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89
@89. 나무의 이름
“후후….”
오랜만에 갖게 된 휴식. 나는 아침 일찍부터 톤다 거리의 나무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다.
‘역시 시샤나무가 좋을까? 아니면 조금 더 특이한 이름을 붙일까?’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아까부터 근처에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샤나무를 365번쯤 눈으로 훑었을 때쯤 깨달은 사실이었다.
‘누구지? 내 시샤나무를 저렇게 정성 들여 보고 있는 사람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웬 중년의 남자가 아련한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아페?”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이아페가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자가 시선을 내게로 옮겼다.
이아페와 닮은 보랏빛 눈에, 일로제보다 조금 더 짙은 잿빛 머리칼. 설마 저 사람은….
“카일라인 공작님?”
이아페의 아버지, 펠트너 카일라인 공작이 분명하다.
그가 이름 부분이 빈칸인 채로 세워진 나무의 팻말을 힐끗 보더니 날 향해 말했다.
“시샤 아르비나 영애. 자네가 이 나무의 주인인가.”
“저를 아세요?”
“내 아이의 동료니까.”
동료라면. 공작도 알고 있는 건가? 이아페가 마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걸.
“네, 황궁에서 자주 도움을 받고 있죠.”
혹시 몰라서 그냥 애매하게 답했다. 밖에서 ‘이안’이라 하고 다니는 만큼, 집에서도 연구단 소속이라는 건 비밀로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
공작은 대답이 없었다.
“…….”
어떡하지? 혹시 계속 이 나무 앞에 있을 셈인가?
나도 나무를 300번 더 훑어보고 싶은데…. 이미 공작이 있다는 걸 의식해 버려서 신경이 쓰일 것 같다.
“저….”
“어떤가, 그 녀석은.”
“네?”
“그 일… 좋아하는 것 같은가? 축제 때 보니 그런 것 같긴 했지만.”
공작이 무심한 표정으로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공작을 바라봤다.
나무를 바라보는 공작의 시선이 일렁였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속으로 삼키는 것 같았다.
“이런 광장에서 할 이야기도 아니고.”
공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공작은 이아페가 마법을 연구하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동시에 이아페가 외부에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톤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수많은 귀에서 공작을 자유롭게 하면 이아페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노래방.」
주변이 조용해졌다. 거리의 말소리가 아주 작은 웅성거림 정도로 줄어들었다.
“뭐지?”
“방음 마법이에요. 아, 혹시 주변에서 들을까 봐 신경을 쓰시는 걸까 봐요. 이제 아무에게도 안 들리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하셨으면 해서….”
“자네가 듣고 있지 않나.”
…그러네.
“고해성사를 하라는 건가.”
공작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때 부드럽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 이아페를 닮았다.
“놀랍군. 이아페도 이런 걸 할 수 있나?”
“당연하죠. 오히려 요즘은 저보다 이아페가 마법을 더 쉽게 다루는 것 같아요. 진짜 탁월한 인재죠.”
“그렇겠지. 어릴 때부터 이해가 빨라서 뭐든 한 번 보면 완벽에 가깝게 구현해 내곤 했거든.”
“역시 그랬군요. 이틀 만에 고대어를 익히고 문장까지 만들어 냈을 땐 정말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정신없이 이아페 찬양을 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공작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공작을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책을 읽었을 땐 이아페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아페한테 관심도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아페가 상처를 많이 받았지.’
이아페는 아버지가 자신을 외면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공작이라는 자리를 얻기 위해 어머니를 방치했고, 그리하여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후에도 너무 쉽게 그녀를 잊어버리는 걸 보며 이아페는 환멸을 느꼈다.
공작이 어머니의 방을 남겨 둔 것도 면죄부로 삼아 본인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그 방에 이아페의 출입조차 막았을 리 없다.
‘…라고 여기지만 이 사람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애초에 관심 없는 자식을 떠올리며 저런 표정을 지을 수는 없다. 아들의 동료가 누군지까지 알고 있는 건 더 이상하고.
“왜 이 나무를 보고 계셨어요?”
공작은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애틋한 시선이었는데.
“…좋아하시는 나무인가요? 이번에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데, 뭐로 할지 고민이에요. 아무래도 제 이름이랑 연관된 걸 붙일까 싶….”
“로엔.”
공작이 대답할 거라는 기대 없이 그냥 재잘대는데, 그가 갑자기 아이디어를 던져 주었다.
하지만 로엔이라니.
“시샤랑은 너무 다른데요….”
“나는 이 나무를 그렇게 불렀거든.”
“……?”
“내 아내가 좋아하던 나무다. 우리는 이 버드나무를 서로의 이름으로 불렀지.”
아. 나는 입을 조금 벌렸다. 로엔이 이아페 어머니의 이름이었구나.
