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while trying to climb the mountain RAW novel - Chapter (9)
제9화
9화
정령사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
“오우야.”
책을 열기 무섭게 임팩트가 장난 아니다. 엄청난 자신감이 팍팍 느껴지는 도입부였다. 이런 책을 쓴 녀석이라면 두 가지 부류 중 하나다.
정말로 대단한 능력을 가졌거나, 허세를 떠는 녀석이다.
제론은 부디 전자이길 바라며 쭉 읽었다.
…였으니, 대륙의 정령사라는 잡것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건방진지 통탄스러울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머리를 후려쳐 재교육을 시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엄.”
제론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엄청난 자신감으로 시작한 도입부와는 달리 뒷내용은 신세 한탄이 잔뜩 써져 있었다.
구구절절한 신세 한탄을 짧게 요약하자면 대륙에 퍼진 정령사들이 너무 건방져서 전부 뚝배기를 깨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세상 어디든 다 똑같은 이치지.”
제론은 이유 모를 공감을 느끼며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오랫동안 서고에 짱 박혀 있던 탓인지 잉크가 번지고 흩어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변했다. 다시 쭉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확인하니 그 뒤로도 신세 한탄이 계속되었다.
“얼마나 불만이 많았으면 저럴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제론이 마침내 본 내용으로 진입했다.
정령과 계약을 맺고 싶다고?
우선 대자연의 기운을 느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정령과는 절대로 계약을 맺을 수 없다.
포기해라.
“응?”
제론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이라는 단어가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대자연의 기운을 느끼라는 건 누워서 떡… 아니, 뒹굴거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운기조식만 해도 되니까.”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운기조식을 해왔다.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가능하다.
그다음은 뭘까?
대자연의 기운을 느꼈다면 계약진을 그려라.
“후우.”
제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보니 이놈은 불만만 많은 게 아니라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계약진을 그리라고 해놨으면서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설명이 없다.
바로 밑에 써진 내용.
계약진 중앙에 앉아서 대자연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여라.
그럼 그대의 앞에 정령이 나타날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하이패스 급인데?”
하이패스가 아니라 2G에서 5G로 바로 넘어간 건가.
마땅한 비교를 찾지 못한 제론이 책의 내용을 끝까지 쭉 훑어봤다. 책의 어디에도 계약진 그림은 없었다. 계약진 없이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은 왜 안 써놨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
몇 권을 뒤적거리자 운이 좋게도 계약진의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살짝 작은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조금… 아니, 솔직히 많이 조잡하네.”
제론이 유심히 살펴보고 중얼거렸다.
계약진은 2m 지름의 원으로, 바깥 원에서 10cm 안쪽으로 조금 더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으며, 안쪽 원의 내부를 가득 채운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호와 그림이었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4살짜리한테 펜을 쥐여 줘도 이것보다는 잘 하겠다 싶을 정도로 기호와 그림이 개발새발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제론의 무식으로 인한 것이니!
제론이 개발새발 그렸다고 생각한 기호와 그림의 정체는 바로 정령계의 언어를 글자로 쓴 것과 마법을 발현할 때 사용되는 룬 문자였다.
정령계의 언어는 말 그대로 정령들이 의사를 의념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처럼 육성으로 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정령사가 되면 알게 되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글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한 정령사가 정령과 조금 더 편하게 계약을 맺기 위한 매개체로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사람의 혀 구조로는 발음하지 못하며 정령과의 매개체로만 사용되었다.
또한 룬 문자는 아주 오래전 마도 시대에 사용되던 글자인데, 영어의 알파벳과는 다르게 문자 하나하나가 의미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정령과의 계약진에 써진 룬어 중 하나인 ⍀는 나우디즈Naudhiz라고 부르며, 나우디즈가 가진 의미는 필요, 빈곤, 속박이었다. 정령이 정령사과 계약을 맺으면 그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이 룬어가 계약진에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것처럼 계약진에 그려진 기호와 그림은 제각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튼, 제론은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하는 정령계의 언어와 룬어를 그리기 위해 서고 책상에서 종이-크기는 얼핏 A4용지 정도였다-를 빼내 바닥에 깔았다.
“70장이나 바닥에 깔았네.”
깔다 보니 너무 많이 종이를 쓴 것 같다.
종이가 엄청 귀한 것은 아닐 테지만 싸지도 않을 것이다.
내심 혼나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맨바닥에 계약진을 그리는 게 더욱 큰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낙서 좀 했다고 하지 뭐. 어린아이가 낙서 좀 했다고 얼마나 혼내겠어? 볼기짝 몇 대 맞고 끝내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딱이잖아?’
제론은 무대포 정신으로 무장하며 근심과 걱정을 덜어냈다.
일단 저지르고 나중에 생각하리라.
정 마음에 걸리면 잘 처리해서 모르는 척 잡아떼도 된다.
“우선 잘 세팅을 해볼까!”
종이가 겹치거나 떨어지지 않게 책으로 고정시키고 천천히 그리기 시작했다.
고작 2m 원 안에 그림과 기호를 그려 넣는 것이지만 신체가 아직 짧고 손가락이 굵어서 그런지 한참을 고생했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났다.
