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90
@90. 검은 로브
로엔나무
여기에 이름을 남길 사람은 나보다는 그녀가 어울릴 것 같다.
어느새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 버린 이아페를 지켜 준 사람.
수선화는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핀다. 이제 정말 이아페의 겨울도 끝났을 거라, 그렇게 바라며 나는 한참 나무 앞에 서 있었다.
* * *
“이아페.”
조용한 식당. 말없이 숟갈을 뜨는 이아페를 향해 공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이아페가 건조한 시선으로 공작을 응시했다.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 시선에 빛을 담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감내해야겠지.
“받아라.”
공작이 상자를 내밀었다. 이아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열어 보니 안에는 수선화가 새겨진 펜이 있었다.
“…뭡니까?”
“그 꽃을 좋아하지 않느냐. 너도… 네 어머니도.”
이아페가 움찔했다.
어머니. 그 말이 공작의 입에서 나온 게 몇 년 만인지 알 수 없다.
어머니의 방에서 죄책감을 덜 때와 같은 위선인가.
하지만…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상자 속 펜을 응시하던 이아페가 입을 열었다.
“왜 마법에 대해 묻지 않으십니까. 제재하실 타이밍을 보고 계십니까.”
고맙다고 말하거나,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일반적으로 선물을 받았을 때의 반응과는 달랐지만 펠트너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기대한 적도 없기에.
“너도 알 테지만 나는 네 결정을 지지할 수 없다.”
자식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할 수 있는 평범한 부모가 될 수는 없다. 시샤와 이야기하고 온 오늘도 그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펠트너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네 인생이고 네 선택이다. 내가 참견할 것이 아니지.”
“…….”
이아페가 대답 없이 펜이 담긴 상자를 덮었다. 그것을 제 바로 옆에 놓았다.
다시 찾아온 정적 속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식당을 메우는 공기는 조금, 아주 조금 달랐다.
최근 몇 년간 펠트너를 향한 이아페의 감정은 이제 차갑게 얼어붙은 호수 같았다.
하지만 그곳에 누군가 돌을 던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
하지만 이아페는 어쩐지 그 사람이….
시샤인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 * *
로디스 공작저로 가는 길.
열어 둔 마차의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마법사 교육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가고 있는 여름 끝자락, 평화로운 오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지.
평화롭고 행복할수록 불안이 함께 커졌다.
‘역시… 확실히 확인해야겠어.’
일로제를 만나고 시작된 의문은 소리 없이 몸집을 부풀려 갔다. 흑마법에 대한 것도, 소설 속 마법의 결말에 대한 것도.
하지만 내게는 정보가 너무 없다.
‘오늘은 꼭 로디스 공작을 만나 검은 로브에 대해 확인해야 해.’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유일한 끈인 로디스 공작.
마침 오늘, 로디스 소공작인 릴리를 방문하러 가는 중이었다. 마법사 후원에 대해 논의한다는 좋은 핑계로.
어느새 로디스 공작저가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공작저에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공작저가 가까워질수록 불안이 차올랐다. 그들의 표정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어떤 분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공작저의 입구에 도착했으나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도착하기 직전, 로디스 공작이 죽었기 때문이다.
* * *
일주일간 진행된 로디스 공작의 장례가 끝났다. 관에 누워 싸늘하게 식은 로디스 공작의 얼굴은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말라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릴리 로디스가 재방문을 요청했다.
‘장례식 때도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괜찮으려나….’
마차가 로디스 공작저로 들어섰다. 나는 커튼을 걷어 창문 밖을 살폈다.
그런데 저택의 왼쪽으로 누군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릴리 로디스?’
응접실은 저택 정문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어딜 가는 거지?
의문을 가지고 마차에서 내리자 집사가 나를 맞이했다.
“소공작님께서 급히 처리하실 일이 있어,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릴리는 평소 시간 약속을 중시한다고 들었는데. 이제 로디스 가문의 대소사를 전부 맡게 되었으니 바쁠 만도 하지만….
내 촉이 그녀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정원이 예쁘던데 산책을 하고 있을게요. 소공작님께서 오시면 불러 주세요.”
정원으로 향한 나는 꽃을 보는 척하며 슬그머니 몸을 낮추었다. 사용인들의 위치에서 내가 보이지 않도록.
“매개체는 이거면 되려나.”
가방에서 자료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릴리가 직접 들고 읽었던 것.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자료를 향해 주문을 읊자, 종이는 어느새 작은 나비로 변했다.
나비는 아까 릴리가 향했던 저택 왼편으로 날아갔다.
위치 추적 주문이었다.
