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나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철완鐵腕.
집행부 소속의 노인이, 가면을 쓰고 정체를 감추기 전에 불리던 이름이었다.
노인은 강철 같은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박살 내는 각성자였다. 젊은 시절, 그렇게 이름을 떨쳤다.
이후 대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물리력의 행사에는 남자의 존재가 빠지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이 합법적인 동시에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노인은 자신의 뜻을 다른 이에게 의탁해 살아가겠다 결정한 상태였다. 그러니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은 주제를 넘어선 일이었다.
‘하나…….’
그런 노인이 지금, 단 한 가지 후회하는 일은.
오래 전에 해야 했던 일을 미뤄 왔던 것이었다.
“아가씨.”
노인이 주하린의 뒷모습을 찾아냈다. 노인의 목소리에 주하린이 걸음을 멈췄다.
“…할아범이야?”
굵직한 노인의 목소리. 주하린에게는 익히 들어왔던 목소리였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도 단숨에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목소리를 도저히 떨쳐 내지 못했다.
“할아범이지?”
불타는 숲속에서 주하린의 목소리가 일렁이는 공기를 타고 노인에게 전달되었다. 타들어 가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물기를 머금은 것이었다.
“예.”
노인에게 주하린은 그녀가 태어나 갓난아기일 때부터 지금까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온 존재였다.
조금이지만 사제의 연도 있었다. 그녀가 아직 스타일을 확립하기 전, 각성자로서 기본적인 부분을 가르치곤 했으니까.
주하린에게도, 맨얼굴의 친할아버지보다 친숙한 사람이 바로 이 붉은 가면을 쓴 노인이었다.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 온, 그리고 변하지 않았던.
노인을 향해 주하린이 애원했다.
“언니가… 언니가 이곳에 있어. 불이 더 번지기 전에 찾아야 돼. 그러니까…….”
그러나.
노인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그 어리광을 들어주는 일이 아니라.
잘못된 모든 일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아가씨.”
노인이 단단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주하린을 불러세웠다. 그 음색만으로, 주하린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할아범…….”
주하린으로서는 막다른 길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노인이 발목을 잡기만 해도 삽시간에 퍼져 나간 불길이 주예린을 불태울 것이고. 설령 함께 찾는다 해도… 노인은 주예린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노인을 상대로 주예린을 지키며 함께 도망칠 수 있을까? 결코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누가.’
누군가 도와주러 온다는 생각 역시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길드 소속의 헌터라고 해도, 크게 보면 결국 그룹 내의 조직원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룹 차원에서 행하는 일에 거스르는 것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주하린은 유일한 후계자이기 때문에 처분당할 일이 없겠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으니.
설령 그룹 소속이라는 울타리를 잃고 싶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작은 나라에서 ‘주대현’이라는 이름 석 자에 정면으로 부딪칠 수 있는 인간은 달리 없었다.
‘아무도…….’
아무도 도와줄 리가 없었다.
주하린, 그녀의 인생은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으니.
그녀가 이뤄 온 모든 것과 쌓아 온 모든 관계가 그룹이라는 비호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우산이 없다면, 그녀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라고 한다면.
* * *
-걔가 도움이 필요하다 했다고요?
각성자 지원 센터.
센터장 최강현이 부탁이 있다며 찾아오며 꺼낸 건, 오랜 동창의 이름이었다.
-둘이 동창이지 않나.
헌터 아카데미, 극광.
초국가적 각성자 교육 기관인 만큼, 입학하기도 졸업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그곳 출신이라 하면 누구나 다 우러러 보는 각성자가 될 수 있었다.
확실히 주하린은 그곳을 졸업했다, 차석이라는 성적으로. 누군가에겐 꿈에도 못 꿀 성적이었지만, 주하린에겐 탐탁지 않은 꼬리표였다.
그런 주하린을 누르고 항상 수석을 차지했던 것이 클레어 컴벨이었다.
-둘이 안 친한가?
-이보세요. 전 만년 차석이었고, 걘 맨날 수석 자리 꿰차고 있던 애라고요, 한 번도 양보한 적 없이. 사이가 좋겠어요?
자격지심?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으나, 달가운 사이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안 좋나?
-안 좋을 건 또 없지만…….
최강현의 아무것도 아닌 듯 물어보는 질문에, 주하린은 폐부 깊숙한 곳을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카데미 시절이 떠올랐다.
수석 자리가 그렇게 간절한 것도 아니었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어가 아니꼽게만 느껴졌던 건…….
주하린의 주위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났다.
대단한 배경을 가진 각성자 유망주. 실력도, 빽도 뛰어나니 사람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늘 관심과 시선의 구애 속에서 살아왔다.
주하린은 배운 대로, 쓸 만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구별해 늘 적절한 대응을 해 왔다.
하지만 클레어만큼은 주하린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았다. 성적만큼은 앞서니까 먼저 숙이고 들어갈 필요 없다 생각하는 걸까.
주하린이 먼저 클레어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타이밍을 틈타서.
-얘.
-…무슨 일?
-너 아직 소속이 없는 모양이던데. 갈 데가 없는 거라면, 우리 길드로 오지 않을래? 내가 특별히 신경 써 줄게.
이례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건 클레어가 유일하게 주하린 위에 선 생도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클레어는 별 시시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무미건조하게.
