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저것들은 또 뭐야
“지금 이 자리에서.”
불타는 숲속.
도율과 노인이 모두 가진 마력과 내공을 팽팽하게 끌어 올려, 사소한 신호 하나만 있더라도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노인이 조건을 내걸었다.
“이 늙은이 하나 이기지 못한다면, 두 번 다시 아가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
두 젊은이를 평생 만날 수 없도록 찢어 놓는 것.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노인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과분한 욕심을 부릴수록 괴로워지는 건, 다름 아닌 당사자들이었다.
하지만 젊음의 열기란, 이 불타는 숲속처럼 뜨거워서. 사방에 불길로 가로막혀 그 어디도 내다보지 못하고, 뜨거움에 일렁이는 공기로 사위가 어지러이 문드러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들이미는 건, 냉정한 조언이 아니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상처를 만드는 일이었다.
말로는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노인이 택한 건 힘에 의한 굴복이었다.
“그럼.”
노인의 말을 들은 도율 역시 입을 열었다.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내가 이겼을 때도 조건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어디 한번 말해 보게.”
도율이 조금 뜸을 들였다.
이 말을 해도 될는지.
“내가 이기면, 회장님을 좀 만나 뵙고 싶은데.”
노인과 같이 치우 가면을 쓰고 있는 또 다른 남자. 그에게 이 말을 했을 때, 그자는 상당히 분개했다.
이번엔 최대한 공손하게 말해 봤는데 어떨까.
도율이 노인의 반응을 살폈다. 노인은 도율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곧이어 커다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핫핫핫!”
땅이 울리는 듯한 커다란 웃음소리를 길게 내뱉고, 노인이 여전히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익살스러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자네, 진심이로군?”
“난 항상 진심이었는데.”
도율으로서는 노인이 왜 웃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그러려니 했다. 이 붉은 가면을 쓴 족속들은, 주대현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면 성격이 이상해지는 게 기본인 모양이라 여기며.
“그래. 알겠네. 더 이상의 사설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겠군.”
노인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럼 내 자네에게 최고의 예우를 약속하지.”
그것은 걷기 위함이 아니었다.
두 다리를 굳세게 땅의 위로 뻗어, 마치 통나무 같은 단단함을 자랑했다.
견고한 자세를 유지한 채로 노인이 계속해서 마력을 뻗어 나갔다. 몸속에서 맴도는 흐름이 조금씩 그 범위를 확장해, 열기에 짓눌리지 않고 불타는 세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노인의 마력이 세상을 가르고 있었다.
‘…역시.’
도율이 예상한 대로였다.
노인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각성자라 불리는 인간의 수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외모를 보면 그 경력 또한 짧지 않았을 테니. 어떤 경지에 다다른 기술을 보여 준다 하더라도 놀라울 건 없었다.
‘파경대계破境代界.’
도율에게도 이미 어느 정도 익숙한 기술이었다.
그곳은 새로이 만들어진 우주이기에, 기존과 다른 새로운 법칙이 적용된 상황에서 싸워야만 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누구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었다. 중력이 누구에게나 작용하듯, 새로운 규칙 역시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율은.
어떠한 규칙 속에서 싸우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과연.”
노인은 놀라지 않는 도율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 실력자라 자부하는 젊은 헌터들은, 이 현상을 보면 기겁을 하곤 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상식을 거스르는 새로운 개념이었기에.
그러나 여우 가면을 쓴 남자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쌓아 왔다는 증거였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새로운 규칙, 그걸 숨기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은 그것을 비밀로 하고 싸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숨기거나 한 적이 없었다. 싸움에 임할 땐 늘 전력으로.
정정당당正正堂堂.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제부터 서로 전력으로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는다. 서로 이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모습을 감출 수도 없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
물론 말로만 그렇게 하자고 하면, 아무도 그런 제안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노인이 만들어 낸 세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곧 사실이 되는 세상이었다.
실력과 맷집에 자신이 있는 자만이 승리하는, 야만하고 단순한 전장이었다.
