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86
@86. 엄마 손은 약손
달빛이 있어도 연무장으로 가는 길은 조금 어두워서, 나는 손가락 위에 불을 올리고서 그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머릿속 내 IF 삶에 대한 망상은 구체화되어 갔다.
기사단장의 딸이라 쉽게 입단했다는 오해를 받지만 묵묵히 노력하는 시샤….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빼지 않고 열심히 하니 어느덧 주변의 시선이 달라지고….
후, 그럼에도 무시하는 누군가와 대련을 하는 데 이김으로써 인정을 받는 거야….
와, 그러다가 다른 기사단장인 남주를 만나게 되는데….
어머, 라이벌인 기사단이라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감정을 부정….
“으윽….”
“……?”
방금 신음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팔만 움직여 주변을 비추었다.
어느 나무 앞. 그곳에 기댄 누군가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제 앞에 드리운 빛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르디엘?”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그가 긴장이 풀린 듯 나무 앞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여서, 나는 그에게로 황급히 달려가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보니까 좋긴 한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볼 줄은 몰랐네요.”
르디엘은 조금 숨이 차 보였다.
「공중 부양.」
나는 불의 크기를 키워 허공에 띄웠다. 온전히 보인 르디엘의 얼굴에는 가늘고 긴 상처가 몇 개 나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다친 거예요?”
무언가에 스치듯 베인 흔적. 내 손이 그의 얼굴 가까이로 갔으나 만지지는 못한 채 근처를 배회했다.
르디엘이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넘어진 거랍니다.”
“넘어져서 이런 상처가 생긴다고요? 저 바보 아니에요.”
“그럼 훈련하다가 다친 걸로 할까요?”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훈련이라면 아버지한테 건의할 필요가 있겠네요.”
“하하.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돼요, 아가씨? 저 정말 괜찮은데.”
르디엘이 공연히 밝은 목소리를 내며 눈썹을 기울였다. 그 반응이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선을 긋는 느낌이라, 이유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신성력으로 치료를 하면 되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음… 자가 치료는 힘들어서?”
“남들은 그렇게 잘 치료하면서. 본인을 지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럴 거면 신성력 반납해요.”
“그러게요. 정말 반납을 해야 하나.”
르디엘이 고민하는 시늉을 하며 으음, 하고 길게 소리를 늘였다. 내가 그를 향해 눈을 째리자 르디엘이 쓰게 웃었다.
지금 농담을 할 때가 아닌데! 빨리 치료 안 하면 흉이 질지도 모른단 말야.
“내가 치료해 줄게요.”
신성력으로 치료가 안 된다면.
최근에 익힌 치유 마법을 써야겠다.
나는 르디엘에게 잡혀 아래로 내려가 있던 손을 다시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살짝 힘을 주어 손을 눌렀다.
“괜찮아요, 아가씨. 오늘은 이대로 두고 내일 제가 다시 치료해 볼게요.”
“저 쓰러졌을 때도 르디엘이 멋대로 치료했잖아요. 저도 맘대로 치료할 거예요.”
단호하게 말하자 잠시 말이 없던 르디엘이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르디엘의 얼굴 주변의 허공을 감싸며 치유 주문을 뱉었다.
「엄마 손은 약손.」
손에서 뻗어 나온 파란 빛줄기가 그의 얼굴을 감쌌다. 상처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괜히 뭔가 부족한 기분이라, 나는 허공을 문지르듯 양손을 뱅글뱅글 돌렸다.
“아가씨, 원래 이런 동작을 취해야 하는 거예요?”
“효과를 극대화하는 거예요.”
조금 전보다 더 빨리 상처가 사그라들더니 어느새 말끔히 사라졌다.
“다행이다….”
“고마워요, 아가씨. 그래도 그때 제가 치료해 준 거 퉁치는 건 안 되는 거 아시죠?”
나는 경악에 찬 눈길로 르디엘을 바라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안 떼어먹어, 이 사람아!”
“와, 퉁치지 않는다면 저도 보답을 해야겠네요.”
“하지 마, 하지 마!”
“저도 밥 한 번 살게요. 두 번 먹어요, 밥.”
알겠죠? 르디엘이 눈썹을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얻어먹는 기회 뺏기기 싫은 건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먹자는 거였어?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대체 왜 다친 건지, 정말 괜찮은 건지 궁금했지만 별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 그리고.”
그가 세게 내 손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몸이 기우뚱하며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르디엘을 올려다보자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눈을 맞춘 채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주세요. 르디엘 경 말고, 르디엘.”
지금 중요한 건 제가 다친 게 아니라 그것이라는 듯, 르디엘이 밝게 미소 지었다.
* * *
숙소에 도착한 르디엘은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는 비치된 거울에 자신을 비추었다.
시샤의 치유로 깨끗해진 얼굴.