매개체와 찾는 대상의 관련성, 대상과의 거리나 흔적 등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긴 하지만….
‘릴리는 이곳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저택을 돌아 후원을 지나자, 어느 울타리가 나타났다. 그 중간에 누군가 지나간 듯 작은 쪽문이 열려 있었다.
쪽문 밖으로 난, 갓 조성한 듯한 산책로는 한 곳으로 이어졌다. 플라타너스가 양옆으로 늘어선 작은 숲을 지나자 너른 들판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산책로의 끝. 릴리는 어느 넓은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위치한 중심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 걸로 보아 아마 공작의 무덤인 모양이었다.
비옥하고 넓은 땅. 하지만 이상했다.
‘너무 휑하잖아.’
보통 고위 귀족들은 묘를 위한 공간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기에 넓은 지대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나무도, 꽃도, 심지어 잔디조차 없는. 그냥 흙만 가득한 허허벌판.’
미간을 찌푸린 채 넓은 땅을 바라보는데 릴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분명 검은 로브들이 지나갔었는데….”
“……!”
검은 로브. 역시 지난번 로디스를 방문했을 때 잘못 들은 게 아니었어.
“로디스 소공작님.”
릴리가 흠칫하며 뒤를 돌았다. 방금 전까지의 그늘진 분위기를 감추고 애써 미소를 꾸며 낸 채였다.
“…아르비나 단장님, 도착하셨군요. 우선 응접실로….”
“검은 로브들이 이곳에 있었던 거죠?”
“…글쎄요. 요즘 같은 날씨에 누가….”
릴리는 ‘검은 로브’를 하나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단순한 옷의 종류로 알아들은 척했다. 날 신뢰할 수 없기에 그런 거겠지.
“저는 그 자들을 찾고 있어요. 알 수 없는 힘으로 제 소중한 사람을 해치려 했거든요.”
내 말에 릴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경계와 혼란이 그녀의 얼굴을 메웠다.
하지만 이내 지푸라기를 잡는 듯 조심스럽지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알 수 없는 힘이라면… 마법이 아니란 이야기군요. 단장님은 그들의 정체를 아시나요?”
안다고 해야 할까, 모른다고 해야 할까.
소설에서 나온 그들의 정체는 흑마법사. 하지만 최근에 의문이 차올랐다.
그 힘이 정말 흑마법이 맞는지.
어쩌면 마법이 아닌 제삼의 힘이거나, 혹은…. 아냐. 근거가 없는 섣부른 추측을 뱉을 수는 없었다.
“그 힘이 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쓰는 이 힘과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
“소공작님이 알고 있는 정보를 말씀해 주신다면, 분명 제가 도울 수 있어요.”
나를 바라보는 릴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한 번 더 판단하려는 듯했다.
많이 불안하겠지. 나를 신뢰하기도 힘들 테고.
지금 당장 말을 하지 않는다 해도 이해해야 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말도 안 된다 여기실지 모르지만, 저는 저희 아버지의 죽음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그들을 만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리고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셨을 때 계속 그들을 찾으셨죠. 돌아가실 때에도….”
릴리의 손이 떨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기다릴게요. 말하기 힘들면 조금 쉬어도 돼요.”
차가워진 손을 가만히 토닥이자 심호흡을 한 릴리가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부디 선처를’.”
“…….”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 검은 로브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고, 되돌릴 수 있는 키도 쥐고 있었던 거겠죠.”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장면을 보며 느꼈을 릴리의 충격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말없이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서재에 감춰진 작은 문이 있었어요. 그 안으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요.”
“작은 문과 계단요…?”
“네. 검은 로브들이 그곳에서 나왔어요. 자주 방문했던 것 같았어요. 아마 그날은 제가 서재에 있는 걸 모르고 나타난 거였겠죠.”
“혹시…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해요?”
“오늘 그 물건의 숙성이 끝난다, 그렇게 말했어요. 아버지에게 그것을 찾아오라며, 그분께 바칠 물건이니 탐을 내지 말라고 했죠.”
그 물건. 거울의 방에서 가져간 그것을 가리키는 게 분명해.
“그날부터였어요.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한 게.”
“…그래서 그들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릴리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지하로 가면 그 물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검은 로브들의 정체도 알 수 있을지 몰라.
“들어가 보신 적 있나요? 그 문으로.”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아버지의 비밀을 파헤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가 직접 이야기해 주실 거라 기대하기도 했죠. 하지만….”
“공작님은 이야기해 주시지 않았군요.”
“네, 맞아요.”
“그럼 혹시 제가 지금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아뇨.”
릴리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거절을 납득할 수 없어 그녀를 바라보자, 릴리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사라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