‘그보다 여기가 이아페 부모님의 추억의 장소였다니.’
아무도 듣지 못한다. 그 사실이 공작의 마음을 풀어 느슨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추억에 젖어 든 공작을 보는데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공작이 손을 들어 쓰다듬듯 나무 기둥에 가져다 댔다.
“버드나무는 로엔이 가장 좋아하는 식물이기도 했다.”
“수선화가 아니고요?”
헙. 나는 입을 막았다.
아는 체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다행히 공작은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아페가 그렇게 말하던가. 제 어미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수선화라고.”
나는 입술을 조금 말아 깨문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로엔은 그다지 수선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네?”
“수선화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나.”
수선화. 꽃말의 유래가 인상 깊어서 기억한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시스라는 청년이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해 빠져 죽은 자리에 피었다는 꽃.
이곳에서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꽃말이 같다면.
“자기애…?”
“알고 있군. 꽃말을 아는 이는 거의 없는데.”
공작이 조금 놀랐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꽃말부터 크고 화려한 외형까지. 로엔은 수선화가 잘난 척을 하는 것 같아 재수가 없다더군.”
공작이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들었다. 반면 나는 의외의 스토리에 놀란 채였다.
분명 이아페는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어머니가 이아페에게도 이 꽃을 좋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했고.
“하지만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말야. 어떤 사람들에겐 너무도 힘든 일이기도 하지.”
쓸쓸한 목소리가 공작의 입 밖으로 연기처럼 빠져나왔다.
그 순간, 이야기를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그게 이아페를 가리킨다는 걸.
마법사라는 것 때문에 가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던 어린 시절. 혹여나 누군가에게 들킬까 작아져야만 했던 그때.
이아페는 어린 나이에도 눈치를 살폈겠지. 그리고 점점 스스로의 안에서 자기 자신이 차지하는 입지가 작아졌을 것이다.
‘이아페의 어머니는 그게 안타까웠던 거야. 싫어하던 꽃의 꽃말을 사랑하게 되고 계속해서 찾을 만큼.’
나는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이아페가 이 정도로 올곧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건 분명 그때 어머니가 계속해서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야.
“사랑스러운 이아페. 로엔이 달고 살던 말이었는데.”
공작이 쓸쓸히 말했다.
“공작님께서도 이아페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계속 말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괜히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라서, 나는 결국 볼멘소리를 내고 말았다.
참견이라는 걸 아는데도, 고해성사란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듣고만 있어야 하는 걸 아는데도.
이아페를 생각하면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을 왜 외롭게 두었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변명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이 나무를 보고 있으니 털어놓고 싶어지는군.”
공작은 내가 아닌, 나무를 보고 말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아내에게 하는 말.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스러운 이아페, 하고 말한 적이 있다.”
“…….”
“하지만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어. 아마 당신을 떠올린 거겠지.”
“……!”
“나는 무서웠다. 그 아이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지워 버린 그날의 일을 기억할까 봐. 정말로 그렇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만 같았어.”
공작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푹 꺼진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당신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어. 당신이 하던 행동들도 모두 피했지. 이아페가 마법사가 아니어야 행복할 거라 여겼어. 그래서 아이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을 철저히 배제했고, 일로제에게는 그날의 일을 잊으라고 다그쳤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
“…….”
“그게 그 아이들을 외롭게 만드는 것인 줄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거든. 이제 와서 바로잡으려고 해도….”
이미 늦었겠지. 공작의 중얼거림이 입술에서 맴돌았다.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 내가 한심해 보이나.”
“네.”
갑자기 들어온 질문이라 너무 솔직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아페는 공작님 때문에 정말…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거예요. 일로제 경도 집을 뛰쳐나갈 정도로 괴로웠을 게 분명해요.”
“…그렇겠지.”
“그런데 지금 말씀은 공작님의 행동들이 이아페와 일로제 경을 위해서였던 거잖아요.”
“…나는.”
“이아페… 이제 기억해요. 그날의 일.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어요.”
공작의 눈빛이 마구 일렁였다.
“그 아이는… 괜찮은가?”
“네. 단단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공작님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심정으로 몇 년을 보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
“그러니까 정말 이아페와 일로제 경을 생각한다면 그 일을 함께 마주해 주세요. 서투르더라도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 주세요.”
“…….”
공작은 침묵했으나, 그의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그가 한참 동안이나 나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제 가 봐야겠군.”
방음 마법도 어느새 거의 풀려 있었다.
“반가웠습니다.”
공작이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이제 사람들의 소리는 처음 광장에 왔을 때처럼 커져 있었다.
“…자네가 그 아이와 함께해서 다행이야. 언제 한번 공작저에 들르게.”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공작에게서,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는 딱딱한 나무 기둥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법으로 팻말에 나무의 이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