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9
@9.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아가씨, 계속 이렇게 우울하게 계실 거예요?”
“응. 이번 생은 망했거든. 지난 생도 망했지만.”
나는 소파에 엎드리듯 축 늘어져서 입만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느새 이아페가 남부로 떠난 지는 8일. 칼린느와 약속된 날짜는 단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도 도서관을 찾지 못했다.
공작저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편지에 있는 호수 10군데를 돌았지만….
전부 복불복 꽝이었다.
‘서브 남주한테 뒤통수를 맞다니.’
오늘 아침까지도 이아페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일은 온다 해도 만날 수 없겠지.
내일은 이아페가 칼린느에게 반하는 빅 이벤트, 황실과 두 공작가의 사냥 행사가 있는 날이니까!
‘결국 이아페는 칼린느한테 반하고, 내 혀가 뽑힌 후에야 혼자 도서관을 발견하겠지.’
결론은 망했다는 것이다.
나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치즈처럼 추욱 녹아내렸다. 리나는 그런 나를 콕콕 찔러 보다가 결심한 듯 이야기했다.
“아가씨, 오늘 가면무도회라도 다녀오시면 어때요?”
“됐어. 이 와중에 뭔 무도회야.”
“에이, 정보 풀게요! 카일라인 둘째 공자님도 오신다던데.”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리나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진짜? 확실해?”
“사용인들끼리도 정보 싸움이 치열하답니다. 화친 때문에 반드시 참석하시기로 약속된 거래요.”
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리나아….”
코끝이 찡해진 나는 리나를 끌어안고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날아갈 것 같아!”
“그 정도군요… 아가씨! 오늘은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 드릴게요!”
“왜 아름답게….”
“카일라인 공자님이 보고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말이죠.”
“오, 그래. 리나, 너무 좋은 생각이다. 최대한 강렬하게 꾸며 줘. 검정, 빨강 뭐 그런 걸로.”
“평소에 그런 색상은 잘 안 입으시더니 웬일이세요?”
“결판을 지어야 하니까.”
정보를 먹튀한 놈을 잡으러 가려면 최대한 세고 멋있어 보이는 게 좋겠지.
리나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결판,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주변을 살핀 후 내게 귓속말을 했다.
“오늘 들어오지 않으셔도 돼요, 아가씨. 제가 잘 말해 놓을게요.”
“내가 왜 안 들어와?”
“에이, 아가씨. 일이 잘 풀리면, 이라는 얘기죠. 훙훙. 모르는 척하시기는.”
리나가 가볍게 내 팔을 쳤다.
‘내가 도서관을 찾느라 밤을 새우고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하는 건가?’
또 한 번 코끝이 찡해졌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지지해 주다니, 리나는 정말 좋은 친구였다.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리나는 다시 훙훙 하고 웃으며 옷과 장신구를 가지러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붉게 펼쳐졌던 노을이 가고 까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을 무렵.
보기 좋게 차려진 핑거푸드들과 각양각색의 와인.
귀를 찌르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악기 연주.
얼굴의 반 정도만 가려,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면서도 적당한 유희를 선사하는 가면까지.
이아페를 다시 만나기에 더없이 잘 차려진 무대였다.
하지만….
이 많은 이들 중 어디에도.
이아페는 없었다.
* * *
남부에서 돌아온 이아페가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이아페.”
무겁게 울리는 음울한 음성에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 방’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으나, 확실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
문을 응시하는 이아페의 시선이 싸늘했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죽이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카일라인 공작, 펠트너 카일라인이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아 그림자처럼 드러난 실루엣은 중년의 나이에도 빈틈없이 다부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펠트너는 몸을 돌려 창가에 기대앉았다.
“어디에 다녀왔지?”
아들을 대하는 것이라기엔 너무도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이아페는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8살 때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그의 아버지는 항상 저런 톤이었으니까.
“궁금해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비가 자식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게 이상한가.”
펠트너의 위로 느리게 피어오른 연기가 이내 옅게 퍼졌다.
그는 평소에 담배를 즐기지 않았으나, 이 방을 찾을 때는 꼭 하나를 꺼내 물곤 했다.
그래, 이 방에서만.
마치 죄책감을 덜려는 듯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아페가 적개심만 드러내자, 펠트너는 공허한 시선으로 방 안 어딘가를 바라봤다.
“하긴. 역시 이런 건 불편하지. 너도, 나도.”
“쉬십시오.”
“일로제는 잘 지내더냐.”
고개를 숙인 이아페의 위로 무심한 목소리가 던져졌다.
그는 이미 이아페가 남부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아페는 그 속내를 추측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남부에서 만난 일로제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아파 왔다.
심장에서부터 강한 압박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하지만 그는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펠트너를 향해 무뚝뚝한 대답을 던졌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것보단 편할 겁니다.”
“남부의 부기사단장 후보로 거론된다지. 얼굴을 보긴 했고?”
“…네.”
“그래. 이야기는….”
“일정이 있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이아페는 고개를 숙여 펠트너에게 인사하고는 방을 나섰다. 휑한 빈자리에 적막이 다시 찾아오자 펠트너는 손을 뻗어 허공을 붙잡았다.
