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걸즈 토크
“여기는…….”
주하린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주하린을 치료하던 집행부 여자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하아…….”
집행부 요원들은 모두 내게 당해 마력을 모조리 사용하고 난 직후였다. 마력 탈진 상태에서, 안 그래도 없는 마력을 쥐어짜 내 치료에 사용했으니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집행부 여자의 신경은 모두 주하린의 안위에 쏠려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아가씨?”
“너희…….”
주하린이 집행부를 노려보며 경계심을 내비쳤다.
그러자 집행부 중 한 명인 짧은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나서서 중재했다. 그가 양손을 펼치며 주하린에게 항복 의사를 전했다.
“워, 워. 아가씨. 진정하라고. 이쪽은 죄다 이 인간한테 당해서 뭘 할 생각 없으니까.”
그가 가리킨 건 바로 나였다. 주하린의 의문스러운 시선이 그 손가락을 타고 내게 향했다.
“아……!”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늘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일 거다.
“분풀이라도 하겠다면 몇 대 맞아 주겠지만.”
“…그런 짓은 안 해.”
“그래야 우리 아가씨지.”
집행부가 히죽 웃었다. 주하린이나 다른 집행부원들에게 눈총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의 말대로 상황은 내 수중에 있었다.
아까 전, 불타는 숲속에서 주하린이 주예린을 업고 나타난 후. 나는 일단 장소를 옮기기로 정했다. 나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 위험한 장소에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특히 정신을 잃은 주하린이나 일반인인 주예린에게는.
-…그렇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집행부 여자가 협조적으로 나왔다.
집행부에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현의 응급용 구급차를 근처에 대기시켜 놓으니, 그곳으로 이동하자는 것이었다.
구급차라는 말에 적당한 크기의 차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과 달리 어마어마한 크기의 버스였다.
실내는 차량 안쪽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은 물론이고, 응급 차량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별실로 의료실이 갖춰져 있었다.
엄청나구만.
“언니는?”
주하린의 물음에 따로 준비된 별실을 가리켰다. 의료 시설이 갖춰진 그 별실이었다.
각성자인 덕분에 나름대로 튼튼한 주하린과 달리, 저쪽은 정밀 검사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저 안에 누워 있다.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고.
이 차량의 의료 시설이라는 게 믿을 만한 수준인지, 주하린은 별다른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문을 가진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런데 너희가 순순히 항복을 했다고? 임무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너희가?”
그러자 집행부가 설명했다.
“우리도 임무가 중요하긴 하지만, 골통이 빈 건 아니라서. 보다시피…….”
녀석이 말을 하다 말고 코트 속으로 손을 숨겼다. 탈진에 걸린 상태라 평범하게 움직이는 것도 힘들 텐데 터프하기 짝이 없군.
감탄과는 별개로 할 일은 해야 했다.
내가 집행부 요원의 손목을 붙잡고 팔을 꺾었다.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코트 속에 숨겨 놓았던 작은 비수匕首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야야야! 이렇다니까……. 항복, 항복.”
“그러게 왜 매를 버나?”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퍼포먼스지.”
나는 피식 웃으며 놈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어차피 마력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상태였다. 이러면 놈들이 트럭으로 덤빈다 해도 나 하나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작은 칼 정도는 얼마든지 갖고 놀아도 된다.
“…그럼.”
주하린이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거야?”
“…….”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내가 지키고 있으니 상황이 종료된 것처럼 보이지만. 들은 것과 같이 이들에겐 명령의 완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칙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 임무를 위해 돌변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가 항상 주예린의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내게도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내가 없으면…….’
집행부 녀석들도 임무는 포기하겠다거나 반성하고 있다는 입 발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게 녀석들이 지킬 수 있는 최저한의 양심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이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면 사태가 해결될까?
“끝은 없습니다. 설령 집행부의 이름이 지워지는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집행부 소속의 여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고했다.
“대현의 이름이 살아 있는 이상.”
그런 것도 아니었다. 대현 그룹에는 이 녀석들 외에도 소속된 헌터가 많았으니까. 물론 실력적으로 이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겠지만, 일반인인 주예린을 노리는 거라면 충분했다.
주하린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 모든 일을 뒤집을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 명령을 내린 자의 철회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물은, 대현 그룹의 회장이자 아직도 전설적인 각성자 중 한 명으로 회자되는 남자. 주대현이었다.
그러한 결론까지 다다르자, 벽에 등을 기대 팔짱을 끼고 있던 노인이 눈을 떴다.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이야기가 정리된 것 같으니, 설명하지.”
“설명한다고 뭐 달라질 게…….”
“이 이야기는.”
노인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간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나와 회장님,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내용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나는 자바칩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에, 모카, 헤이즐넛 시럽 3번씩 추가하고, 자바칩 반은 갈아서 넣고 반은 휘핑이랑 같이 섞은 다음에 카라멜 드리즐 뿌려서. 아, 바닐라 시럽도 추가할까? 그럼 헤이즐넛 시럽 1번만.”
샤디아가 웃는 얼굴로 재잘거렸다.
커피를 사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계산대 앞에 선 클레어는 샤디아의 주문을 듣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뭐라고요?”
