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70
@70. 그날, 가면무도회 (2)
사용인은 후원의 작은 분수대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냥 돌아가겠다 말하고 싶은데, 입을 열었다가는 상태를 들킬 것 같았다. 지금은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무시한 채 그저 걷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천천히 숨 쉬어요, 천천히.”
그때 시샤가 시선은 앞에 고정한 채, 이아페의 한쪽 손을 잡아 들었다.
“…….”
이아페가 시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샤가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등을 느린 박자로 토닥였다.
그녀가 천천히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아페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느리게 호흡했다.
그녀가 화려한 제 머리 장식 하나를 뽑아 들었다. 뭘 하는 건가 했더니 그것을 이아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자연스레 장식의 울퉁불퉁한 이물감에 온 감각이 집중되었다. 놀랍게도 서서히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흐려졌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건 여기 없어요.”
서서히 숨이 안정되었다.
가슴의 통증이 사라져 갔다.
“아무 일도 없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눈에 가득 담긴 걱정과는 달리,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계속해서 이아페를 토닥였다.
그 말에 이아페는 정말로 안도감을 느꼈다.
“도착했습니다. 다시 한번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분수대 앞에 도착하자 사용인이 인사 후 떠나갔다. 시샤가 이아페의 손을 끌어 분수대 가에 앉혔다.
그동안 이아페는 멍하니 시샤를 바라봤다.
이상한 여자. 정말 이상한 여자.
시샤는 이아페의 앞에 선 채 그의 눈을 올곧게 바라봤다. 이아페는 아까까지와는 다른 혼란을 느꼈다.
이아페가 온전히 안정을 찾자, 시샤가 손을 떼어 냈다.
이제 떠나는 걸까? 이아페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그의 옆에 철퍼덕 앉았다.
“먹을래요? 아니다, 먹지 마요.”
언제 집어 든 것인지 그녀의 손에는 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시샤가 병째로 꿀꺽, 꿀꺽 술을 들이켰다.
“삶이 참 마음대로 안 돼요, 그렇죠?”
시샤가 이아페를 바라보며 슬프게 싱긋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도 거대한 운명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어요. 어떤 놈이 정보만 먹고 날라서… 죽음만이 답인가.”
이아페는 그녀가 지칭하는 ‘어떤 놈’이 자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왜 죽음을 말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죽음의 대상이 시샤 본인인지, 이아페인지도 애매했다.
“그래도 지금은 행복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러니까 당신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갖고 있는 기회를 버리지 말란 말이에요. 나중에 보면 별일도 아니었네, 할 거예요.”
“…….”
이아페는 말없이 시샤를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음에도 시샤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있잖아요. 저도 가끔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들이 꽉 차서, 아무리 눌러도 밖으로 넘쳐 흘러나와 버릴 때.”
그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니. 그저 밝아 보였는데.
“계속 그러다 보면 감정을 담는 상자가 너무 닳아 버려서 결국 구멍이 나는 거거든요.”
“…그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 이젠 존댓말하네. 아까는 상도덕 없이 말하더니.”
“죄송합니다….”
이아페는 저도 모르게 사과를 했다. 시샤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저를 많이 좋아해 준 사람을 떠올려요. 가족이든, 친구든. 그럼 그리운 추억들이 저절로 생각나요.”
“좋은 생각만 하라는 뜻입니까?”
“아뇨. 그립다고 해서 무조건 좋지만은 않아요.”
“…….”
“근데 지금 괴로운 건 조금 잊혀요.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도, 실체 없이 부풀었던 것들은 사그라들어요. 가끔은 행복하고, 가끔은 미안해서.”
“…….”
“당신이 왜 지금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아픈 건 분명 그만큼 행복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겠죠?”
이아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행복한 기억이라. 그래, 그랬었지.
“…떠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것조차 죄송한 일이라.”
어째서일까. 이아페는 자기도 모르게 속에 묻어 뒀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음, 하고 말을 고르던 시샤가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그 사람이라면, 당신이 슬픔이나 죄책감 때문에 다른 기억들을 모두 가둬 버리는 건 너무 슬플 거예요.”
“…….”
“저와의 행복한 추억들을 떠올려 줬으면, 하고 생각할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시샤가 담담하게, 하지만 너무도 견고하게 이아페의 마음을 감싸 안았다.
어머니의 이름을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나날들이었다. 지난 기억은 땅 밑으로 깊숙이 숨기고, 마지막을 추모하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추억을 꺼내 놓아도 된다고 말한 것은, 시샤가 처음이었다.
이아페는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저기, 하늘 봐 봐요.”
시샤가 이아페를 톡톡 쳤다.
