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85
@85. 기대도 됩니까
“시샤 님.”
“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 이 자세가 불편하다는 게 티가 났나?
“네, 좀….”
“역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보이셨습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을 뜻하는 거였구나.
그리고 이아페의 말대로, 일로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일로제가 이제는 정말 이아페의 편이라면, 검은 로브가 그를 찾아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야.’
역시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일로제는 이제 정말 이아페의 편인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저 잠깐만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마차에 오르기 전, 나는 일로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단장님?”
“혹시, 혹시 말이에요. 어두침침하고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일로제 경을 꾀어내도 절대 넘어가지 마요. 그런 사람들 말 듣지 않아도 앞으로 더 평화롭고, 돈독하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 펼쳐질 거니까.”
다급하게 말하자 일로제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러죠.”
“꼭이에요.”
다시 마차로 달려가면서도 나는 계속 뒤를 흘끗 바라보았다. 검지와 중지를 펼쳐 내 눈과 그의 눈을 차례로 가리켰다.
내가 그를 보고 있고, 앞으로도 보고 있을 거라는 의미로!
마차가 출발하자, 이아페와 둘만 남았다.
맞은편에 앉은 이아페가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오셨습니까?”
“그게… 이아페의 형님은 마법사가 아닌지 물어봤어요.”
“네. 어머니와 저만 마법사였죠.”
이아페가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럼 대체 원작에서 흑마법은 어떻게 쓴 거지? 일로제가 데리고 왔던 검은 로브들은 대체 뭐고?
아니, 잠깐.
‘애초에… 소설에서 일로제가 직접적으로 이아페를 공격한 적이 있던가?’
한번 의문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일로제를 보며 느꼈던 또 하나의 위화감이 대두되었다.
일로제가 이아페에게 느끼는 감정이 ‘죽이고 싶다.’라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는 것.
‘일로제는 이아페를 원망하면서도, 원망하는 자신을 그만큼 싫어하고 있었어.’
확실히 감정의 골이 깊어 보이긴 했지만 분명히 애정을 기반으로 한 거였다.
애정이 없었다면 이아페가 준 브로치를 자신의 모든 영광이 담긴 것들과 함께 보관할 리 없다.
아, 복잡해.
‘이아페와 일로제가 화해했으니까 분명 원작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그럼 마법이 추락할 일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역시 로디스 공작저를 다시 찾아가 봐야겠어. 검은 로브에 대해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겠지.
“수도로 가면 로디스 공작저에 가 봐야겠어요. 그 물건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해 보려고요.”
“저도 같이 가겠….”
“스읍. 안 돼요. 로디스 소공작과는 면식이 있다면서요. 제가 간다니까요.”
이아페가 카일라인 공자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에게야 ‘이안’이라는 가명으로 밀고 나간다지만, 로디스 가처럼 이아페의 얼굴을 확실히 아는 이의 앞에서 그가 마법사란 걸 밝힐 수는 없다.
“그런데 공작의 목소리, 이아페는 못 알아들었어요?”
그 거울의 방에서 공작이 뭔가를 가져갔을 때 이아페도 함께 있었는데.
“그날은… 파악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긴, 그 어둠 속에 갑자기 숨었으니까. 충분히 캐치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더워요?”
어쩐지 이아페의 표정이 붉어진 것 같아서, 나는 냉돌 하나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의 손에 내 손가락이 스쳤다. 그가 내 손가락 끝을 잡았다. 문득 다시 어제의 일이 떠올라 열기가 올라 왔다.
〈시샤 님이 사고를 당하신다는 생각만으로도 저는….〉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일렁였다.
그 뒤의 말이 예상이 가지 않아서. 끔찍한 악몽이라도 꾼 듯 위태롭게 떨고 있는 그때의 이아페가 너무도 신경 쓰여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마치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 같아서.
기대하면 안 될 결말이 기대가 되어서.
‘설마 이아페도 나를….’
아냐, 정신 차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시샤.
그때였다.
옆자리에 실린 무게감에 몸이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이아페가 내 옆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이아페?”
“냉돌 때문에 추워졌습니다.”
그게 그렇게까지 효능이 좋지 않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느새 내 손가락뿐 아니라 손 전체가 이아페의 커다란 두 손 안에 갇힌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이아페가 제 무릎 위에 얹은 내 손을 만지작댔다.
그의 엄지가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아페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기대도 됩니까?”
“네.”
냉큼 대답하자 이아페가 멈칫했다. 나로서는 가만히 있어도 호박이 굴러 들어온다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정자세로 앉은 채, 이제 빈손이 된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하지만 이아페는 먼저 제안한 주제에 미동이 없다.
‘머리도 내려 줘야 하는 건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나는 오른손을 조금 더 위로 올려 그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까지 닿지는 않아서 허공에 손을 허우적댔다.