“…로엔.”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아페의 방.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걸어 자신의 방으로 간 이아페는 문을 닫자마자 쓰러지듯 창문가로 갔다.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활짝 연 그가 차가운 바람을 힘껏 들이켰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잡으며 그는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자 서서히 두근거림이 멎어 갔다.
다행히 외출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차라리 이 집에 있는 것보다는 무도회장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시끄러운 분위기에 묻혀 생각이 낄 틈이 없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어쩌면….
이아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저 자신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가 가면을 꺼내 들고 마차에 올랐다. 한창 가면무도회가 이뤄지고 있을 그 저택으로 향하기 위해.
* * *
“공동묘지에! 올라갔더니!”
“시체가 벌떡! 시체가 벌떡!”
“벌떡! 벌떡! 꺄르르, 깔깔!”
무도회장에 익숙한 공동묘지 게임 송이 울려 퍼졌다. 음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 키론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레이디 아르비나, 또 다른 것도 가르쳐 주세요!”
바로 나였다.
“이번엔 손가락 접는 게임 가르쳐 드릴까요?”
“깔깔, 좋아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내게서 게임을 전수받고 있었다. 흥미진진해하는 표정으로 관전 중인 사람까지 합하면 100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이아페가 아니라 이들의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된 이유는.
‘화친도 날려 먹냐? 칼린느 빼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놈!’
아무리 기다려도 이아페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달 내내 뭘 위해서 그렇게 고군분투한 건지.
분노와 허망함이 머릿속을 메웠다.
하지만 혀 뽑히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이틀.
지금은 그런 불안한 감정들로 마음속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원 없이 하하호호 웃고 떠들고 싶었다.
그런 내 눈에 점잖고도 따분한 표정으로 카드놀이 중이던 젊은 귀족 무리가 들어왔으니.
〈여러분, 게임 하나 하실래요?〉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에 살짝 오른 취기까지. 인싸력 MAX 상태였던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신난다! 재미난다! 죽음의 게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사람들이 지금껏 본 어떤 새내기보다도 열성적으로 게임에 임하는 중이었다.
“다음은 하늘에서 토끼랑 당근 내려오는 게임!”
“그다음은 두부 세는 게임!”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내 어깨를 봐! 탈골됐잖아!”
“탈골! 탈골!”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술을 들이붓고 나니 이제 여한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하얗게 불태웠다….”
결국 지쳐서 발코니로 나갔다.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로 커튼까지 치고서.
그런데 발코니에는 이미 임자가 있었다.
수선화가 그려진 가면을 쓴 한 남자가.
무도회의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보통의 가면과 달리, 얼굴 전체를 완전히 가린 가면이었다.
‘술을 진탕 마신 건가?’
그는 서 있을 힘이 없는 듯, 발코니의 난간에 온몸의 중심을 기대어 앉은 채였다.
‘난간에 기대면 안 되는데.’
어릴 때부터 문턱 밟지 마라, 난간에 기대지 마라 소리를 수없이 들어 온 유교걸의 눈에 그것은 꽤나 위험해 보였다.
“위험해요.”
결국 그에게 말을 걸며 다가갔다. 남자의 자색 눈동자가 날 경계하듯 바라봤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기억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 * *
“허억!”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이 든 기억도 없는데 일어나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보다 잠깐.
“내 옷!”
술, 아침 짹, 침대.
혹시 낯선 방에서 실오라기만 걸친 채 일어나는 클리셰가 벌어졌을까 봐 이불을 팍 들쳤다.
“후, 잘 있군.”
다행히 남의 방도 아니다. 투철한 귀소 본능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자, 꿀물 드세요.”
언제 나타난 것인지 리나가 따뜻한 꿀물을 내게 건넸다.
“둘째 공자님은 만나셨어요?”
“으음, 아니….”
“그럼 어제 가져오신 이 가면은 대체 누구 거예요?”
가면? 나는 꿀물을 들이켜며 리나 쪽을 바라보았다. 리나는 수선화가 그려진 가면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가면에 수선화를 그려 넣다니, 정말 예쁘네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이었습니다.〉
〈함께 많이 보러 다녔어요?〉
〈어릴 적 자주 찾던 호숫가에 흐드러진 수선화 꽃밭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그 꽃을 좋아하면 좋겠다고 말씀하곤 하셨죠.〉
〈그래서, 당신도 좋아해요?〉
〈그때의 기억을 좋아하는 건지, 이 꽃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쪽이든,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뭐지, 이 대화?
기억의 조각들이 꿈처럼 스쳐 지나갔다.
발코니에 앉아 있던 남자.
가면 속으로 보이던 깊고 오묘한 자색 눈동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가면을 벗겼다.
그리고 얼굴을 드러낸 것은.
“으악!”
“아유, 깜짝이야!”
나는 책상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두 번째 서랍을 열자 이아페가 쓴 편지가 나왔다.
나는 그 속에 적힌 한 문장을 읽었다.
“비트리비아 호수. 수선화 명소로 다회 방문.”
여기다.
이아페가 어머니와의 추억을 품은 그 장소.
코레아리아의 도서관이 봉인되어 있는 그 물가.
비트리비아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