“물론 손대중은 불가능하지.”
“…….”
부쩍 말수가 줄어든 도율을 향해 노인이 물었다.
“두렵나?”
각성들의 싸움이란, 대개 서로를 파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방어하는 능력보다 공격하는 능력이 압도적으로 치우치곤 했다.
그러니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 내는 건 곧 자살 행위였다.
하지만 도율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당신, 죽을 텐데.”
반드시 전력을 내야 한다는 말.
도율에게는 그것만큼 두려운 것이 없었다.
* * *
“…니!”
주예린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눈꺼풀과 눈알 사이에 돌맹이라도 들어가 있는 것처럼 뻑뻑했다.
어떻게 된 일이더라. 집행부의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후엔 약을 적신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혀 의식을 잃었던가.
험하기 짝이 없는 취급이었다. 각성자도 아닌 일반인이라 약물엔 저항하기 어려운데.
곧 죽을 마당에 상냥하게 다뤄 주길 바라는 것도 과분한 바람이었을까.
“언니! 언니!”
“…아.”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환청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팔을 주물러 깨우는 방법이 그녀가 알고 있던 것과 똑같았다.
“정신이 들어, 언니?”
“더워…….”
“벗으면 안 돼, 언니. 피부가 상한단 말야. 조금만 참아.”
주예린의 몸에는 주하린이 입고 있던 코트가 덮여 있었다.
길드에 일괄 지급되는 코트이지만, 단순히 소속감을 강조하기 위한 복식은 아니었다. 두꺼운 코트는 사계절을 불문하고 체온을 유지시켜 줄 수 있었고, 칼이나 총알로부터 어느 정도 몸을 지켜 주는 역할을 했다.
더운 건 이 숲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코트가 일반인인 주예린의 몸을 어느 정도 지켜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의식이 온전하지 않은 주예린은 그런 복잡한 생각에 다다르지 못하고, 덥기 때문에 옷을 벗고자 할 뿐이었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곧 바깥으로 데려다줄게.”
주하린이 주예린을 등에 업었다.
이대로 단숨에 날아서 불이 붙은 숲의 위를 가로지를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했다간 주예린의 몸이 버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일단 움직이자.
주하린이 불길이 약한 부분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주하린의 귓가에 주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예린의 갈라진 목소리가.
“왜 온 거야…….”
주하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불과 몇 분 전의 자신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그건 감히 미처 예상할 수 없던 일이었지만. 그 대답도 정말이지 놀라운 얘기일 뿐이었지만. 그건 생판 남인 사람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주하린이 주예린을 구하러 온 것에는 그런 복잡한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가족이잖아.”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그런 당연한 말.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주예린을 제거하고자 집행부를 부린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들의 친조부인 주대현이었으니까.
중간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명령을 거친 것도 아닌, 단 한 사람의 말만을 듣는 집행부가.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그녀들에게 가족이라는 말은 이 일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주예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란 애는… 내가 밉지도 않니?”
주예린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왔다.
언젠가 자신이 죽었을 때. 동생이 슬퍼하거나 화내지 않고, 차라리 잘됐다고 후련해할 수 있도록. 그런 인간 따위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도록.
지금까지의 주하린이었다면, 필사적으로 미소를 쥐어짜 내고 ‘그럴 리가.’라고 대답했겠지.
하지만…….
“미워.”
“…….”
주하린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미워서, 때리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싶어. 나라고 평생 당하고만 살 줄 알았어? 지금까지 못되게 굴었던 만큼, 전부 다 갚아 줄 거야.”
“…그럼 내버려 두면 되잖아.”
이런 곳에서 타 죽든 말든. 모른 척 팽개쳐 뒀으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었을 텐데. 그게 가장 손쉽게 복수를 완성하는 길인데.
“그러려면 언니가 있어야 하잖아.”
그건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얼마 전, 클레어와 만났을 때. 그녀는 매니저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주하린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클레어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고개 숙이게 된 계기가 누구인지를.
