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94
@94. 저주를 푸는 맹세를
“시, 시샤 님. 저는 걱정 마세요. 윽!”
니니안의 목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읍!”
“시간을 지체하시면 손목 하나 정도는 자를 수 있습니다. 과다 출혈로 죽지는 않게 잘 노력해 보죠.”
뭐? 분노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재갈을 풀면 마법을 쓸 수 있어. 순간 이동은 내 몸에 닿아 있는 것만 가능하니 니니안을 순간 이동 시키는 건 불가능하지만….’
여기 있는 로브는 대략 30명. 이들이 못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시도해 볼 만하다.
“흐음.”
위드가 불만스러운 신음을 내었다.
“괜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여기 보이는 이들이 전부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
그가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끌어내렸다.
“곱게 협상을 하려 했는데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너무 슬플 겁니다. 그렇다고 귀하신 분을 해칠 수는 없으니….”
위드가 니니안을 슬쩍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그녀가 떨리는 숨을 들이켜 참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이동으로 내가 니니안에게 간다고 해도… 다시 순간 이동 주문을 외기 전에 제지당하겠지. 그럼 상황이 악화될 거야.’
결국 나는 인정하고 말았다.
이건 정말 방법이 없다.
내가 이걸 마시는 수밖에.
내가 턱짓으로 잔을 가리키자, 위드가 눈에 띄게 기쁜 얼굴을 했다.
“정말 직접 드시는 것입니까? 당신의 생각은 알 수가 없어서… 강제로 먹이는 것도 효력이 없다 하고…. 그래도 표정이 읽기 쉬워 다행이군요.”
그가 옆의 로브에게 눈짓하자 내 손을 묶은 줄을 풀어내어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잔 안에는 투명한 액체, 그리고 알약 정도의 크기를 한 작은 보석 하나가 들어 있었다.
“시샤 님, 안 돼요! 위험…! 윽….”
니니안의 목에서 피가 한 줄기 더 흘러내렸다.
“읍!”
나도 분했다. 마법을 쓸 수 있는데도 무력하게 이것을 마셔야 한다니.
하지만 이걸 먹는다고 죽진 않을 것이다.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내게 재갈을 물린 순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위드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로브가 내 입을 둘러싼 재갈을 풀어냈다.
‘죽지만 않는다면, 전부 게워 내면 돼. 마법으로 위 세척쯤은 할 수 있겠지.’
나는 액체와 보석을 함께 들이켰다. 위드의 눈이 흥미와 기대로 빛났다.
“윽…!”
타는 듯한 작열감이 목에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옆에서 위드가 입꼬리를 높이 끌어 올렸다.
“자, 따라 하십시오. 저주를 푸는 맹세를.”
그게 무슨… 내가 따라 할 줄 알고?
“…저주를 푸는 맹세를.”
하지만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위드의 눈에는 기쁨을 넘어 희열마저 담겨 있었다.
“이제, 니니안을 풀어 주….”
의식이 점차 흐릿해졌다. 니니안이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일그러진 슬픈 표정.
빨리 데리고 돌아가야 하는데.
하지만 그녀를 잡지 못한 채,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 * *
“놔.”
저를 잡은 로브를 뿌리친 니니안이 시샤에게로 걸어갔다.
니니안이 시샤의 앞에 말없이 꿇어앉았다. 시샤의 머리를 들어 제 무릎에 뉘었다.
“아주 잘해 주었구나. 귀하신 분의 마음을 제대로 허물어 놓았어.”
위드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뱉었다.
“대의를 위해서니까요.”
“후훗, 가증스럽긴. 한없이 개인적인 이유로 움직이고 있으면서.”
“…….”
“뭐, 실체 없는 충성보다야 훨씬 열정적인 동기니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단다.”
“참견하지 말아요.”
“쉿, 그분께서 보고 계신다.”
작은 빛 하나가 허공을 맴돌다 시샤에게 내려앉았다.
빛은 그녀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볼을 미끄러져 내렸다. 니니안은 건조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빛이 떠나가자 위드가 삐딱하게 선 채 니니안에게 로브 하나를 건넸다.
“잊지 마라. 네 본분을.”
“그럴 일 없어요.”
니니안은 그것을 구기듯 잡더니 제 몸에 걸쳤다. 로브들이 시샤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나도 같이… 윽.”
니니안이 심장 언저리를 부여잡았다. 작게 심호흡을 하던 그녀가 시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돌아섰다.
* * *
“르디엘 경,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누가 찾아왔습니다.”
“네? 저를요?”
숙소에서 막 옷을 갈아입은 르디엘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같은 방을 쓰는 기사가 흥미롭다는 듯 눈 밑을 접었다.
“오올, 이 야밤에 밀회라도 하는 거야?”
