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00
100화 배짱 한번 좋네요
“여유롭군.”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한 대의 차량. 고급스러운 세단의 창문에 짙은 선팅이 되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장발의 남자가 조수석을 곁눈질하며 꺼낸 말이었다.
“…….”
조수석에 앉아 있는 건 주예린이었다.
여유로워 보인다는 남자의 말대로 그녀는 무심하게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점점 교외 너머의 변두리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특별한 물건도 아니었다. 각성자였다면 특수한 아이템이 필요했겠지만, 주예린은 어떤 훈련도 받지 않은 평범한 여자였으니까.
손목에 난 붉은 자국은, 저항하려던 흔적이 아닌 단순한 연약함의 증거였다.
“이럴 줄 알았거든.”
모든 게 정해진 일이었다. 이 대한민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한 노인의 명령을 어기게 됐을 때부터.
대현의 회장을 상대로는 숨기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니까.
남자가 타고 있는 차. 입고 있는 옷. 그리고 쓰고 있는 가면까지, 모두 대현의 것이었다. 지금 이 일이 회장의 의도라는 것을 숨기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서 아양을 떨었나?”
“…….”
“소용없는 일인 걸 알 텐데.”
단순한 재벌 아가씨 주예린이 아니라, 대중 앞에 이름과 얼굴을 새긴 인플루언서 주예린이라면. 하루아침 사이에 갑자기 처리하긴 어려웠을까.
의미 없는 발버둥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대현 그룹은 그깟 대중의 호기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방법 따윈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방법이 아니라면.
“아니면, 아직도 아가씨가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나?”
남자가 말하는 아가씨란, 길드를 운영하는 후계자 주하린을 의미하는 거였다. 주예린은 그런 호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남자는 주예린이 여유를 가지는 것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주하린은 자신의 언니가 납치됐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가만히 넘어갈 성격은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가문의 어르신이 내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래선 곤란했다. 주하린은 가문의 후계자. 단순히 힘으로 꺾어 놓으면 그만인 상대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바꿔 말하면 곤란한 정도에 그쳤다. 후계자는 후계자일 뿐, 지배자가 아니었다. 지금 누구보다도 위에 있는 회장의 뜻을 거스른다고 해도 당장에 불과한 일이었다.
‘설득’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정도 대비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모두 대비가 되어 있는 일이기에, 주하린의 구출과 변호를 기대해도 소용 없는 일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장발 남자의 말에 주예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머저리.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서 안심하는 거야.”
무엇 때문에 이제까지 그 고생을 했는데.
몇 년이나 걸린 일이었다. 동생과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는 것은.
단순한 거리감으로는 부족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아도, 자신보다 몇 배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한 주하린이 늘 시간을 내서 찾아오곤 했으니까.
할 거라면 철저하게. 두 번 다시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이가 되어 주는 게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괴롭히고 곤란하게 만들어도 주하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견뎌 낼 뿐이었다, 언젠가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버티며.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본인이 아니라 주변 인물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 남자한테는 감사해야 하나.’
여우 가면을 쓴 헌터.
그룹과 관계된, 길드 내의 헌터여서는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의 사정과는 무관한 제3자여야만 의미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를 통한 괴롭힘에 주하린은 눈에 띄게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주예린은 동생이 자신을 향해 언성을 높이는 진귀한 장면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어젯밤의 일이었다.
아직 감정이 채 가라앉지 않았을 테니, 차라리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라 할 수 있었다.
‘…오지 않을 거야.’
주예린이 창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게 되뇌었다.
남자는 그런 주예린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의아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 * *
“저것 좀 봐요. 되게 신기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도율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것은 열대에서 자라는 꽃, 라플라시아였다.
두 사람이 방문한 곳은 식물원이었다. 열대와 지중해의 식물을 전시하기 위한 특별전으로, 온실을 운영하고 있는 덕에 겨울이지만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장소였다.
도율이 그런 식물원을 거닐며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열대의 식물들은 평소 보기 드문 만큼 신기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흥미를 가지는 것도 썩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클레어는 그런 도율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마디 중얼거렸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네요.”
“…네?”
클레어의 지적에 도율이 헛바람을 삼켰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거 다 티 나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것도 도은이한테 배운 말이죠?”
“말 돌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바른대로 불어요.”
클레어의 눈빛이 송곳처럼 도율의 미간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이 일은 클레어의 소개로 시작하게 된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럼, 이쪽으로…….”
도율은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클레어를 이끌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식물원의 구석진 외길의 사이로 몸을 숨겼다. 커다란 초록색 이파리들이 커튼처럼 모습을 감춰 주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렇다고 남의 집 가정사를 그렇게 자세히 얘기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도율은 간단히 사실만을 요약해 전달했다. 그만두기는 했지만, 주하린이 전화를 통해 주예린의 행방을 물었다는 내용을.