그때, 보드라운 고양이 털 같은 것이 손끝에 와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이아페가 쓰다듬어 달라는 듯 날 향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머리 뒤편을 따라 부드러운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동안 이아페가 자연스레 내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이 자세로는 그가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어느새 그의 고개가 돌아가 앞을 향했다. 자연히 내 손은 그의 볼에 가 닿았다.
이아페는 눈을 감은 채였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볼을 천천히 매만졌다.
“음악극 정말 잘 봤어요.”
“…네.”
“드디어 이 말을 했네요. 그날은 급한 일이 있어서 인사를 못 했어요. 시간만 있었으면 배우 대기실도 구경시켜 달라고 했을 텐데… 저도 아쉽다고요. 그리고 어제,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와 줘서 고마워요.”
지금이라도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옆에서 살짝 잠긴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다칠지도 모르는 그 고통을 다시 겪는 것보다는. 형을 평생 보지 않고 사는 편이 나을 겁니다.”
“못된 말 금지.”
“못된 말이 아니라.”
“…….”
“진심입니다, 저는.”
어쩐지 방금보다 조금 더 어깨가 무거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게감이 나쁘지 않아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 * *
일로제는 떠나가는 마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 번도 털어놓은 적 없는 감정들, 누군가와 나눠 본 적 없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어제 토해 냈다.
이렇게 편해질 줄 알았다면 진작 그렇게 할걸.
그들이 주고 간 쿨링 마도구는 스산하리만치 차가웠으나, 일로제의 마음에는 막을 수 없는 온기가 들어찼다.
문득 이아페가 시샤를 부축하듯 이상한 자세로 걸어가던 그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그녀가 다친 것도 아니었고, 둘 다 불편해 보이는데 꿋꿋이 그렇게 마차로 걸어갔지.
“인류애적으로 좋아하는 거냐고?”
일로제가 쿡,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 좋아하는데 모르는 게 우습긴 하지만.
이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겠지.
그가 기지개를 켜며 돌아섰다.
* * *
“시샤! 잘 다녀왔느냐!?”
늦은 저녁. 남부의 일을 모두 끝내고 며칠 만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거의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아주 쾌적한 출장이었어요.”
“남부에서도 쾌적하다니, 역시 마도구의 효과가 훌륭한가 보구나.”
어머니가 무심하게 칭찬을 던졌다. 그녀가 조용히 집사에게 식사를 준비하라 말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
“그래. 네 오빠가 너를 기다리자고 해서 말이다.”
“비알로… 오빠가요?”
믿을 수 없는 전개에 되물었으나, 아버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나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도착한 식당에는.
“이게… 뭐지?”
식당은 풍성한 꽃과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좀 더 각을 맞춰 커틀러리를 배열하라고 지시하던 비알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왔니? 어서 앉아, 시샤.”
“오늘 혹시 파티라도 하는 거야?”
“아니? 평소랑 비슷한데, 뭘.”
뭐가 비슷하다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 참. 이건 어머니 거, 이건 아버지 거, 이건 리나 거. 이것들은 사용인들 거. 그리고….”
나는 짐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늘어놓았다. 비알로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은근히 선물이 담긴 가방을 향해 있었다.
내 손과 그의 눈 사이, 기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건 오빠 거.”
나는 가방에서 하나를 더 꺼내 비알로에게 건넸다.
“뭘 이런 걸 다.”
새침한 말과는 반대로 비알로의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비알로의 것도 사 올까 말까 고민했는데 괜히 신경이 쓰여서 샀다. 남부에서 유명한 향료로.
저 정도로 좋아하는 걸 보니 사길 잘했나 싶다. 지출 대비 효율이 좋군.
“앞으로 다른 마법사들을 교육할 거라 했지?”
식사가 시작되고 오랜만에 맛보는 필리독 구이의 향을 즐기고 있을 때 어머니가 질문했다. 나는 로제 샴페인을 한 모금 삼켰다.
“네. 수도에선 300명 정도를 대상으로요.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열심히 해 보려고 해요.”
“장하구나, 시샤.”
아버지가 흐뭇한 웃음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이아페의 후작저 방문이 사실은 사적인 친분 때문이 아니라 연구단의 일로 방문한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아버지는 계속 싱글벙글 중이었다.
신성의 가호를 받는 카일라인 공작가의 차남이 마법사라는 사실은 비밀이었지만, 어머니가 정황만으로도 꿰뚫고 질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대신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 달라고 당부했다.
비알로가 걱정이긴 한데… 왠지 그도 입을 다물어 줄 것 같았다.
근거는 없지만, 그냥 왠지.
“그럼 푹 쉬렴, 시샤.”
식사가 끝나자 비알로가 제 선물을 가지고 들뜬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소화를 시킬 겸 혼자 정원을 산책했다. 잘 꾸며진 후원의 꽃들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여기로 조금 더 가면 연무장이지?”
기사단을 가진 가문이라.
문득 마법사가 아니었으면 기사에 도전하는 루트도 있었겠다는 망상이 차올랐다.
그러자 괜히 호기심이 생겨서 그곳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