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while trying to climb the mountain RAW novel - Chapter (93)
제93화
93화
“뭐? 페리안 자작가?”
유한은 당황했는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듣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제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냐?”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제론은 손가락을 튕겼다.
기의 막을 둘러싸 소리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막았다.
“이건……!”
“잔재주에요.”
“넌 역시…….”
유한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뒷말이 짐작되었다.
제론은 부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부터였냐?”
“그건 비밀이에요.”
“옛날부터 네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느껴지지 않더구나. 처음에는 오러 연공법을 익히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방법으로 숨기고 다녔던 거였군.”
“페리안 자작가의 기사가 되시면 벽을 뚫게 해드릴게요.”
“……!”
그 말을 들은 유한의 눈이 3배로 커졌다. 손이 올라오려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막혀 있던 벽을 뚫게 해준다는 말에 바로 제론의 손을 잡고 그게 정말이냐고 물어볼 뻔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유한은 제론이 졸업한 이후로 지난 5년간 오러 익스퍼트 최상급의 벽을 뚫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고 지금은 포기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제론의 말에서 커다란 희망을 느꼈다.
잠깐이지만 제론이 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호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군. 왜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내가 아니더라도 마스터가 깨달음을 전수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거다.”
“선생님한테 제안을 한 이유는 간단해요. 페리안 자작 가문은 아직 약하니까요.”
“‘아직’ 약하다고?”
유한은 제론의 짧은 말에서 본질을 알아차렸다.
아직은 약하다.
제론의 강함은 페리안 자작 가문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오러 마스터가 된 거지?’
다른 무언가의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궁금했지만 유한은 애써 참아냈다.
제론의 제안은 탐스러운 빛깔과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동시에 목을 꽉 막히게 만들지도 모르는 과일이었다. 탐욕은 함부로 부려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머릿속에서 지웠다.
“페리안 자작 가문이 강해질 때까지 ‘나’라는 방패가 필요한 건가?”
“선생님은 검이지 방패가 아니에요. 페리안 자작 가문을 지킬 검이요.”
“유사시에는 칼잡이로 쓰겠다는 말이구나.”
“검객이 칼을 안 쓰면 뭐 해요?”
“큭. 틀린 말은 아니지.”
“지금 바로 결정해주면 좋겠지만 쉽진 않으실 테니 시간을 드릴게요.”
유한의 말은 정확했다.
제론은 페리안 자작가를 지킬 검이 필요했다. 아빠와 형이 있다고 하지만 두 명으로는 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인재를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한 선생님은 제론의 기준에서 인재였다.
오러 마스터가 될 자질이 있고 가능성도 높았다.
오랜 시간 벽에 막혀 정체됐기 때문에 다소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몇 가지 깨달음만 조금 던져줘도 혼자서 잘 뚫을 것이다.
‘어차피 유한 선생님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지.’
우선 외갓집 아이언하트 공작가가 있다.
누나가 공작에게 미움을 받거나 개입하지 못할 명분이 있는 게 아니라면 흔쾌히 한 손 거들어 줄 것이다. 왕실과는 무슨 관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국왕과 사적인 인연이 있는 걸로 봐서 평범하지는 않으리라 추측되었고.
유한 선생님에게 떡밥은 던져놨으니 기다리면서 아공간 주머니 속에 있는 정보만 확인하면 된다.
* * *
전투 실습이 끝날 때까지 유한 선생님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제론은 아쉽지 않았다. 유한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오기로 결정하셨네.’
수도를 들러야 할 것 같았다. 일정이 변경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유한 선생님을 포섭할 시간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함께 수도로 향한 제론이 호텔에 방을 잡고 유한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밤이 되자 유한이 찾아왔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온 길이다.”
“행동력이 대단하시네요.”
제론은 유한이 결정을 내린 대답만 전하러 온 줄 알았다.
“이번 학기까지는 있어야 하니 내년에 바로 페리안 자작가로 갈 것 같다.”
“그럼 선생님을 믿고 먼저 드릴게요.”
유한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써놓은 심득서를 내밀었다.
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바로 읽으려고 하자 말렸다.
“여기서는 안 돼요.”
“왜지?”
“이 호텔이 예전에 시무르 칸 때문에 인테리어를 싹 바꾼 적이 있거든요. 덕분에 며칠 영업도 못 하게 되었고요.”
제론이 방을 잡은 호텔의 이름은 ‘해가 저무는 밤’.
그렇다.
옛날에 제론이 시무르 칸을 손봐줬던 그 호텔이었던 것이다.
제론의 말을 들은 유한이 미간을 짚고는 말했다.
“너였구나.”
한때 ‘푸른 바람의 늑대’를 쓰러트린 ‘존재’로 인해 수도가 시끌벅적한 적이 있었다. 모두가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흔적조차 남지 않아 끝내 찾아내지 못한 새로운 강자였다.
그 ‘존재’가 바로 제론이었다.
“맞아요.”
“역시…….”
유한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모양인지 표정에 변화가 없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오우거가 아닌 마나를 다루는 ‘네임드’는 오러 마스터 급이 아니라면 상대하지 못한다. 그런 오우거를 쓰러트린 존재가 제론임을 유한은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짐작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책은 나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읽어요.”
