웬 벌레 하나가 나왔다.
“으악!”
“허으헉…!”
나는 놀란 나머지 황급히 일어서며 르디엘을 밀쳤고, 그는 그대로 분수 옆 정원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귀에 꽂힌 꽃을 마구 털어 내고는 발로 마구 밟았다.
“죽어! 죽어!”
팍! 탁! 퍽!
이 소름 돋음이 다 가실 때까지, 나는 발길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르디엘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식겁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았다.
“허억… 헉….”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꽃은 흔적도 없이 짓뭉개진 상태였다.
내 머리는 벌레의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하겠다는 제1의 목적을 수행하느라 산발이 되어 있었고.
후, 그래. 순정 만화는 개뿔이지.
이건 현실이다.
“괜찮아요?”
나는 혼이 빠진 것 같은 르디엘을 일으켜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동공 지진을 하고 있던 그가 내게로 손을 뻗어 내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그때, 귓가에 다시 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손에 힘을 팍 풀어 버렸다.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려던 르디엘은 다시 한번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그의 손을 잡고 있던 내 무게중심도 앞으로 기울었다.
순식간에 나는 철푸덕, 앞으로 쓰러졌다.
다행인 건 내 바로 앞에 르디엘이 있어, 그냥 바닥에 고꾸라지는 것은 면했다는 것이다.
“어….”
르디엘의 품에 안긴 꼴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나는 오른손으로는 앉아 있는 르디엘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지탱하고 있는 채였다.
순간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닿는 바람에 화장이 묻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황급히 살폈다.
다행이다. 안면 자국은 남지 않은 것 같다.
미안해요, 하고 말하며 황급히 일어나려는데, 귓가에서 르디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아가씨 뒤에 벌레!”
“어… 어디 어디요? 뒤에 붙었어요? 빨리 떼 줘요! 뭐 해요, 벌레 못 만져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서 옆을 바라보았다. 르디엘이 뭔가를 살피는 듯하더니 놀리듯 말했다.
“…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와, 실화인가.
나는 정색을 하며 그의 손을 탁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디엘도 나를 따라 일어나, 옷을 탈탈 털며 말했다.
“진짜로 벌레인 줄 알았죠.”
얄미운 르디엘의 말투에 꿀밤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레가 그렇게 싫으세요? 자세히 보면 귀여운데.”
“으, 그걸 왜 자세히 봐요? 벌레 퇴치하는 성석은 없어요?”
“성석은 없고, 결계를 만들어 둘 수 있긴 하죠. 작은 벌레까지 24시간 내내 다 막으려면 빈틈없이 견고해야 하는데, 그 인건비가 꽤나 드니 주로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신전이나 황실에서 쓰는 것이긴 하지만요. 그곳을 제외하고 결계를 쓰는 건… 카일라인 공작가 정도일까요?”
반쯤 농담으로 던진 질문에 르디엘이 현실적인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벌레를 퇴치하려면 돈을 내라는 거군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고용해 주셔도 좋고요. 경력도 있….”
그런데 그때.
바스락.
누군가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자, 그곳에는 이아페가 서 있었다.
“이아페, 벌써 왔어요?”
썩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산책 중이라 하셔서 나와 보았는데.”
이아페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어쩐지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음걸음마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약간의 싸늘함과 위압감,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홀린 듯 그를 바라보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새 나는 이아페와 르디엘 사이에 낀 모양새로 서 있었다.
“정원에서도 호위를 데리고 다니시는 거군요, 시샤 님.”
왜 나한테 하는 소린데 걔를 보고 말해…?
이아페는 르디엘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노려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표정이었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그의 목소리에서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고, 몸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을 뿐.
“물론 어디서나 시샤 님의 안전을 위해서는 대동해야겠지만….”
이아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느새 표정을 풀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짙게 풍기던 냉기가 착각이었던 것처럼.
“지금은 제가 호위를 담당해도 될까요?”
그가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호위라니, 그런 거 아닌데….”
나는 르디엘 쪽을 힐끗 보았다. 그러나 르디엘은 그 말에 부정하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기사 자격도 없으면서 호위를 하겠다는 건가요? 아가씨, 가시는 곳까지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르디엘도 내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대체 뭐지. 두 남자가 내게 손을 내민 이 상황은.
“그 손 내리지?”
“너야말로.”
이아페와 르디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니까 지금… 날 두고 싸우는 건가, 혹시?
하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하고 흥미로운 것은, 초면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아페의 냉기가 한층 짙어졌다.
르디엘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고.
왠지 내가 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지만, 누군가는 이 대사를 날려 줘야 할 것 같다.
“혹시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
소설 속에서 이아페의 친구는 라온 이외에는 나온 적이 없는데. 내가 모르던 새로운 스토리가 있는 건가?
“아뇨, 모릅니다.”
“그럼 저도 모릅니다.”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착각이십니다, 시샤 님. 그보다 어서 과외를 하러 가는 게 좋겠습니다. 자, 여기에 손을.”
“아르비나 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는 기사로서 아가씨를 낯선 남자와 단둘이 보낼 순 없죠. 함께 가요, 아가씨.”
이아페와 르디엘이 각자 펼쳐서 내민 손을 내게 한 번 더 흔들었다. 에스코트할 수 있게 손을 올리라는 의미였다.
“아니, 저기….”
“곤란해하시잖아. 그 손 내리지, 족제비 같은 자식.”
“저기….”
“그걸 알면 네가 내려, 모기 같은 좀생아.”
자, 여기서 문제.
우리 집 정원에서 호위를 논하는 족제비와 모기 중 내 호위 기사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둘 다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