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while trying to climb the mountain RAW novel - Chapter (282)
제 282화
282화
처음에 잊어버린 것은 과거였다.
제로니아 페리안으로 태어났던 시절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무림에서의 유민현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전의 무림으로 넘어가기 전 현대를 살아간 유민현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었다.
‘내가 몇 살 때 고아원을 나왔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만 잊는 게 아닌 지식도 함께 잊었다.
현대의 문물을 잊고 현대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도 잊게 되었다.
사고를 당해 무림으로 넘어간 사실마저 잊게 되었을 때 제론은 심각성을 깨달았다.
‘잊으면 안 돼.’
남아 있는 기억과 지식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되뇌었다. 하지만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투쟁하였으나 왜 그랬는지도 잊어버렸다.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하지만 기억을 잊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허무로 가득 찬 무저갱 속에 빠진 모든 존재는 조금씩 스스로를 잊어간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 존재는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잊게 되고 스스로를 잃게 된다.
쉽게 설명하면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고 흩어져버리는…… 즉,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파멸의 대지’라는 준신급 마법의 진정한 공포였다.
‘뭘 잊으면 안 되더라?’
제론은 기억을 잊으면 안 되는 이유조차 잊고 말았다.
그렇게 하나둘 잊어가고, 또 잃어갔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곧 시간의 흐름마저 잊었다.
‘배고프다. ……어? 배고픈 게 뭐지?’
3대 욕구마저 잊었다.
‘에르…… 에르? 에르가 뭐지?’
이윽고 ‘말’조차 잊어버리게 된 순간 제론의 의식은 수면 깊숙한 곳까지 깊숙하게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는 또 다른 허무가 있었다.
무저갱의 허무가 어둠으로 이루어진 바다였다면 제론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허무는 모든 것이 타들어 가고 남겨진 회색의 잿빛이었다.
잿빛의 공간에는 또 다른 제론이 서 있었다.
아니.
제론이 아니었다. 유민현이었다. 그러나 유민현은 곧 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유민현이되 무림에서 마선이라고 불리었던 그가 아니라 현대에서 27살이었던 그였다.
-왜 거기에 있는 거냐?
무림으로 넘어가기 전 27살의 유민현이 묻는다.
하지만 제론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잊고 소리를 내는 방법마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약해지고 영락해버린 ‘나’의 최후지.
27살의 유민현 옆으로 또 다른 유민현-우화등선을 이루었던 ‘나’가 나타났다.
27살의 유민현이 ‘나’를 책망하듯 쳐다봤다.
-너 츤데레냐?
-그런 저급한 말로 날 현혹시키지 마라.
-츤데레가 왜 저급한 말이냐? 너야말로 꼰대같이 말하지 마.
-꼬, 꼰대? 갈喝!
-어휴. 갈은 무슨 갈이야. 갈비나 뜯어 잡숴.
27살의 유민현과 ‘나’가 투닥투닥 귀엽게 싸웠다. 하지만 제론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멍-하니 그 둘을 바라봤다.
-맛탱이가 갔네.
-아직 혼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다. 그런 상태로 이런 공간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거라고 본다.
-하긴. 우리가 멀쩡히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불안정하다는 증거니까. 그래서, 누가 먼저 희생할래?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군.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도 옛말이야.
-너나 나나 쟤나 같은 사람이야. 네가 나이를 먹으면 나도 함께 나이를 먹는 거라고. 이 꼰대야.
‘어디서 감히 동방예의지국을 운운해?’라며 27살의 유민현이 중얼거렸다.
-…….
-아무튼, 상황을 보니 아직 네가 희생할 때는 아닌 것 같고…… 아, 희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런가? 분리된 혼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거니까.
27살의 유민현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스스로를 잊어버린 제론을 다시 깨우려면 지금의 제론과 가장 닮은꼴인 바로 자신이 가장 적합했다. 하지만 혼이 하나가 된다면 더 이상 독립적인 자아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뒷일을 부탁해.
-…….
‘나’는 27살의 유민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의 제론이라면 몸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27살의 유민현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27살의 유민현은 ‘나’의 생각을 알아차리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리는 과거에 불과해. 현재를 공유하고 있지만 미래를 살아갈 수는 없는 몸이야. 뭐, 이미 혼만 존재하니까 몸이라는 말도 조금 이상하지만.
-알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저 녀석의 몸을 차지한다고 해서 저 녀석이 되는 것도 아니야. 또 다른 ‘나’가 되는 거지. 저 녀석이 과거의 우리로 돌아오지 못하듯이 말이야. 우리가 과거를 살아가듯 저 녀석은 미래를 살아가야 해.
-알고 있으니까 계속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 더 말 안 하마. 아, 그리고…….
-교장 선생님 훈화도 아니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지?
-내가 교장쌤이고 넌 꼰대라. 환상의 궁합이네.
27살의 유민현이 피식 웃었다.
환상이라고 말했지만 환장이라는 말이 더욱 어울렸다.
‘나’ 역시 그를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이만 가보련다.
-다음에 또 보자.
-그게 가능한가?
-너와 나, 그리고 저 녀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간다는 점이 다르지만…… 본래 하나니까.