이야기를 전해 들은 클레어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도율이 그런 클레어의 모습을 아닌 척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죄일지도 모른다.
그 말대로, 클레어가 서늘한 미소를 띄웠다.
“배짱 한번 좋네요.”
그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로 살을 천천히 저미는 듯했다.
“나랑 있으면서, 다른 여자한테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거네요?”
“그건…….”
도율이 식은땀을 흘렸다.
클레어는 당황하는 도율의 모습을 보며 남몰래 웃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크게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도율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어딘지 모르게 흡족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데이트고 나발이고 지 할 일 하러 휙 사라지지 않았을까.
클레어가 왼손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3시간 줄게요.”
“…네?”
도율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클레어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유를 전했다.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 놓은 게 있어서요. 그땐 방송 촬영팀도 합류하기로 했고요. 그러니까 그때까진 돌아와야 해요.”
“그 말은…….”
클레어가 윤허했다.
“다녀와요.”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도율은 곧장 움직이지 않았다.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금방 올게요.”
도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클레어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던 클레어가 주먹을 쥐고 중얼거렸다.
“…이걸로 빚, 갚은 거니까.”
지금까지 주하린은 말없이 클레어의 사정을 봐주고 있었다. 연고 하나 없는 외국인이 홀몸으로 버틸 수 있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
빌려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
그렇게 결정했다.
* * *
“집행부.”
주하린이 남자가 속한 조직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집행부執行部.
집행이란 어떠한 일을 실제로 시행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뜻이기에 어디에서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대현 그룹에서 말하는 집행부는 조금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현 그룹의 회장 주대현. 그가 내리는 명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직접 일을 시행하며, 결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집단.
그룹의 가장 높은 뜻이 직접 부리는 손과 발.
그것이 집행부였다.
얼굴에 쓴 붉은색 치우 가면이 집행부 소속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검은 코트를 두른 모습은, 주하린에겐 이미 익숙한 복식이었다.
‘…왜 집행부가 이곳에?’
주하린이 의문을 품었다.
후계자인 그녀라고 해서, 회장의 수족인 집행부가 하는 일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자신 대신 실종된 언니를 찾으러 온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도 다급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주하린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사람 찾으러.”
“이곳엔 아무도 없습니다만.”
장발의 남자가 손을 뻗어 뒤쪽 풍경을 가리켰다.
그곳은 첩첩산중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있다 하더라도 조난자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주하린이 찾는 사람은 그 너머의 장소에 있었다.
“직접 찾아볼 거야.”
“죄송하지만 이 너머론 가실 수 없습니다.”
“왜?”
“그룹의 일입니다.”
주대현의 명령이라는 뜻이었다. 집행부가 직접 온 것만 봐도 그건 알 수 있다. 이유를 말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숨통을 옥죄어 오는 감각에, 주하린은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룹의 일이라고?”
주하린이 날카롭게 치켜떴다.
“그렇습니다. 회장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이건 모두…….”
주하린은 그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곧잘 들어온 말이었다.
“아가씨를 위한 일입니다.”
치가 떨리는 말이었다.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는 말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룹이란 그녀를 지키는 커다란 울타리인 동시에 가둬 두는 새장이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말 잘 듣는 손녀로 지내 왔지만.
실제로는 후계자라는 자신조차도 그룹을 존속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길 때도 있었다.
‘할아버님이 언니를…….’
가족이라는 선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신도 더는 착한 아이 행세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대현 그룹의 후계자의 자격을 빌어 명한다.”
말을 함과 동시에 주하린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주하린. 그녀는 대현 그룹의 후계자로, 길드를 물려받아 장차 그룹의 지도자가 될 예정이었다.
장녀인 언니가 아니라 차녀인 동생이 후계자로 선택된 이유. 그것은 그렇지 않은 어닌와 달리, 그녀가 각성자이기 때문이었다.
여차할 때 본인의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 누구의 보호도 필요하지 않고, 원초적인 힘을 휘두를 능력을 기른 자.
대현 그룹은, 그런 후계자를 기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스로 가진 재능에 더해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그녀는, 실제로 엄청난 무위를 갖춘 각성자로 거듭났다. 던전 공략에 직접 참가해 공을 세울 필요가 없기에 등급을 높이고자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때 가차 없이 힘을 휘두르기 위해, 몸도 마음도 갈고닦았다.
“비켜.”
그러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후계자는 후계자일 뿐. 아직 주인은 아닙니다.”
그 목소리 역시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제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늘 아래에 단 한 분뿐이십니다.”
그리고 남자 역시 마력을 끌어 올렸다.
보는 눈이 없는 두메산골에서.
같은 소속에, 다른 뜻을 두 사람이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