유모가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며 몇 번을 물어왔고, 그때마다 제론은 책이 너무 재밌어서 정신없이 읽었다고 대답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제론이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서고의 문을 잠갔다.
혹시 모를 갑작스러운 난입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곧 계약진 중앙에 앉아서 책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계약진 중앙에 앉아서 대자연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여라.
그럼 그대의 앞에 정령이 나타날 것이다.
제론이 역혈마공의 운기법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그러자.
화아악-!
처음에는 계약진에서 은은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1초도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서고 내부를 가득 채울 정도로 찬란하게 물드는 것이 아닌가!
‘악! 내 눈!’
대자연의 기운을 몸에 받아들이면 정령이 눈앞에 나타난다는 말에 두 눈을 평소보다 크게 뜨고 있던 제론은 그대로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번지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잠시 후.
제론은 눈앞에 검은 고양이 네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양이?”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네로-자칭 위대한 어둠의 정령이 탐스러운 꼬리를 살랑거리며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위대한 어둠의 정령인 이 몸에게 고양이라고?]“세상에나.”
고양이가 말도 한다.
* * *
‘그래, 정령이니까 말도 하겠지.’
제론은 어둠의 정령-네로를 유심히 살펴봤다. 눈앞에 검은 고양이 네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자칭 위대한 어둠의 정령이라고 하지만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현대에서 흔히 생각하는 마녀가 데리고 다니는 검은 고양이-봄베이 종이다.
‘으음. 얼떨결에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게 됐네. 정령이니까 털은 안 날리겠지?’
[하찮은 꼬마 인간. 왜 말이 없냐?]잠시 네로를 살펴보는 사이 녀석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호박색 눈을 날카롭게 뜬다. 정령이라서 그런지 고양이가 표정도 있다고 생각하며 제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악-!]“생긴 것만 고양이가 아니라 특성도 고양이였어?”
네로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하악질을 하자 제론이 손을 거둬들이며 헛웃음을 들이켰다. 이거야 원 진짜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 든다.
혹시나 생선도 좋아할까 생각했지만 묻지 않고 꾹 삼켰다.
단순한 하악질로는 끝나지 않으리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고양이들은 보통 성격이 좋지 못하지.’
간혹 개냥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정말 드문 편이다.
문득 밖에서 유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네에. 유모, 왜요?”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져 가는데 언제쯤 나오실 건가 해서요.”
“곧 나갈 거예요. 거의 다 봤어요!”
“호호! 알겠어요.”
고개를 돌려 활짝 열어놓은 창문을 쳐다보니 창문 너머로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계약진에서 빛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온 것 같았는데 본 사람은 없겠지? 그래, 아무도 못 봤을 거야. 없어야 해. 4살짜리 애가 정령을 소환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
제론은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이 녀석부터 처리해야 한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한 채 꼬리로 바닥을 탁- 탁- 치는 이 정령 말이다.
“너, 밥… 먹이는 뭐 먹냐?”
[무엄하다!]“아, 미안. 이거 물어보려던 거 아닌데.”
[위대한 어둠의 정령인 이 몸과 계약을 하고 싶은 거냐?]“뭐?”
[응?]제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네로가 당황했다.
저 반응.
계약을 하고 싶어서 자신을 소환한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딱히 계약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하악-!]“일단 진정해봐.”
네로가 하악질을 하자 제론이 서둘러 녀석을 달랬다.
정말로 계약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니었다.
저자를 알지 못하는 책의 내용이 진짜인지 알고 싶어서 실험을 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정말로 정령이 나왔고 이런 고양이였을 뿐이었다.
‘계약을 하는 건 나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정령사라는 존재는 마법사보다 더욱 귀하다.
정령사의 능력이 마법사보다 뛰어나거나 특별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다.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희귀한 능력!
이 고양이가 무슨 힘을 가졌는지 몰라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허를 찌를 한 수가 되리라.
애완동물(?) 한 마리쯤 키워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계약하자.”
[위대한 어둠의 정령인 이 몸과 계약을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네로가 우쭐거리며 제론에게 다가가 어깨 위로 올라타자 계약진에서 또다시 은은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금세 서고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 망했다.’
제론은 빛줄기가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데 유독 환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온다면 눈뜬장님이 아닌 이상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계약은 끝났다. 영광으로 여겨라.]“시꺼. 인마.”
[뭐라고? 하찮은 인간 꼬마 주제에!]“나는 어떤 변명을 대야 할지 고민을 좀 해야 하니까 조용히 해봐.”
[하악-!]제론은 네로의 하악질을 무시한 채 빠른 속도로 서고를 향해 다가오는 기척들에게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고심했다.
“어머, 영주님!”
“유모! 제론은 안에 있는가!”
“조금 전까지 저랑…….”
벌컥!
문이 세차게 열렸고 제론은 숨을 헐떡이는 쥬페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등 뒤로 아이리를 비롯해 남작가의 몇 안 되는 가신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ㅃ…….”
“제론.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낱낱이 고하거라.”
제론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