“뭐긴. 못들었어? 자바칩 프라푸치노에…….”
두 번 듣는다고 외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클레어는 여전히 머릿속에서 생소한 단어들을 조합하고 있었다.
도은이와 함께 카페에 왔을 때, 클레어는 평범하게 라떼나 모카를 시키곤 했다. 도은이도 샷을 왕창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주로 마셨으니, 어려울 건 없었다.
“에휴. 비켜.”
샤디아는 그런 클레어를 향해 툭 쏘아붙이더니 직접 주문을 넣었다. 그게 뭐라고 클레어는 벌써부터 기가 죽었다.
음료를 받아 자리에 왔을 때, 클레어는 자신의 맞은편에 빙수를 방불케 하는 무언가가 컵에 담겨 있는 걸 보며 약간이지만 경이를 느꼈다.
…가격도 빙수를 방불케 했다.
“아, 맛있다. 역시 남의 돈으로 사 먹는 게 꿀맛♥”
샤디아는 싱글벙글 클레어의 신경을 긁어 놓았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썩 예의가 바른 태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친구도 뭣도 아니었으니까.
얼른 본론으로나 넘어가고 싶었다. 클레어는 얼음 가득한 라떼를 한 입 쭉 빨아 올리고 컵을 테이블 위에 쿵 내려놓았다.
“그래서, 할 말이 뭐죠?”
“성격 참 급하네.”
그런 클레어를 향해 샤디아가 핀잔을 주고 시간을 끌었다. 그럴수록 클레어의 심기는 불편해질 따름이었다.
불만 가득한 클레어의 시선을 감내하던 샤디아가 기가 찬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체하겠네, 참.”
샤디아가 주변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런데 이런 데서 이야기해도 돼? 다른 사람이 알아보면 어쩌려고. 유명하잖아? 너.”
클레어는 말 없이 목걸이를 한번 들어 올렸다.
목걸이에는 인식을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새 나가지 않게 하는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너무 소란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괜찮았다.
“자격이 없다니.”
클레어가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쪽이 뭔데 그런 걸 판단하죠?”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내가 보기엔, 이라고.”
샤디아가 빨대를 휘저으며 빠져나갔다.
확실히 샤디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 클레어로서는 그 말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정신 나간 여자의 헛소리로 취급하고 잊기만 한다면.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기에 클레어는 이 자리에 앉았다.
“가르쳐 줘?”
샤디아는 클레어에게 도율의 흉터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기까지 했으니까. 그 외에도 수많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흉터들은 분명, ‘저쪽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얻었던 상처들일 터였다. 그 흔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그 원흉이나 다름없는 클레어에겐 더욱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짊어지기로 다짐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가르쳐 주세요.”
클레어의 대답에 샤디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놀랐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이야. 생긴 것과 달리 자존심 정도는 접어 둘 수 있다 이거구나? 필요 없다고 버틸 줄 알았더니.”
“…….”
“노려보지 마. 이래 봬도 칭찬한 거야.”
그렇게 말하는 샤디아의 목소리에 장난기는 없었다.
“내가 흉터 한번 자세히 보라고 했지.”
클레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게 왜 생겼다고 생각해?”
샤디아가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다.
클레어는 커피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어두운 색의 수면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마주 앉은 여자는 그 일에 대해 모른다. 도율이 말을 했을 리도 없으니까.
“워낙 멋대로인 사람이니까. 어디선가 싸우다가 생긴 상처겠죠.”
그 정도로 말하면 샤디아도 알아 들으리라 생각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만든 상처이기도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싸우다 생긴 상처라……. 과연 그렇게 생각해? 그 정도 실력을 가진 남자가?”
“…….”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도율의 실력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쉽게 큰 상처를 입을 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의 이야기였다. 저쪽 세계에 넘어간 직후의 도율은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청년이었을 거다.
그런 상태로 지금과 같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선을 넘어왔을지. 그 흔적이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그렇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았나 보죠.”
결론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이는 클레어에게, 샤디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거 싸우다 생긴 상처 아니야.”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죠?”
클레어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샤디아는 도율에 대해 가장 중요한 점을,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 주제에 뭘 아는 것처럼 가르치려 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걸 아는 건 자신 뿐이다. 가족조차도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 도율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세상에 단 한 사람.
‘나뿐이야.’
애초에 싸우는 게 아니면, 그런 상처가 생길 이유도 없지 않나.
그런 의문을 가진 클레어에게, 샤디아가 답했다.
“고문.”
“……?”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클레어에게 샤디아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전했다.
“고문 당해서 생긴 상처라고, 그거.”
“…….”
“그보다는 실험에 가까운 거려나. 거기서 거기인 듯한 느낌도 들지만.”
클레어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보면 알지. 싸우다가 생긴 상처와 달리, 움직이지 못하는 인간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룬 흔적은 느낌이 다르거든.”
처음 듣는 소리였다. 도율은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치부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진위 여부는 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어 본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다. 또, 본인의 말도…….
샤디아가 클레어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안색이 파랗네. 혹시 추워?”
“…치워요.”
클레어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기세는 없었다.
그 모습에 샤디아가 가느다랗게 미소 지었다.
“그럼 계속해 볼까? 걸즈 토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