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while trying to climb the mountain RAW novel - Chapter (256)
제 256화
256화
“하아. 이제야 좀 살겠네.”
큰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근 에르딘이 금세 나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씻지를 못해서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다가 몇 번이나 물을 갈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씻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특히나 마물의 숲에서는 물속에 발도 못 담그고 그랬었지.”
강과 이어진 시냇물을 발견한 것도 몇 차례.
독충을 비롯한 온갖 위험한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말과 하이 오크도 여럿 죽었다는 덧붙인 말을 듣고 물은 쳐다보지도 말자며 다짐했다.
“후아.”
점점 노곤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통 안의 물로 세수했다.
휙.
“응?”
손에 시야가 가려진 사이 허여스름한 무언가가 지나갔다.
에르딘이 멈칫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눈동자만 좌우로 데굴데굴 굴렸다.
‘방금 뭔가 지나간 거 같은데…… 착각인가?’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론 정도의 강자가 아니면 자신의 감각을 속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마을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나간 상태다.
‘설마 장난치려고 거짓말하신 건가?’
이내 에르딘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목욕하는 사람을 놀래키려고 거짓말할 만큼 양심이 없는 제론이 아니다.
‘……그런가?’
정말로 제론에게 양심이라는 게 있을까 잠깐 의심했다.
에르딘은 목욕물로 얼굴을 적시며 얼른 정신 차렸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조금 전 무언가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 아니다.
기척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분명 있다.
“사람이면 물러가고, 귀신이면 썩 나와.”
…….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혹시나 정말로 착각한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오라쿤과의 싸움 이후로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이, 본능이 무언가 있다고 계속 알려온다. 또한 반대로 말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사람이면 물러나고 귀신이면 썩 나오라니!’
뜨거운 물 때문인지 얼굴이 후끈거리며 달아올랐다.
“흠흠. 귀신이면 썩……!”
-왜 나오라는 거야?
“……나오라이흐에에에!”
눈앞에서 허여스름한 물체가 불쑥 튀어나오자 에르딘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진다. 통도 함께 넘어가며 목욕물이 쏟아졌다. 벌떡 일어난 에르딘이 중요한 급소(?)를 손으로 가리며 허여스름한 물체에게 외쳤다.
“너! 너! 뭐야!”
-뭐긴 뭐겠어? 귀신이지. 귀신이면 썩 나오라며?
허여스름한 물체의 정체는 바로 소녀 귀신이었다.
에르딘이 말한 것처럼 귀신이라서 썩 나온 것이고 말이다.
중요한 급소(?)를 가린 채 에르딘이 옆걸음으로 움직여 옷을 입었다.
귀신 소녀는 그 와중에서도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에르딘의 알몸을 훑어봤다.
에르딘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물기를 제거하고 말끔한 옷차림으로 변했다.
‘정말로 귀신인가?’
언데드를 제외하면 사람처럼 말하는 귀신은 처음 봤다.
-옷 입었네?
소녀 귀신이 아쉬운 듯 말했다.
‘벌거벗은 내 몸을 보고 있던 거였어?’
에르딘은 흠칫 놀랐다.
어째 오싹하더니.
제론에게 처녀 귀신이라고 해서 서큐버스 같은 악마처럼 남자의 정기를 쪽쪽 빨아먹는 귀신이 있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저 음흉한(?) 눈빛이 딱 처녀 귀신 같다.
‘서큐버스였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로건 님이 알아차리셨을 거야.’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에르딘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악마나 언데드는 확실히 아니다.
진짜 귀신이다.
“너 정체가 뭐야?”
-보다시피 귀신이야.
“내 앞에 나타난 이유도…… 내가 나오라고 해서 나온 거고?”
-그렇지. 나오라고 안 했으면 못 나왔어.
“응? 그건 무슨 말이야?”
-나를 느낀 사람도 네가 처음이라서 잘 몰라. 나오라는 말을 들으니까 왠지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온 거거든. 오히려 내가 더 어떻게 된 상황인지 궁금해.
짧은 대화를 종합해보자 ‘모른다’였다.
이럴 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일행 중에 사제님이 계셔. 그분께 같이 가볼래?”
-이대로 죽으라고?
너 이미 죽었어.
에르딘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팩트를 꾹 삼켰다. 몇 살인지는 몰라도 겉모습은 소녀인 귀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 안 죽게 잘 말씀드려볼게.”
-뭐 마음대로 해.
소녀 귀신의 대답에 에르딘은 따라오라고 말한 뒤 일행들이 있는 거실로 나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제론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까 무슨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로건이 물기가 묻은 손을 닦으며 먼저 물어온다.
에르딘은 소녀 귀신을 힐끔 쳐다본다. 소녀 귀신이 로건과 10m 거리를 유지한 채 다가오지 않는다. 잘은 모르겠지만 로건의 존재 자체가 소녀 귀신에게 큰 위협이 되는 모양이다.
“어, 음. 귀신을 봐서요.”
“귀신? 언데드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진짜 귀신이요. 소녀…… 그러니까 대충 17살? 18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 귀신이에요.”
“그렇군요. 요 며칠 고생을 하시더니…… 저런.”
로건이 에르딘을 딱한 듯 쳐다봤다.
“아니. 진짜로 있어요.”
“있다고요?”