“별이 너무 예쁘잖아요.”
이아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쏟아질 듯한 별들이 그들의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불현듯 깊은 우물 속에서 솟구치듯 올라와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 같아선 들판에 돗자리 깔고 담요 덮고 앉아서 뱅쇼까지 한잔하고 싶긴 한데. 제 로망이거든요.”
시샤가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싱글벙글 웃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 만났을 때 본인에게 지었던 것과는 또 다른 순수한 웃음이었다.
그래, 이 미소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아페의 생각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아페는 그녀의 미소를 계속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지금 그가 가진 가장 좋은 패를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원했던 그 정보였다.
“비트리비아 호수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던 시샤가 이아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당신이 찾는 그곳. 내 추억의 장소.”
눈을 깜빡이던 시샤의 입이 뭔가 알아챈 듯 조금 벌어졌다.
“당신 설마….”
시샤의 커다란 눈이 가면 사이로 보이는 깊고 오묘한 자색 눈동자를 살폈다.
그녀가 이아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수선화가 그려진 가면에 가 닿았다.
사륵. 그녀가 조심스럽게 가면을 벗겼다.
“…이아페.”
그녀가 또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르지 말라고 그토록 경고했는데도 다시 부르고야 말다니.
정말… 이상한 여자.
그리고 지금, 그녀가 불러 준 이름이 선물 같다 느끼는 이아페 본인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내게서 돌아설까?’
이아페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샤가 자신에게 접근한 목적은 단 한 가지. 도서관이 봉인되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서였으니.
답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이아페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남부… 그게 이맘때였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많이 아팠겠다. 정말.”
이아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시샤는 너무도 애틋하고 쓸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다른 감각으로 가슴이 아려 왔다.
그녀가 말하는 때가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즈음 수도로 돌아온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테니 저렇게 말하는 거라 유추했을 뿐.
“비트리비아 호수,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더 일찍 말했어야 했습니다.”
“안 늦었어요. 당신이 이번에야말로 진짜 답을 가지고 온 걸 알거든요. 그리고 말이에요.”
시샤가 조금 망설이더니 이아페를 향해 말했다.
사람들이 슬프고 괴로운 건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당신이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건 속죄의 길이 아니라고. 그런 식으로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고,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리고…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시샤가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아페에게 있어서는 그 미소가 너무도 달았다.
그녀가 이토록 강인하고도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경계하고 재는 통에 무시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더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이 사람의 옆에 있어야겠다. 아니, 있어야 한다.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길을 걷든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 뒤에는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우리 동갑이거든요. 그러니까 친구 해요.”
시샤의 제안에 이아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갖가지 질문을 늘어놓았다.
머리가 직모인지, 곱슬인지. 좋아하는 술이 무엇인지. 어릴 때 이를 어떻게 뽑았는지도.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너무도 즐겁게 나눴다.
“이거, 저한테 주면 안 돼요?”
시샤는 수선화가 그려진 제 가면을 달라고 하기도 했다.
“저는 상관없지만, 그걸 왜 가지려 하십니까?”
“엑스트라가 주인공 만난 기념품이에요. 내일은 성지 순례. 헤헤.”
다행히 그녀의 입장에서도 저와 만난 것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을 기념하겠다고 하는 것이겠지.
다만 그녀의 말에서 한 가지 바로잡아 줘야 할 것이 있다면.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시샤.”
지금 그에게 있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은 시샤 아르비나였다는 것이다.
시샤는 기쁜 표정으로 가면을 안아 들고 물었다. 수선화를 좋아하냐고.
수선화. 마법사라는 사실을 몇몇 친척에게 들키고 나서 눈치를 보는 게 일상이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유난히 많이 보여 주셨던 꽃.
어쩌면 이제는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생기 있는 눈 속, 넓디넓은 들판에 심어진 수선화 그 자체였으니.
* * *
그리고 지금.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데이지 꽃밭.
이아페는 제 앞에서 아름답게 웃고 있는 시샤를 바라봤다.
기적 같은 사람.
그녀는 이렇게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질 때면 운명처럼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속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본다. 저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진실되고 올곧아서, 설득되고 동화되어 기댈 수밖에 없다.
나의 하나뿐인 구원자.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을 환하게 비춰, 자신으로 하여금 직접 걸어 나올 수 있게 이끄는 태양.
그 때문에 자꾸 자신은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시샤의 연보라색 머리칼이 바람에 날렸다. 시샤가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이아페는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 서 있는데도, 그녀에게 가고 싶었다.
이제 이 감정은 더 이상 그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제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자신이 가진 이 힘마저도 그녀 앞에 질주하듯 달려가 무릎 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