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진실 게임
“그럼 지금…….”
“미안하지만.”
도율이 노인의 말을 잘랐다.
“타임 오버다.”
그가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타임 오버라니, 다른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도율의 단호한 대답에 노인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대현 그룹의 회장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미루고서라도 말인가?”
대현 그룹의 회장 주대현.
그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구하고자 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재 대외적인 활동을 일체 중단한 채 본채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룹의 중진들도 회장과 만나기 위해 그곳을 직접 방문해야 했다. 당연히 삼엄한 경비를 자랑하며, 허가 없이 침입했다간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 회장을, 개인이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처음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아니. 이 남자라면…….’
노인이 도율을 긴장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그 꼭꼭 숨어 있던 그림자 마녀의 공방까지 쳐들어가 ‘세이렌의 눈물’을 구해 오고. 집행부를 몇 명이고 동시에 상대해도 여유롭게 제압하던 모습을 보면.
사실상 이 남자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 결국 남자에게 기회나 허락이라는 말은 코웃음을 치게 만드는 건방진 소리였다.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뜻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노인이 한껏 경직된 채로 도율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율은 그런 노인의 심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반쯤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서.”
“……!”
노인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 남자의 입에서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이 정도 되는 각성자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라면, 도대체 무슨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것일까.
나름대로 살 만큼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노인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추측할 능력이 없었기에, 노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추상적인 응원에 불과했다.
“응원하지.”
그러자 도율이 피식 웃었다.
“그거 참 힘이 되는군.”
* * *
“…늦었나요?”
대현 쪽의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클레어에게 돌아와 보니, 그녀가 약속했던 세 시간은 조금 지나 있었다.
거기서 있었던 일이나 거리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세 시간 근처에 해결하고 돌아온 게 용할 지경이었지만…….
‘그걸 변명거리로 삼았다간 괜히 불똥만 튄다.’
이도은 가라사대.
잘못을 했을 땐 변명하지 말고 잠자코 대가리를 박아라.
하지만 클레어는 딱히 화내지 않았다.
“괜찮아요.”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분노를 억누르는 낌새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사정을 어느 정도 미리 설명해 둔 덕이 컸던 것 같다. 클레어에게도 대현 그룹 관련된 일이라고 말을 해 뒀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겠지.
나는 내심 식은땀을 훔쳤다.
“방송은 중단하기로 했어요.”
“…예?”
클레어의 폭탄 발언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사실 무지하게 화가 난 게…….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요. 당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네. 방송국 측에서 중단하기로 한 거라.”
안도하는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방송국 측은 왜요?”
“주예린 씨가 실종됐거든요.”
“아…….”
클레어의 말에 그제야 사정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 방송에 출연한다고는 하지만, 직접 방송에 크게 관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피디나 작가와의 상의는 모두 클레어나 도은이가 알아서 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건 정말 출연뿐.
그러니 나는 자세한 스케줄을 모르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인 만큼 나름대로 특집을 구성하리라는 건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건 클레어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런데 당일에 당사자가 사라졌으니…….’
다른 약속도 아니고, 방송국 촬영 예정이 있던 사람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실종 신고의 스케일이 달랐을 것이다.
“벌써 뉴스도 떴어요.”
클레어가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해 내게 보여 줬다. 난 여전히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하는 것엔 영 익숙해지지 않은 터라, 필요할 땐 그녀가 곧잘 보여 주곤 했다.
기사 내용은 클레어의 말대로였다. 대현 그룹의 장손녀인 주예린이 정체불명의 빌런들에게 납치를 당할 뻔하였으나, 경호 업체의 활약으로 구출되어 병원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기사도 대체로 비슷한 내용이었다.
‘벌써 약을 쳤군.’
대현 그룹이라면 능히 그럴 능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실제로는 주예린을 제거할 생각이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과는 정반대의 내용이 기사로 나오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런 잡음도 없이 비슷한 내용으로 도배되어 있는 기사들을 보니, 역시 대현에서 미리 손을 써 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뭘 잘못 눌렀는지, 주예린의 기사와 전혀 무관한 화면이 나타났다.
“내 사진?”
화면을 가득 채운 건 내가 등장한 장면이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출연하는 예능의 한 장면이었다. 화면 구석의 로고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진이 스크롤을 내려도 계속 이어졌다. 이 방송에 출연하는 게 분명 나 하나는 아닐 텐데, 집요할 정도로 내 사진만 있었다. 가끔은 곁에 있는 클레어도 함께였고.
탓!
클레어가 휴대폰을 낚아채 갔다.
“……?”
“모니터링이에요.”
모니터링.
그러고 보니 도은이도 꼭 하라고 달달 볶았던 것 같긴 한데. 텔레비전을 안 보고 살았던 세월이 너무 길어져서 할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걸 클레어는 혼자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다니, 반성해야겠군.
핸드폰 화면을 급히 두드려 사진을 치운 후 클레어가 물었다.
“그럼 돌아갈까요?”
“돌아간다니… 어디를요?”
“어디긴요. 집이죠.”
그리 말하는 클레어를 보며, 나는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클레어가 세 시간을 주겠다고 한 건, 저녁에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방송국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니까 늦지 말라고…….
하지만 주예린의 실종으로 떠들썩해진 덕분에 크리스마스 특집은 일단 잠정 중단이었다. 다행히 본인은 무사하긴 하지만, 촬영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닐 테니까.