“휴, 저는 정말 얌전히 지내고 싶은데… 다들 저를 가만 놔두질 않네요.”
르디엘이 크게 한숨을 내쉬자 같은 방의 기사가 야유를 보냈다. 르디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이에 기가 차서 웃음을 터뜨린 기사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진 말라고. 지난번에도 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오고 말이야. 뭔 일인지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 주….”
“하하, 정말 별일 아니었는걸요.”
구시렁대는 그의 말을 르디엘이 끊었다. 그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에 기사가 그래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르디엘은 문을 밀어 밖으로 나왔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일 수도 있고, 급한 일이 생긴 제 가족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달빛 아래 산책을 즐기는 어느 아가씨일 수도 있고.’
괜한 생각이 피어오르자 르디엘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형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의 것이었다.
르디엘의 비취색 눈이 가늘게 뜨였다.
“뭐야, 네가 웬일로 나를 찾았을까?”
퉁명스러운 말투에 이아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분명 코웃음을 치며 맞받아치리라. 르디엘은 이아페의 반응에 미리 대응하듯 팔짱을 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다.
“르디엘.”
이아페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름을 불린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으나, 별다른 의미를 담고 부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이아페의 표정은 그가 다가오자 선명해졌다.
절박하고도 다급한 시선.
아, 그는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아가씨가 쓰러졌을 때.’
르디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좋은 예감을 증명하듯 이아페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던졌다.
“시샤 님이 사라졌어.”
르디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아페가 르디엘의 팔목을 잡아채듯 움켜쥐었다.
“그게 무슨 말…!”
「순간 이동.」
르디엘은 순간 느껴지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던 방 안이었다.
“…아가씨의 방이군.”
“그래.”
“언제 없어지신 거야?”
“조금 전에 이 방에서. 방금의 우리처럼 순식간에.”
르디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는 건 ‘걸어서’와 같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이동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마법으로 이동한 거라면 이아페가 굳이 자신을 찾지 않았겠지. 그럼….
“신성력이 느껴지는지를 확인해 달라는 거네.”
“시간 없어.”
이아페의 자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번득였다. 그것은 흡사 상대를 위협하는 잘 벼려진 칼날 같았다.
‘확인하기 싫다고 하면 죽이기라도 할 기세군.’
르디엘이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아페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죽였다.
몇 초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르디엘이 눈을 떴다.
“어떻지?”
“음….”
르디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신성력도 아닌가 본데.”
이아페의 시선이 흔들렸다. 쓰러지듯 벽에 기댄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은 가?”
“전혀.”
“아르비나가의 아가씨가 사라지셨으니 아마 곧 소집 명령이 떨어지겠지. 우선 다시 기사단 숙소로 데려다줘.”
“제 발로 가.”
이아페가 이제 쓸모없어진 말을 바라보듯 피곤한 시선을 보냈다.
“참 친절하네.”
르디엘은 눈으로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도 물고 뜯는 대화를 즐길 여유는 없었기에, 미련 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 르디엘의 표정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설마 아가씨가….”
몇 걸음 옮기던 르디엘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포탈을 열었다. 성난 빛이 역력한 시선이 밤을 찌르듯 앞을 향했다.
* * *
하루가 지났다.
시샤가 없어진 밤, 아르비나 후작가의 유일한 아가씨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저택은 깊은 밤임에도 분주했다.
어디로 간 것인지 단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단부터 사용인들, 연구단원들까지 뿔뿔이 흩어져서 시샤를 찾았다.
날이 밝을 때까지는 찾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밝아 온 해가 다시 넘어가 어두워질 때까지도 시샤를 찾지 못했다.
이아페는 몇 번이고 순간 이동을 해 가며 하루 종일 시샤가 갔을 만한 곳을 뒤졌다.
그녀의 방에서는 신성력도, 타인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시샤가 쓴 마력의 흔적.
‘만약 그 마력이 시샤가 순간 이동을 하면서 남은 흔적이라면.’
이동한 곳은 필시 그녀가 아는 장소여야 한다. 순간 이동은 정확한 위치와 장소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형상화해야만 가능하니까.
그렇게 이아페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수도의 모든 곳을 뒤졌다.
별궁과 도서관.
소원 인형을 받았던 카페 개빗사.
처음 둘이서 식사했던 팜바.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극을 상연했던 소극장까지.
순간 이동은 꽤나 마력을 많이 소진하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시샤를 찾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시샤.’
이아페가 짙게 팬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차가워진 공기가 거북했다.
젠장, 이아페가 낮게 욕을 읊조렸다.
모두가 한심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한심한 건 자신이다.
어젯밤의 안일했던 자신을 떠올리면 이제는 역겨워질 정도였다.
“이아페 님.”
이아페가 뒤를 돌았다.
라온이 제게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