“알겠다. 그런데…….”
“잠시만요.”
제론은 손을 들어 그가 말하지 못하게 막았다. 유한이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려는 순간 이곳으로 다가오는 낯익은 기척을 느꼈다.
“제이나 선생?”
“맞아요.”
호텔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의 주인은 바로 아카데미에서 제론에게 제자가 되라며 권유했던 제이나 정령술 선생님이었다.
“젠장. 꼬치꼬치 캐묻더니 이러려고 했었군!”
“제이나 선생님이 저에 대해 물어보셨다고요?”
“그래! 전투 실습에 네가 참관했다는 말을 듣고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밤새 나를 감시했다. 겨우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찾아내고 만 모양이다!”
유한이 다급하게 외치고 일어섰으나 제론은 씨익 웃으며 기다렸다. 그가 제론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손님을 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설마 그녀도 페리안 자작가로 영입하려는 거냐?”
“그렇게 된다면 좋겠죠.”
제이나 선생님의 정령술은 중앙대륙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나다. 특히나 엄청난 숫자의 정령을 한꺼번에 부려서 전장을 초토화시키는 전쟁에 특화된 정령사였다. ‘전장의 지휘자’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정령사를 페리안 자작가로 영입한다면 전력이 단숨에 상승한다.
‘제이나 선생님한테 작업(?)을 칠 생각은 없었는데 제 발로 찾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유한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을 찾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영입을 하지 못해도 아군으로 만들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다.
잠시 후 제이나가 호텔 로비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곧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정확하게 제론과 유한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제이나는 사납게 유한을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더니 빈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제론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입가에 상냥한 미소가 맺혔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예. 저는 잘 지냈어요. 제이나 선생님께서는 잘 지내셨나요?”
“저는 잘 못 지냈어요. 제론 학생… 아니. 이제는 학생이 아니죠. 제론 경을 제 제자로 삼지 못한 게 아직까지도 통탄스러운 걸요?”
“그건 죄송하게 되었어요.”
제론이 사과하자 제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야만스러운 남자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음. 그건 유한 경께서 선택하실 문제인 것 같아요.”
“유한 ‘경’?”
제이나는 제론이 유한을 부르는 호칭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은 선생님이고 유한은 ‘경’이었다.
‘경’이라는 호칭은 기사를 부를 때만 쓴다.
유한이 기사는 맞지만 동시에 아카데미의 선생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론이 자신의 앞에서 유한을 ‘경’으로 불렀다는 것은 관계에 변화가 있다는 걸 암시했다.
“흐응.”
제이나가 다리를 꼬며 유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복장이 짧고 가벼웠다.
40대에 들어선 제이나였지만 정령술의 조예가 깊어지며 노화가 늦춰졌다. 겉모습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였다.
탄탄하고 늘씬한 각선미가 유한의 시야에 훤히 보였다.
유한이 재빨리 시선을 위로 올렸다.
‘오?’
제론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유한의 반응이 옛날 같지 않다.
“사직서를 냈다는 소문이 진짜였군요?”
“흠흠. 그렇소.”
“교장 선생님께서 정보를 빼돌린 것도 눈감아주셨는데 참 너무하시네요.”
“역시 눈감아주셨던 거군. 후우.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소.”
유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제이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추궁할 생각이 사라졌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제론에게 물었다.
“제론 경이 유한 선생님을 꼬신 건가요?”
“예. 맞습니다.”
꼬셨다는 표현이 살짝 미묘하게 들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옛날 같지 않다는 느낌을 확신했다.
“어떻게요? 제자……가 되겠다고 하기에는 유한 선생님보다 제론 경이 더욱 강한 것 같은데.”
제이나도 지난 5년 사이 제자리걸음만 한 게 아니었다. 전보다 정령술의 조예가 깊어지며 제론의 강함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개에 뒤덮인 것처럼 흐릿하게 느껴져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확신하지 못해서 잠시 망설인 것이다.
“그건 비밀이에요.”
제론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제이나는 잠깐 고민에 잠기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야만스러운 남자한테…….”
‘오? 뭐야 뭐야?’
자신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로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제이나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오지랖과 호기심이 용솟음치며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으며 말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저는 이만 일어날게요. 내일 해가 뜨면 바로 출발해야 해서요.”
“네?”
유한은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반응이 담담했다. 하지만 제이나는 아니었다. 당황한 그녀가 다급하게 제론을 멈춰 세웠다.
“제론 경! 잠시만요!”
“……!”
제론이 멈춰 선 채 씨익 웃었다.
제이나는 제론의 등을 보고 있어서 그 미소를 목격하지 못했으나 상황을 지켜보던 유한은 달랐다. 작게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걸려들었군.’
해가 뜨면 바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은 진짜일 것이다.
그러나 제이나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그녀가 다른 말을 하며 뜸 들이자 미련 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일어선 건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려는 행동이었다.
급한 건 제론이 아니었으니까.
‘나처럼 말이지.’
제이나의 미래가 벌써부터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