크게 접점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주예린이 화장실에 가고, 클레어가 여우 가면과 잠깐 얘기를 하러 간 사이 둘만 남아 잠깐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사이 좋아 보이네요, 클레어.
-그런가요?
주하린이 사무적으로 미소를 띠었다.
-네, 그래요. 제가 기억하던 시절이랑은 딴판이라서요. 비결이 궁금해지네요.
매니저가 팔짱을 끼고 비결이라… 하며 고민했다.
-인간관계에 특별한 비결이랄 게 있나요? 맞는 사람끼리 맞는 거고, 안 맞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군요.
그 대답에 주하린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니저는 그런 주하린을 향해 문득 덧붙였다.
-근데 안 맞아도 어떻게 해야 하는 사람이 있긴 해요.
-그건……?
-가족이 그렇죠.
-…….
가족.
그야말로 주하린의 상황대로였다.
언니인 주예린과 함께 있는 건 정말 지치는 일이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달라 삐걱거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도 오빠가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쟈게 싸웠거든요. 그래서 내가 언젠가 갚아 준다, 갚아 준다. 벼르고 살았는데……. 아니 글쎄, 이 인간이 하루아침 사이에 사라졌지 뭡니까.
-사라져……?
-예. 실종이요, 무려 10년이나.
-아…….
주하린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짜 맞춰졌다. 클레어의 부탁이 무슨 내용이었고, 왜 그래야 했던 건지.
지금 와서는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약점을 잡고 쥐고 흔들 생각이라면 진작에도 가능했으니까. 서로 다른 일들의 아귀가 맞아떨어졌을 뿐이었다.
-근데, 그 인간이 돌아오니까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지지고 볶을라 해도 결국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거구나, 하고.
매니저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브이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요즘은 소원대로 그 인간 괴롭히는 맛에 삽니다.
우지직!
밑둥에 불이 붙은 나무가 기울어져 주하린을 향해 쓰러졌다. 양손은 이미 주예린의 허벅지를 받치고 있었다.
빠악!
주예린이 이마로 나무 기둥을 들이받아 방향을 틀어 버렸다. 이마 위에서 피가 한 줄기 주륵 흘렀다.
“그러니까, 각오해.”
쓰러진 나무를 짓밟고, 주하린이 앞으로 나아갔다.
* * *
“자네는 대체…….”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노인은 항상 선수를 양보했다. 규칙이 그랬다. 두 사람이 서로 한 번씩 공격을 주고 받는 세상에서, 순서란 중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그게 규칙이었다.
파경대계란 자신의 소우주를 구현하는 것. 그런 규칙이 생겼다는 것 또한, 자신의 성향이 그렇다는 것이겠지. 노인은 그리 이해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만이었다고 느끼는 것은, 맹세컨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내가 말했지.”
여우 가면의 목소리였다.
“죽는다고.”
그는 별 성가신 일을 다 겪었다는 듯 진이 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피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상대의 어디를 공격할지는 공격하는 사람의 마음대로였다. 그 점을 이용해, 여우 가면은 공격을 일부러 빗맞췄다. 아주 조금만 스치도록.
하지만 그 위력은 빗맞췄다고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노인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등 뒤로 난장판이 되어 있는 풍경을 보면 불만을 토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저것조차 대부분의 위력을 하늘로 날려 보낸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도를 새로 그렸겠군.’
노인이 침을 삼켰다.
아무튼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완전한 패배였다. 감히 자신이 자격이니 뭐니 하는 소릴 꺼낼 상대가 아니었다.
“와우. 죽여주는데.”
“뭐야? 할배! 설마 한 놈한테 당한 거야?”
“잡담은 삼가도록 하세요. 임무 중입니다.”
노인과 같은 복장을 한 자들이 언덕 위에 등장했다. 집행부의 다른 요원들이었다.
노인의 등 위로 식은땀이 쭈뼛 솟았다.
“그만둬라!”
하지만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들 또한 집행부.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목소리는 단 하나뿐. 동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것들은 또 뭐야.”
나 바쁘다니까.
도율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