그러나 옷이 흘러내리고 드러난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얼굴에 그만한 상처가 있으면 몸에도 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건, 그녀가 그런 삶을 겪지 못했기 때문일 터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르디엘은 피식 웃으며 상처를 훑었다.
“두 사람이나 걱정시켜 버렸네.”
제 상처를 보고 경악하던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며, 르디엘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치유를 하는 게 좋을까.
르디엘이 손을 뻗어 제 몸으로 가져갔다. 사실 자가 치유가 어렵긴 했으나, 이 정도 상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팔찌 주변에 찌릿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는 고통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신성력을 쓰려는 게 느껴지신 모양이지. 벌을 받은 날은, 고통을 계속 감내해야 하니.
르디엘의 손에서 신성한 기운이 사라졌다.
르디엘이 깨끗한 옷을 꺼내 다시 단추를 채웠다.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끔해진 본인의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그가 몸을 돌렸다.
* * *
며칠 후 드디어 모집한 마법사들을 대상으로 한 코레아리아어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는 황궁 외부에 칼린느가 따로 마련한 마법 교육관에서 진행되었다.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색깔들로 치장된 별궁 건물과 달리, 교육관은 보다 통일되고 정제된 인상을 주었다.
또각또각. 내 발걸음 소리가 교육관 복도에 울렸다. 그 단정한 울림이 나를 더 떨리게 했다.
“후….”
도착한 강의실 앞. 나는 들어가지 못하고 멈춰 서서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옆에서 이아페가 문을 열려고 했다. 내가 팟, 그의 손을 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너무 공, 공식적이라는 느낌이에요.”
“느낌이 아니라… 축제에서 마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내 말에 이아페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 대답했다.
“알아요. 아는데… 이건 진짜 그야말로 본격적이잖아요?”
“……?”
“으… 이아페가 수업할래요?”
“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뇨.”
이아페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와, 마법사 300명이 이 문 너머에 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아 보일 수가 있지?
“어떡해요, 나 떨리나 봐요.”
참지 못하고 흘리듯 뱉은 말에 이아페가 작게 입을 벌렸다.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
“이아페는 떨림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겠지만….”
“시샤 님은 떨림을 모를 줄 알았….”
그와 동시에 말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아페를 바라보자, 그가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접었다.
“저도 떨립니다.”
이아페가 내 한쪽 손을 끌어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당신의 공식적이고, 본격적인 첫 수업이니까.”
“진짜 이아페도 떨려요?”
“네. 앞으로가 기대도 되고.”
이아페가 시선을 돌려 강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기대.
그 말을 듣는 순간 들이찼던 긴장이 조금씩 흩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채워졌다.
이아페처럼, 연구단의 다른 사람들처럼. 분명 이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법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상처가 있겠지.
그리고 그 상처를 덮고 마법이 불러올 미래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마법을 쓰는 자신을 기대하면서 모였겠지.
“그렇네. 빨리… 가르쳐 주고 싶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아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
그가 강의실 문을 열었다. 나는 그 문을 향해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코레아리아어 연구단장 시샤 아르비나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사람, 주변을 힐끗대는 사람,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쭈뼛대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여기 모인 마법사들 모두가 ‘마법’을 쓰고 싶어서 모였다는 것.
과연 이들은 어떤 마법을 선보일까. 오늘은 얼마나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럼 수업을 시작할까요?”
미리 나눠 준 교재로 한글을 예습해 오라고 요청했기에, 어느 정도는 수월하게 수업 진행이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상외의 상황에 머리를 짚었다.
“하나도 모르겠다고요?”
“예.”
그곳에 모인 몇백 명의 사람들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글자를 읽어 보려고 해도 잘 안 되어서요.”
아무리 어려운 고대 언어라지만 이 정도로 익히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300여 명이 한꺼번에 예습을 게을리한 것과, 300여 명이 모두 언어적 재능이 없는 것.
둘 중 뭐가 더 최악의 시나리오일까?
‘어쩌면 가나다라 익히는 데 일주일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되는 데까지는 해 보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수업을 시작했다. 자음과 모음, 가나다라를 가르치고 읽는 법을 공들여 가르쳤다.
“「가나다라마바사」, 다음이 뭐라고요?”
“「아자차카타파하」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행히 수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처참한 예습의 결과를 보고 기대했던 것보다 지나치리만치 성공적으로.
“와, 혼자서는 머리에 안 들어오던 게 단장님이 가르쳐 주시니 쏙쏙 들어오네요!”
“저도요.”
“정말 마법 같습니다.”
그렇게 1타 강사의 화려한 데뷔가 끝나고 수강생들은 모두 귀가했다.
하지만 뭔가가 찝찝했다.
‘독학과 수업 사이에 이렇게나 차이가 크다니.’
물론 내가 잘 가르친 영향도 크겠지. 아무래도 재능이 너무 출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역시 미심쩍다.
말도 안 되지만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으면 익힐 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