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75
@75. 침묵 속 파멸
소극장이 몰려 있는 톤다 거리.
르디엘은 오늘 흰색 셔츠 위에 금빛 머리 색과 잘 어울리는 푸른 톤의 조끼를 입은 채였다.
캐주얼하게 입어도 잘 어울리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르디엘이 고개를 살랑살랑 끄덕였다.
“압니다. 빛이 나는 거. 저도 어쩔 수 없….”
“지금 걸어가면 딱 시간이 맞겠네요.”
나는 르디엘의 말을 자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르디엘은 말꼬리가 잘리고도 뭐가 즐거운지 실실 웃으며 옆으로 와서 걸었다.
“저희 커플룩이네요.”
“네?”
“아가씨도 오늘 흰색에 파란색 조합이잖아요.”
르디엘이 즐겁다는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르디엘.”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렇게 치면 여기 모두가 다자 연애를 하고 있는 거겠어요.”
거리에 나온 사람 대부분이 파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물빛 축제의 공식 드레스 코드가 파랑이었기 때문이다.
르디엘이 아, 하고 감탄하더니 씨익 웃으며 내게 살짝 몸을 기울였다.
“아가씨밖에 안 보여서 몰랐네요.”
나는 똥을 씹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르디엘은 가끔 남사스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시야각 무슨 일이에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보다… 여기 좀 보세요, 아가씨.”
“저는 시야각이 넓어서 앞을 보면서도 옆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크흠.”
르디엘이 헛기침을 했다. 당연히 옆이 보인다는 건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아까부터 굳이 계속 팔을 올렸다, 말았다, 한쪽 소매를 걷었다, 말았다 하며 정신 사납게 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어요?”
“그게 아니라, 아가씨. 뭐 보이시는 것 없어요?”
르디엘이 다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 알겠다.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그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극장까지 못 참겠어요?”
“네?”
“많이 급하면 저기 카페에서 다녀와도 돼요. 어… 음료 하나를 사면 이용해도 될 거예요.”
“뭐가 급해요?”
“뭐긴요. 화장실이죠.”
르디엘이 민망할까 봐 ‘화장실’이라는 단어는 특히 조용히 말해 주었다.
나는 뭐 소설 속 캐릭터는 화장실도 안 갈 거라고 생각하고 예의 차리고 그런 사람 아니야.
괜찮아, 갔다 와. 기다릴게.
“아니, 아가씨!”
하지만 르디엘은 티 나게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산 모양으로 기울더니,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왔다.
“저 안 급해요.”
“들어갔어요?”
“아니, 원래 안 급했어요!”
화장실이 아니라고? 그럼 뭐가 문제지?
“이거 보세요.”
심각해져서 그를 보는데, 르디엘이 한숨을 내쉬며 제 한쪽 손목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손목에는 웬 붉은 팔찌가 자리하고 있었다.
“팔찌?”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팔찌가 아니었다. 머리 끈이었다.
“아, 그때 산 거구나!”
“네! 맞아요! 와, 못 알아보는 줄 알고 정말 서운할 뻔했잖아요, 아가씨.”
축제에서 그가 샀던 붉은 머리 끈. 머리가 짧아 묶기가 애매하니 팔에 묶어 팔찌로 쓰는 모양이었다.
“오, 이렇게 쓰는 것도 예쁘네요.”
“거봐요. 빨간색 저도 잘 어울린다니까요.”
“안 어울린다고 한 적은 없어요.”
내 것을 가로채기에 뭔 짓거리지, 하고 생각했을 뿐 안 어울린다 생각한 적은 없다.
르디엘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작은 상자였다.
“열어 보세요.”
르디엘은 상자를 향해 턱짓했다. 이거 또 성석 하나 팔아먹는 거 아냐? 나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르디엘을 힐끗대며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상아색 머리 끈이 들어 있었다. 아, 이건 분명.
〈그거보단 이게 더 잘 어울린다고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 앞에 내밀었던 끈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사지 않았었는데.
“제 것 사는 김에 샀어요. 그냥 그 가게에 두고 가기가 아까워서.”
“이런 거 안 줘도 돼요.”
“붉은색 양보해 주신 감사의 표시니 받아 주세요. 저한테 다시 줘 봤자 또 팔찌로 써야 하는데요?”
르디엘에게 상자를 다시 내밀자, 르디엘은 받지 않겠다는 듯 손을 뒤로 감췄다.
“그럼 고맙게 잘 쓸게요.”
기왕 받은 거 지금 써 볼까.
나는 뒤로 손을 뻗어 머리를 잡고, 끈을 동여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동그란 고무줄이 아니라 기다란 끈이라 생각처럼 잘 묶이지 않았다. 평소에 리나가 머리를 만져 주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나.
