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59
@59. 그대의 땀방울을 서리로
“들었습니까? 헤를 백작이 잠적했다는군요.”
아직 황제가 들어오지 않은 황궁 중앙 회의실. 잘 차려진 정장을 갖춰 입은 신사가 가십을 전했다.
아직 소문이 돌지 않은 따끈따끈한 정보였다. 그것을 제가 먼저 퍼뜨린다는 사실에 심취해 우쭐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런. 파산했다더니 빚을 갚지 않고 도망친 것인가?”
“파산이라고? 돈 자랑을 그렇게 해 대더니?”
“도박이지, 도박. 불법으로 돈을 끌어다 썼거든.”
“입버릇처럼 말하던 ‘돈 나오는 구석’은 어디 갔답니까?”
“아, 그 실체 없는 구석? 허풍이었겠지! 말로는 나도 미엘 신의 자식이라네.”
하하하, 왁자지껄하던 이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꺼낸 이가 아직 입이 근질거린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타깃을 찾은 남자가 부러 큰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아르비나 후작님!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티오라에게로 쏠렸다. 티오라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파산이 내 미래는 아닐 듯한데.”
그녀가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엘츠 말입니다. 후작님께서 자유 교역에 관한 승인을 받아 내 조만간 제국에 반입될 그 약초요.”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남자에게로 휙 쏠렸다. 갑자기 그 약초는 왜?
남자가 숨을 한번 들이켜고는 뱉어 냈다.
“헤를 백작이 독점 중이었답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 유일하게 엘츠를 재배 중인 농가의 실소유주가 헤를 백작이었다는 거예요. 이번에 기존 판매가의 10배로 대량 판매를 예정하고 있었답니다. 그걸로 빚을 갚으려 하였는데….”
뒷말을 하지 않아도, 결론은 알 수 있었다. 아르비나 후작이 엘츠 수입을 통한 보편화를 추진하면서, 독점 판매가 무산되었겠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그치가 원한을 품었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지요.”
걱정이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첨과 흥미가 뒤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때였다.
“후작이 일을 잘하고 있나 보지?”
갑자기 끼어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칼린느가 성큼성큼 걸어 중앙의 상석에 앉았다.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걸로 알지만. 그래도 말야,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걸리적거리는 것들이 많잖아. 원한도 살 수밖에 없더라고.”
칼린느가 생긋 웃었다.
어젯밤에도 살수의 습격을 받아서 직접 베어 버렸다던가. 호위 기사와 함께 각각 목과 허리를 베었다던가.
그녀의 태연한 미소를 바라보던 몇몇은 괜히 오싹해져서 몸을 떨었다.
칼린느가 데슬로 지방에서 꽃을 피운 일은 아직까지도 모였다 하면 살을 더해 가는 이야기라, 요즘은 더욱 궁금증이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엔 황가의 힘인지, 아니면 마법인지 알 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다 요즘에는 마법이 사실 숨겨 왔던 황가의 힘이라는 소문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동안은 힘을 축적해 오느라 드러내지 못했으나, 칼린느 황제에 이르러 마법을 제어하는 힘을 완성해 냈다나 뭐라나.
그러자 소수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 어제처럼 황제를 시해하려 하거나, 정체가 밝혀진 마법사들을 더욱 박해하는 등.
하지만 대다수는 미묘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눈앞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황제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들은 황제의 뒤편 어딘가, 그림자처럼 서 있는 호위 기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질문하면 베어 버린다고 했지. 분명 진심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 * *
“너무… 너무 영롱하잖아요, 프렌! 와, 어쩜 이렇게 아련한 표정을 그려 내지?”
나는 카실의 집 거실에 크게 펼쳐진 음악극 포스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코를 벌렁거렸다.
역시 미리 그림을 사 놓길 잘했다. 이 사람은 앞으로 대성할 것이 분명하다. 역사에 남을 미래의 스타 화가가 눈앞에 있다.
“과, 과찬이세요. 아직 부족한데….”
“에이,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1차 포스터를 그린 게 누구인지 찾아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던데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음악극 ‘그대의 땀방울을 서리로’의 2차 포스터였다.
여름 청보리밭 사이에 선 여인.
얇은 원피스가 겨울 드레스로 변화하고 있는 동시에,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에선 뜨거운 햇볕이 차가운 얼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매우 뇌쇄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그 앞에서 기사의 맹세를 하고 있다.
처음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림에 계속해서 눈길을 보내면서도 대놓고 찬사를 보내진 않았다.
굵게 곡선이 부각된 프렌의 그림체는 여기에서 주류를 이루는 화풍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부인들이 공개적으로 포스터의 화가를 찾기 시작하면서 판도가 달라졌다.
귀족들에서 시작해 사용인들 사이, 평민들 전체에게까지 본격적으로 음악극의 입소문이 퍼진 것이다.
프렌이 부끄러운지 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음악극이, 조, 좋아서… 제 그림이, 덕을 본 거예요오….”
“반대죠. 그림이 좋아서 음악극이 덕을 봤어요. 아, 물론 음악극도 좋지만!”
