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57
@57. 예, 아니요
시샤가 갓 깨어난 후.
그녀의 방에서 나온 르디엘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이제 막 밝아 오는 새벽빛을 받은 아르비나 저택의 중앙 정원은 꽤나 장관이었다.
“덕분에 수월히 시간을 얻어 냈지만… 참 신경 쓰이는 아가씨란 말야.”
원래 밤새 간호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어제 그녀에게는, 신성력으로 치유한 후 그가 특별히 해 주어야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성석을 확인하고, 잠시만 머무르다 가려고 했는데.
자리를 뜰 만하면 그녀는 몸을 뒤척이고, 눈을 붙일 만하면 ‘으으….’ 하고 신음을 뱉었다.
평소 그녀에게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괴로운 표정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지켜볼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지금이 되어 버렸다.
르디엘은 시샤의 방에서 가지고 나온 성석을 매만졌다. 다른 성석을 두고 나오긴 했으나, 그것도 효력이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역시 다른 처방이 필요하려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의 방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뭐지?”
건물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르디엘이 황급히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곳에는….
“…….”
퀭한 표정으로 창문가의 벽에 기대어 앉은 이아페 카일라인이 있었다.
“뭐야, 너?”
시샤의 방 바로 근처였기에, 르디엘이 입 모양으로만 그렇게 질문했다. 이에 이아페도 입을 뻐끔대어 답했다.
“신경 쓰지 마.”
이아페가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시샤에 대해 묻지 않는 걸 보니, 이미 그녀가 깨어났다는 이야기는 엿들은 것 같았다.
밤새 여기에서 이렇게 숨죽이고 있었던 걸까.
밤에야 어두워서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지만, 날이 밝으면 분명 누군가에게 들킬 텐데.
기껏 그녀와 함께 있지 않았던 걸로 입을 맞춰 뒀더니 이런 복병이 있나.
‘별로 협조해 주고 싶지는 않지만….’
르디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아페의 모습을 훑더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아페가 뭐 하냐는 듯 그를 무섭게 노려봤다.
“기억하지? 숨바꼭질.”
멈칫. 이아페는 여전히 르디엘을 노려본 채였으나,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르디엘이 이아페를 향해 손짓했다. 순식간에 사르르, 이아페의 모습이 사라졌다.
신성력으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르디엘이야 제 신성력의 잔재를 느껴 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을 터였다.
“얼마 못 가서 풀릴 거야. 그 전에 돌아가.”
“…….”
이아페가 르디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르디엘이 왜 저를 위해 이런 일을 해 주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동력이 언젠가의 잘못에 대한 알량한 죄책감이든,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동정이든. 이아페는 질문도, 인사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르디엘은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보지 못할 테니.
이내 르디엘이 몸을 돌렸다.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아페가 고개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시샤 님이 깨어나셔서 다행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곳에 있다 가야겠다.
커튼이 쳐져 있어 그녀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지만…. 이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작은 존재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그는 살 것 같았다.
동시에 불안했다. 어찌할 겨를 없이 꺼졌던 저 미약한 불길이, 다시 연기가 되어 날아가 버릴까 봐.
얼마 후, 사용인과 대화하는 그녀의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돌아가기로 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 봤자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이아페… 려나….”
제 이름이 들린 것 같았으나 아마 착각일 터다. 어쩌면 자신을 책망하는 말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이아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창문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찌릿, 하는 통증이 다리 전체에 일었던 것이다.
“…….”
그는 말없이 통증을 참았다. 이제 와서 이런 고통 따위 때문에 소리를 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함부로 걸음을 옮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아페는 내적 호흡을 하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입술을 말아 꽉 깨문 채였다.
그런데.
벌컥!
“으으윽.”
갑자기 열린 창문에 제대로 부딪혔다. 창문 자체는 참을 수 있는 고통이었다.
문제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찌르르르르르!
고통은 대단했다. 제 발에 번개가 친 것이 분명하다.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너무도 맑은 것이 이해가 안 갈 정도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뱉은 입을 막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르디엘이 건 투명화의 효력이 다 되어 가던 시점에 충격이 가해지자 신성력이 풀리고 말았다.
“이아페…?”
아아, 이아페는 번개가 친 듯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화들짝 놀란 시샤의 목소리였다.
* * *
“이아페? 여기서 뭐 하는….”
창문가에 선 이아페를 보고 놀란 것도 잠시, 멀리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래서 말야! 톰에게 동전을 뚫어서 반지를 만들면 어떨지 조언을…!”
“쉿, 곧 아가씨 방 근처야. 주무시고 계실 테니 조용히 해.”