-생각 없어요.
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뭐? 야, 야!
주하린이 불러 세웠지만 클레어는 더는 용건 없다는 듯 매몰차게 떠나 버렸다.
그후 주하린은 곁눈질로 클레어를 관찰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제 보니 클레어는 어울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치 혼자서도 모든 걸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것처럼.
인간 사회에선 혼자 지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손을 잡아 편해지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고립된 상태로 개인의 역량만을 평가해 주는 건 아카데미 시절이 끝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주하린과 홀로 걷는 클레어가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걷다 서로를 지나쳤다.
주하린이 다시 눈앞의 영감을 바라봤다.
센터장 최강현. 원래 오지랖이 넓은 영감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소속이 없는 클레어 같은 헌터의 뒤를 돌봐 주는 취미가 있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남에게 부탁까지 하러 오는 건 드물었다. 최강현은 지금 부탁이 클레어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다른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갔다. 그 클레어 컴벨이 다른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남한테 부탁까지 하고 다닌다고?
‘누구야, 그게.’
주하린의 입가가 샐쭉 일그러졌다.
최강현은 그런 주하린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도 모른 척 덮어 주겠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부탁했다.
-그럼 한 번만 도와주지.
* * *
그게 유일한 일이었다.
그때 클레어를 도왔던 건, 그룹의 뜻이 아니라 온전히 주하린 그녀가 판단한 결과였다.
그후 클레어와 지인인 듯한 여우 가면을 쓴 헌터와도 만나게 되고, 그 남자 덕분에 주예린의 수발을 드는 걸 함께 부담할 수 있었지만.
‘…기대면 안 돼.’
자신이 베푼 건 딱 그 정도까지였다.
이런 위험한 일에까지 끼어들어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염치가 없는 짓이었다. 이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주하린이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심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돌풍 속에서, 여우 가면을 쓴 남자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왜 온 거야.”
주하린의 말에 도율이 허탈한 목소리로 핀잔을 줬다.
“그게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할 말입니까?”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꿈이라 불러도 좋을 광경. 그러나 주하린이 이 일을 허락받기 위해 넘어야 하는 관문이 있었다. 모른 척 덮어 두고 넘어갈 수 없는 과제였다.
“…지금 무슨 짓 하려는 건지 알고 있어?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거야?”
주하린도 이 헌터가 그저 그런 헌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블랙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였으니까.
하지만 대현 그룹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의미가 달랐다. 그건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언젠가, 집요하게 그의 목숨을 끊을 터였다.
그런 주하린의 물음에 도율이 확언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너…….”
그런 도율의 말에, 주하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푼돈이나 받고 하던 호위 임무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일 리는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도율이 팔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예린 씨는 저쪽입니다.”
“…그걸 어떻게……?”
“감.”
구체적으로는 기를 통한 감지였다.
하지만 주하린은 토를 달지 않았다. 길게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방법을 사용한 것이리라 예상했다.
그 말을 믿었다.
“…여긴 맡길게.”
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역시 너였나.”
노인이 나를 알아본 듯한 말을 건넸다.
나 역시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일전, 불야성에서 내게 명함을 줬던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그때의 가면과 백발, 그리고 풍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붉은색의 치우 가면까지도.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혹시나 했지. 일을 방해하는 애송이가, 여우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네가 아닌가 했다.”
“피차일반이야. 나도 가면을 보고 댁 생각을 했거든.”
설마 그때 그 명함이 대현 소속의 비밀 집단으로 향하는 문이었을 줄은.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나서서 일을 덮을 수도 있었지. 우리 소속으로 영입한다는 조건하에.”
대현 소속의 비밀 조직.
그 존재를 알아 버렸으니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같은 소속이 되라는 의미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우리 일원이 되겠다고 약속한다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게 해 주겠다.”
노인이 회유했다.
그게 노인 나름대로의 호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때 불야성에서 했던 말 그대로, 노인은 내가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집단에 속해, 따르고 싶지 않은 뜻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거절한다.”
그러자 노인이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때문이냐.”
“뭐?”
갑자기 무슨 소리지.
노인은 대현 소속의 인물이니, 아가씨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주예린이나 주하린을 말하는 걸 텐데.
하지만 내가 고작 의리 하나로 이런 일에 뛰어들 정도로 계산을 못 하는 건 아니다. 그건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주대현이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주대현. 그런 인물을 만나 보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는 건 좋은 기회로 보였다.
‘…일단 조용히 있자.’
저번에 만났던 장발 남자 앞에서 주대현의 이름을 꺼냈을 땐 괜한 분노를 샀다.
노인이 억센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다. 걸어 나갈 자신이 있나?”
“…….”
그러자 노인이 피식 웃었다.
“실언을 했군. 각오가 없다면 뛰어들지 않았겠지. 증명할 필요가 있는 건 실력뿐이다, 이 말이냐.”
노인이 주먹을 틀어쥐고 팔을 들어 올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근육이 꿈틀거렸다.
세월이 지나도 노쇠해지지 않고 관록이 더해진 권골拳骨. 삶의 태도가 녹아든 흔적에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일하는 중이다. 조금 경황이 없군. 그러니 손속이 거칠어도 용서해라.”
무엇이 노인을 이다지 열의에 넘치게 만들었는지.
노인의 말과 달리,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미안하지만.”
바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에.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