익명의 후원가에게서 지원을 받아 만든 로맨스 판타지 음악극, ‘그대의 땀방울을 서리로’.
그것은 흥행, 흥행, 유례없는 대흥행을 하는 중이었다.
“익명으로 후원하다 보니 초대장이 날아와도 참석하려는 고정 관객이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말이에요.”
“확실히 포스터의 영향이 컸습니다. 라온이 ‘정혼자와의 필수 데이트 코스’로 소문을 퍼뜨린 것도 괜찮은 전략이었고.”
마치 시작하는 커플들이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가듯. 이때 포스터에 홀려서 예매하듯!
가슴 뛰는 로맨스 연극으로 소문을 낸 뒤, 매혹적인 포스터로 홀려서 극장에 들어오게 만든 것이다.
‘한번 관객이 차니 그 뒤는 오히려 쉬웠고.’
클리셰 범벅에 아련함 큰 숟갈을 투하한 이 극은 ‘아는 맛이라 더 무서운’ 극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입소문이 퍼졌고, 지인을 데리고 두 번 세 번 재관람을 하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다행이야. 이렇게나 흥행했으니 축제 때 반응 이끌어 내는 건 훨씬 수월하겠네.”
카실이 제 동생의 그림을 보며 우쭐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 음악극이 흥행하는데 우리가 다행이냐고?
그도 그럴 것이, 이 음악극의 익명의 후원자는 바로 이아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각본가는 나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1년 365일 태양만이 내리쬐는 나라가 있다. 이곳에 사는 은발의 소녀 린느는 항상 탁한 검은색 목걸이를 가지고 다닌다.
검은색은 부정적이라 여겨졌기에 사람들은 린느의 목걸이, 그리고 린느 자체가 불행의 상징이라 여겨 박해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마을을 지키는 기사만큼은 그녀를 평범하게 대한다.
가뭄이 극심해진 어느 날. 사람들은 하늘에 린느를 제물로 바치고자 한다.
하지만 제단에 올려진 린느를 구하고 기사가 칼에 찔리기 직전, 검은 목걸이에서 빛이 나오며 물빛으로 변한다.
린느는 사실 이 나라의 잃어버린 공주였고, 검은 목걸이는 황가의 상징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진정한 후계자에게 힘을 준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린느에게 했던 일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하며 벌벌 떤다.
하지만 린느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 포용력에 목걸이는 린느에게 모든 힘을 일임한다.
린느는 오랜 가뭄으로 시달린 나라에 비를 내린다.
그리고 힘을 떼어 내 자신의 곁을 지킨 기사와, 묵묵히 제자리에서 일하던 이들에게 부여한다.
그렇게 나라는 린느 공주의 힘으로, 더욱 화려하고 풍족한 미래를 맞이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음악극은 물빛 축제에서 마법을 공표하기에 앞서 미리 깔아 놓는 밑밥이다.
극의 힘은 어찌나 놀라운지, 분명 생각 없이 로맨스에 치중하며 보더라도, 저도 모르게 이야기가 내세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한다.
특히 이 극처럼 실제 상황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경우는 더더욱.
그리고 지금, 그 효과대로 사람들 사이에는 ‘마법이 사실은 나쁜 힘이 아니다.’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치 음악극 속 검은 목걸이가 사실은 물빛이었던 것처럼.
불행의 상징이라 여겼던 린느가 사실은 나라를 가뭄에서 구해 내는 공주였던 것처럼.
“그러고 보니, 벌써… 축제가 일주일 남, 남았네요. 두근거려요.”
프렌에게는 아직 나와 이아페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카실의 마법을 이용해 뭔가를 준비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음악극 포스터를 부탁한 것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준 것이다.
“그보다 프렌. 일은 할 만해요?”
“네, 책의 내용을 상, 상상하며 그리는데, 너무… 재밌어요.”
프렌이 행복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카실이 그런 프렌을 보며 감격스러웠는지 킁, 하고 콧잔등을 쓸었다.
그녀는 평소 책의 삽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책들도 하나하나 소장해 가며 컬렉션을 만드는 중이었다.
두고 봐라, 이거 나중에 꼭 초판본으로 가치가 5천 배는 뛸 테니까.
“그럼 이제 저는 가 볼게요. 저녁에는 약속이 있어서.”
밖으로 나오는 나를 이아페가 배웅했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에게 물었다.
“이아페도 가 봤어요? 개빗사 말이에요.”
“네, 전에 몇 번. 전체적인 만족도가 높은 곳이었습니다.”
“기대해야겠네요.”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어쩌면 내게는 처음 있는 가족들과의 외식이었다.
수도에서 세 번째로 호화로운 식당이라는 개빗사.
수도 외곽이라는 위치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6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곳에서.
축제 준비도 잘되어 가고 있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좋고. 어쩐지 요즘은 비알로도 전보다 덜 설치고.
들뜬 기분에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나는 손가방을 흔들며 마차에 올랐다.
“어. 끊어졌네.”
툭. 가방끈이 끊어지며 손가방이 떨어졌다.
왜인지 약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전부 기우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