나는 황급히 창문 밖으로 몸을 쑤욱 빼내어 이아페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시샤 님…?”
뒤를 돌아본 그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다.
“들키기 전에 들어와요!”
이아페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잽싸게 창문을 닫고 커튼을 확 쳤다.
“…….”
급박한 상황이 종료되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창문가에 걸터앉은 이아페가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옷차림은 어제 그대로다. 우리의 서브 남주는 같은 옷이 50벌 정도 있는 소년 만화 주인공이 아닌데도.
“설마… 밤새 밖에 있었어요?”
그가 대답하기 싫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입을 벌리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이아페가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가야 하는 걸 아는데… 제가 여기 있는다고 해서 뭘 해 드릴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의 목소리가 제 잘못을 아는 상태에서 혼나는 아이처럼 기어들어 갔다.
“그래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쓰러지셨는데 차마 저만 편히 쉴 수가 없었….”
“잠깐.”
그의 말에는 분명한 어폐가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를 짚었다.
문득 옆을 돌아본 이아페가 창문가의 선반 부를 살짝 짚은 채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괜찮으십니까?”
훅, 코끝에 간지러운 향이 와 닿았다.
머스크와 우디향이 섞인 향.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는 분명 밤새 저 밖에 서 있었을 텐데도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이 향기, 향수가 아니라 체향이었나. 사향노루야, 뭐야.
“다시 머리가 아프십니까? 아직 회복이 필요하신데 제가 방해해서….”
“거기서 더 말하기만 해 봐요.”
흘기듯 바라보며 톡 쏘자 그가 말을 멈추었다. 대신 빤히 나를 바라봤다.
시선 안에 상대밖에 없다는 듯한 눈 맞춤. 걱정을 담은 시선이었으나,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그 시선에 살짝 내 눈빛이 흔들렸지만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의 말에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쓰러진 게 이아페 탓이에요?”
“…….”
“말해 봐요. 이아페가 절 쓰러지게 했나요?”
“…네. 죄송합니다.”
죄책감에 짓눌린 움츠러든 목소리. 불현듯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쿵, 떨어진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가 앞서 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저는….”
밤새 이런 생각을 하며 밖에 앉아 있었단 말이야?
내가 두 다리 뻗고 자는 동안 혼자 전전긍긍했을 그를 생각하자 목 한쪽이 울컥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며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생각했다.
내가 저를 노려보는 이 순간에도 죄책감만을 느끼고 있을 이 사람을.
“자, 이아페는 이제부터 예, 아니요만 할 수 있는 병에 걸렸어요.”
“네? 그게 무슨….”
“어허! 다른 말은 금지.”
뜬금없는 병 타령에 이아페의 시선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질문이에요. 이아페가 도서관에 가겠다는 저를 말렸었나요?”
“끝까지 말리지 못했….”
“쓰읍. 간결하게 예, 아니요로.”
잇새로 공기를 빨아들이며 그를 꾸짖듯 바라보자, 이아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그런데 제가 안 아프다고 주장하며 마차에 탑승했나요?”
“…예.”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제가 아프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예.”
“뛰자고 제안을 한 게 당신이 아니라 저인가요?”
“예.”
“그럼 여기서 이아페가 잘못한 게 있나요?”
“…….”
“아니요. 이번 정답은 아니요죠. 왜 이 쉬운 걸 대답을 못 하지?”
이아페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내 눈을 피했다. 아직 자책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정말.”
나는 두 손으로 그의 뺨을 잡고 끌어 올렸다. 차갑고 보드라운 살결이 두 손에 와 닿았다.
당황으로 동그랗게 뜨인 이아페의 두 눈이 나와 마주쳤다. 놀란 눈 아래로 살짝 모인 볼살이 그를 순식간에 귀염상으로 만들었다.
그 얼굴에 내 심장은 타격을 입었으나, 이 정도 내상을 티 낼 수는 없다.
태연히 그의 눈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건강 관리 못 해서 쓰러지면 그게 내 탓이에요?”
“아뇨. 그건 절대….”
“왜요? 내가 일 많이 줘서 야근한 건데.”
잠깐,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건 정말 내 탓이잖아.
산재를 신청해야 하는 감이 분명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쓰러진 것도 이아페의 탓이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이 같이 있어 줘서 다행인걸요. 나는 당신한테 고마워하고 있는데, 당신이 미안해하면 제가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시샤 님.”
“네, 이아페.”
“지금 슬프십니까?”
그의 깊은 자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슬퍼요, 그렇게 속삭이면서.
그러자 이아페가 그가 조금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안해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