에르딘이 답답해서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하자 로건의 눈빛이 변한다. 조금 전에 봤다고 말했을 때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있다고 했다. 에르딘의 기가 허해졌다고 해서 귀신을 볼 정도로 심지가 약하지 않았다. 저렇게 보여도(?) 오러 마스터의 강자였다. 자신과 다른 일행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진짜로 귀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제론이었다면 헛소리 취급했겠지만 말이다.
“제 옆…… 아니, 저쪽에서 지금 로건 님을 보고 있어요.”
-그런 거 말하지 마.
“지금도 그런 거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하아.
소녀 귀신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에르딘과 로건의 이상한 대화를 듣고 쟌느가 부엌에서 나왔다.
“귀신이 있다고요?”
“네. 17살? 18살? 그 정도로 보이는 소녀 귀신이에요.”
“흐응.”
쟌느가 에르딘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기술로 존재감을 감춘 것일지도 몰라서 감각을 끌어올렸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농담인가 싶어서 에르딘을 쳐다봤지만 눈빛과 표정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메이엔 씨!”
“네. 잠시만요.”
메이엔이 요리를 잠깐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녀는 소녀 귀신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혼이네요.”
“메이엔 양은 알고 계셨습니까?”
“선배는 알고 계셨어요?!”
“호오.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고?”
이하 3명의 반응이었다.
메이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3명에게 대답하고 소녀 귀신에게 물었다.
“왜 모습을 나타낸 거죠?”
-나도 잘 몰라……요.
소녀 귀신은 메이엔에게 다른 의미로 로건과 다른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두려움의 크기도 더 컸다. 참다못해 끝에 붙여버린 존댓말이 그 증거였다.
“에르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세요.”
“아. 그게 말이죠.”
에르딘이 기억을 더듬어가며 목욕하고 있을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메이엔이 전부 듣고 말했다.
“영혼을 강령시켰군요.”
“강령이요? 네크로맨시를 말하는 건가요?”
“흑마법보다는 샤머니즘에 가까워요. 으음. 지금은 찾기 힘든 원시종교의 하나로,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직접적인 교류에…….”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 짧게 요약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귀신이 제게 붙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좀 무서워서요.”
“에르딘이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서 자기도 모르게 영혼을 불러왔다는 거예요.”
메이엔의 요약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로건과 쟌느가 동시에 ‘호오!’라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였다.
“그런 일이 가능……하군요.”
-그러니까 내가 네 앞에 나타났겠지. 이런 일은 나도 처음이야.
“영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많지 않아요. 에르딘이 놀라도 이상한 게 아니에요.”
-…….
메이엔이 입을 열자 소녀 귀신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귀신이 아니라 영혼이라고요?”
“네. 귀신은 언데드의 한 종류예요. 살아 있는 생명체를 해쳐서 그 생명을 흡수해 자신이 되살아나고 싶어 하는 죽었으나 안식을 얻지 못하고 걸어 다니는 자들이죠. 하지만 저 영혼은 이 마을에 발이 묶여 있는 령靈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지만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런 존재죠.”
“……그렇군요.”
에르딘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복잡한 말을 이해할 만큼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다. 지금 소녀 귀신이 자신에게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그럼 제가 돌아가라고 하면, 저 귀…… 아니, 소녀도 돌아가는 건가요?”
“네.”
에르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소녀 귀신에게 말했다.
“돌아가.”
-……?
소녀 귀신이 멀뚱멀뚱 에르딘을 쳐다봤다.
울상이 된 에르딘이 메이엔에게 하소연한다.
“안 돌아가는데요?”
“아까처럼 영적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거나, 에르딘에게 귀속이 된 이유를 해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럼 영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저도 몰라요.”
“네?”
“전 마녀지 샤먼이 아니에요.”
아주 유쾌한 대답이었다. 에르딘은 자연스럽게 소녀 귀신이 자신에게 귀속이 된 이유를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힐끔 소녀 귀신을 바라봤다. 여전히 메이엔과 로건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이름이 뭐야?”
-……로레인.
“그래. 로레인. 내 이름은 에르딘이야. 몇 살이니?”
-17살.
“그렇구나. 몇 년 전에……?”
-8년 전에 죽었어.
“……네, 누나.”
아슬아슬하게 나이가 많다.
소녀 귀신 로레인이 눈살을 찌푸리고 에르딘을 응시했다. 집 안에 한기가 돌며 에르딘이 몸을 움찔 떤다. 다른 일행들도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메이엔이 차분하게 말했다.
“령의 나이는 죽은 그 순간과 같다고 보면 돼요.”
“누…… 로레인. 미안해.”
-하아.
로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러니까 로레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나도 몰라. 그냥 눈을 뜨니까 난 죽어 있었고 마을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어. 분명히 죽기 전까지는 모두가 하하호호 웃으면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말이야.
에르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레인을 바라봤다. 그녀를 추궁하거나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시선만 그쪽으로 향했을 뿐 그녀가 한 말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죽었다. 령이 되어 눈을 떴을 땐 마을 사람들이 한 명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이사를 갔다면 흔적이 남았을 거야. 하지만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땐 그런 흔적은 없었어. 먹을 것도 없었지. 분명히 식기나 생활용품, 가구 같은 건 전부 남아 있었는데 말이야.’
돈 많은 부자나 귀족이 아니고서는 갖고 있는 것들을 챙겨가는 게 보통이다. 가구나 생활용품 같은 것을 새로 사는 건 평민들에게 꽤나 부담이 되니까. 말인즉슨 마을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수증기같이 증발한 것처럼 말이다.
때마침 들려온 제론의 목소리.
“오크의 짓은 아니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