르디엘이 낑낑대는 날 보며 풋, 하고 웃더니 머리 끈을 뺏어 들었다.
“묶어 드릴게요.”
“남의 머리 묶을 줄 알아요?”
“여동생 있다니까요.”
여동생이 있다고 머리를 잘 묶어 주는 건 아닐 텐데…?
비알로가 내 머리를 묶어 주는 모습을 상상했다가, 나는 황급히 고개를 팟팟 저었다.
“어어, 움직이지 마세요, 아가씨.”
그의 손이 살포시 머리 옆으로 스치듯 와 닿았다. 머리가 부드럽게 당겨지고 모아졌다.
르디엘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그가 머리를 정리하는 손길은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 미용실에 취직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손길은 왠지 소중한 무언가를 다루듯 조심스러워서, 조금 간지럽기도 했다.
나는 괜히 르디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좋은 오빠였나 보네요.”
“동생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텐데요. 휴, 뭐만 하면 불만, 불만이라….”
“동생도 불만을 가질 만하니까 가지는 거겠죠.”
“아가씨는 같이 있는 제 편을 드셔야지 왜 알지도 못하는 제 동생 편을 드세요?”
“만난 적 없어도 동생끼리 통하는 마음의 끈이 있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르디엘이 내 머리를 완성했다.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이내 극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나 재밌을까?
르디엘과 나는 비장하게 극장으로 들어섰다. 두근두근, 심장이 마구 뛰어 댔다.
* * *
“시샤 님은 음악극 ‘침묵 속 파멸’을 보러 톤다 거리에 가셨어요! 그것도 외간 남자랑…!”
니니안 켈린. 그 여자가 살롱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말은 그것이었다. 이아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온이 “로디스는?” 하고 묻자 니니안은 그제야 로디스와의 협상도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이야기했다.
“그것부터 말을 해 줘야지, 니니안! 다짜고짜 단장님이 음악극을 보러 간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해?”
라온의 말은 맞는 말이었으나, 이아페에게 있어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로디스와의 협상이야, 시샤 님이 나서셨으니 당연히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겠는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보다, 시샤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신규 정보가 이아페에겐 훨씬 중요했다.
“고맙습니다.”
“뭘요.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고 어서 가세요!”
니니안이 비장하게 이아페의 등을 떠밀었다. 그 순간 이아페는 동료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엥, 어디 가요, 이아페?”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라온은 이아페의 팔을 붙잡았다. 이아페는 그것을 싸늘히 떼어 내며,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내뱉었다.
“라온, 네가 얼마나 훌륭한 달변가인지 알아. 난 너를 믿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한마디를 더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라온은 손을 스르르 풀었다.
딸랑. 이아페가 문을 나서며 들리는 종소리와 함께, 라온의 머릿속에는 그의 음성이 플레이되었다.
〈이번 달은 월급의 두 배를 보너스로….〉
* * *
막이 쳐진 무대 뒤편에서 무언가 소음들이 들렸다. 곧 극이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르디엘과 나는 각자의 가슴 앞에 두 손을 곱게 모았다.
“제목만 들어도 설레요, 아가씨. 과연 주인공들의 서사가 얼마나 극도로 치달을지!”
“벌써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오, 이제 시작합니다!”
불이 모두 꺼지고 천천히 막이 올라갔다. 나는 기대에 찬 시선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나는 눈을 비볐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 없으니까. 그것도 관객석이 아니라 무대라니.
무대 한쪽에 서 있는 저 잘난 남자는 분명…. 아냐, 역시 잘못 본 거겠지?
나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팟 하고 떴다. 지금은 분명 안 보일….
“……?”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막이 올라간 무대 위에서, 새초롬한 표정의 이아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아페가 톤다 거리의 그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매가 마감된 상태였다. 표 없는 관객의 입장을 막고 있었기에, 그는 입구 앞에 서서 말없이 극장을 노려보았다.
‘제길. 시샤 님이 이 극을 원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표를 전부 다 사 두었을 텐데.
혹은 극을 연장해서 그녀만을 위한 공연을 열어 달라 할 수도 있었겠지.
그녀가 원하는 자리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극을 즐길 수 있도록.
그녀는 이아페 저도 모르는 제 마음까지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보듬어 주는데, 아직도 시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 아직 못 들어가신 거요?”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아페는 눈만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웬 장비들이 들어 있는 소쿠리를 든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배우는 뒷문으로 가야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아페는 그가 무슨 착각을 한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남자가 이 극장의 스태프라는 것도.
그래서 생각을 정정해 주는 대신 몸을 돌리며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깜빡했습니다. 뒷문이 어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