돌아온 대답은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식이 아니었다.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27살의 유민현은 그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역시 츤데레라니까.
27살의 유민현은 피식 웃으며 제론과 몸을 하나로 합쳤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야. 공주님.
-소름 끼치는군.
‘나’는 27살 유민현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 * *
제론의 머릿속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무저갱 속에서 잊어버린 기억과 지식이 되살아나며 생긴 폭발이었다.
‘……!’
잊힌 감각이 되살아나며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젖은 걸레의 물기를 짜내듯 온몸이 비틀어지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곳은 허무로 가득 찬 무저갱이었다.
현실의 모든 것을 잊어가는 공간이었다.
그러한 공간에서 잊힌 것을 되찾았다.
-너 인마, 앞으로 그 녀석한테 잘해.
제론의 머릿속으로 다소 경박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가 아니었다. 27살의 유민현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27살의 유민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앞으로 잘하라는 ‘그 녀석’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어렴풋이 ‘나’와 다른 무언가라고 인지할 뿐이었다. 또한 인지했다고 해서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야.
‘뭔지 몰라도 고맙다.’
인사를 한 순간 머릿속으로 들려오던 목소리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다. 제론은 그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빠져나간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움직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점차 전신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숨을 마시며 천천히 검을 들었다.
단전의 내공을 확인했다.
웅크렸던 야수가 전신의 맥을 뛰어다니며 날뛰고 있었다.
‘상단전이 열려 있어?’
막아둔 상단전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하지만 야수는 무언가에 묶여 있기라도 하듯 상단전으로는 가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줘야겠어.’
제론은 야수에게 말했다. 녀석이 날뛰던 것을 멈추고 그에게 다가왔다.
‘단 한 번의 기회야.’
부유감 속에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검을 높이 들었다.
무엇이 자신을 도왔는지 몰라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건 알았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고 생각했다.
‘공간을 뛰어넘어 적을 베어낼 수 있다면 공간을 가를 수 있다는 것과 같다.’
기회를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공간이 아닌 만들어진 또 다른 차원이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과 선이 이어져 면이 되며, 면과 면이 이어져 공간이 완성된다.
이 무저갱 역시 점과 선, 면의 연결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느껴야 한다.’
점과 선, 면을 느껴야 베어낼 수 있다.
강기로는 부족했다.
심검으로도 부족했다.
‘신성이면 벨 수 있다.’
신성은 존재存在이다. 기원起源이다. 또한 근원根源이다. 제론의 존재를 의미하고, 그것을 이루는 힘이다.
검에 신성을 담았다. 잿빛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무저갱의 허무가 잿빛의 불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어둠의 바다를 거세게 일으킨다. 사나운 격랑이 밀려온다.
검을 들고 있는 제론의 몸을 두들긴다.
다시금 허무가 그를 갉아먹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제론의 기억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아직 아니야.’
하지만 제론은 때를 기다렸다.
신성으로 이루어진 잿빛의 불꽃으로 무저갱을 베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절반의 기억을 앗아갔다. 또다시 잊어갔다. 하지만 초조해하지 않았다. 불안해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려는 거냐?
‘그럴 리가.’
제론은 씨익 웃었다.
‘그 녀석’이 누구인지 몰라도 자신의 존재를 버리면서까지 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절호의 때를 기다린 것뿐이었다.
‘베어낸다.’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잿빛의 불꽃이 어둠을 물리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부족해 보였다. 저것으로 무저갱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칫. 다시…….’
제론이 검을 다시 든 순간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야수가 아니었다.
검신에 깃든, ‘저주받은 검’의 힘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신성? ……아니야. 이 힘은 신성과 달라.’
굳이 표현하자면.
‘신살神殺.’
신을 죽이기 위한 힘이었다.
잿빛의 불꽃이 신살의 힘을 장작 삼아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둠의 바다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쿠궁.
무저갱이 완전한 잿빛을 띤 순간 공간이 흔들렸다.
‘보인다.’
무엇이?
허무가 기억을 갉아먹어 다시금 거기까지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론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본능이었다.
면을 이루고 있는 선, 그리고 선을 잇는 점.
검극이 정확하게 점을 찔렀다.
쨍그랑-!
무저갱이 깨지며 잿빛이 아닌 따사로운 빛이 제론의 얼굴을 드리웠다.
‘그래. 너였구나.’
제론은 27살의 유민현을 느꼈다.
* * *
에르딘은 장막이 깨지며 나타난 제론을 발견하곤 달려갔다.
쟌느가 순서를 다투기라도 하듯 전속력으로 달렸다.
“내가 먼저!”
“어…… 그러세요.”
에르딘이 잠시 주저하다가 멈춰 섰다. 감동의 재회 따위는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제론이 저 검은 장막 속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자기!”
쟌느가 제론에게 덥석 안겨들었다.
제론이 그녀를 받아 안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많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건 알겠다.
“많이 기다렸어?”
“으응. 아니.”
“많이 기다렸나 보네.”
제론은 코알라처럼 매달린 쟌느의 등을 토닥이며 일행들에게 갔다.
“다들 잘 지냈어요?”
“잘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어찌나 두 형제자매님께서 걱정을 하시던지…….”
로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모두를 대신해 대답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