그렇다고 주예린 부부를 내버려 둔 채로 나머지 두 부부의 분량만 촬영해서 내보내기도 애매하고 하니. 피디는 결국 휴방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소극적이긴 하지만, 신중하다고 친다면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다만.
“왜 그래요?”
그렇게 묻는 클레어에게선, 묘하게 침울한 기색이 묻어 나왔다.
나로선 이대로 돌아가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아니라면 아까 미뤄 뒀던 주대현과의 만남을 가지러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모처럼 예약했는데, 우리끼리라도 가죠.”
“…….”
그런 내 말이 의외였는지, 클레어는 놀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그러던 클레어가 다시 한번 내 의사를 물었다.
“이건 촬영이 아닌데도요? 아는 사람이 있어서 연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건 그렇지만…….”
클레어의 말대로,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굳이 레스토랑 같은 데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하얀 테이블보를 깐 식탁 위에서 스테이크를 썰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긴장돼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와인 맛 같은 건 하나도 모르기도 하고.
“그래도…….”
방송도, 연기도 필요 없다 하더라도.
오늘 같은 날을 그냥 보내면 도은이에게 혼나지 않을까.
꼭 그런 이유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대답을 기다리던 클레어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거, 당신 입으로 하는 데이트 신청이라고 봐도 좋을까요?”
“…….”
클레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도발했다.
죄책감이나 의무감이 섞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다른 방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길을 선택한 건 내 의지였다.
나는 그 점을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 걸로 합시다.”
“흐응.”
클레어가 즐거운 듯이 콧소리를 냈다.
“오늘은 철저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뭐래, 진짜.”
말투와 달리, 클레어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 * *
“두 분 자리 안내하겠습니다.”
시끌벅적하게 기름이 자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게 안. 원통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 내가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클레어가 예약했다던 레스토랑은, 내가 시간 내에 도착하지 않아 취소된 상태였다.
가뜩이나 주예린 관련 일로 방송 촬영까지 중단된 상태였으니. 내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클레어는 지체하지 않고 레스토랑에 연락을 취해 예약을 취소했다는 모양이다.
그렇게 많이 늦은 건 아니지만, 내가 클레어에게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인상을 남긴 건 지금까지의 내 행실이 증명하고 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미 모든 자리가…….
어떻게든 다른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찾아보려 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자리가 남을 리는 없었다.
하루 종일 클레어를 밖에 세워 둘 수도 없고. 결국 내가 찾아 들어온 곳은 특별한 날에 간다고 보긴 어려운 평범한 고깃집이었다. 이마저도 겨우 자리가 나서 앉을 수 있었다.
클레어가 태연하게 앞치마를 둘렀다.
“괜찮아요. 나도 삼겹살 좋아하니까.”
“…그런가요?”
내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클레어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하얀 피부에 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고깃집에 앉아 있는 모습은 안 어울리기 짝이 없었다.
얌전히 삼겹살을 구웠다. 하다못해 고기라도 열심히 구워야지.
고기가 거의 다 익어 갈 때쯤, 클레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장님! 여기 두꺼비 한 병 주세요.”
“예!”
“……?”
턱.
아르바이트생이 테이블 위에 투명한 유리병과 잔 두 개를 올려 뒀다.
“이건……?”
“뭐요. 소주 처음 봐요?”
겉모습만 보면 대사가 바뀐 거 아니냐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클레어가 한쪽 눈을 찡그리더니 유리병을 아래쪽을 쥐고 들어 올렸다. 손목을 돌리며 병을 흔들자, 병 속에서 투명한 소주가 소용돌이쳤다.
…엄청 능숙하잖아.
그런 스킬을 뽐낼 생각도 없다는 듯 자연스러운 얼굴로 클레어가 뚜껑을 따고 소주를 따랐다.
“술 마실 생각이었어요?”
“당연하죠.”
“근데 왜 바로 주문하지 않고…….”
“미리 시키면 식잖아요.”
뭘 당연한 소릴 하냐는 듯 클레어가 면박을 줬다.
“자, 짠 해요.”
클레어가 잔을 내밀었다. 이미 다 구워진 삼겹살이 불판 구석에 정리되어 있었다. 더 내버려 두면 맛이 떨어진다.
하지만 건배하기 전엔 손을 대지 않겠단 눈빛이기에, 나도 잔을 들어 올렸다.
공중에서 잔이 부딪쳤다. 조용히 잔을 기울이며 관찰하는데, 클레어는 고개를 돌리고 단숨에 술잔을 털어 넣더니 크- 하고 숨을 내뱉었다.
누구야. 이 여자한테 한국인 패치 깔아 놓은 사람.
“아, 뭐 하는 거예요!”
“…뭐가요?”
“첫 잔을 꺾어 마시는 게 어딨어요? 술맛 떨어지네, 참나.”
“당신 술 누구한테 배웠……. 아니다.”
누군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누구긴 누구겠어.
“…소주도 마실 줄 알았군요.”
소원대로 남은 잔을 털어 넘겼다.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몇 번 봤지만. 맥주는 원래 외국에도 있는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소주는 느낌이 좀 다르다.
그런 내 중얼거림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클레어가 발끈하며 물었다.
“한번 떠 보자 이거예요?”
“아니, 그런 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클레어가 두 잔 모두에 가득 술을 따랐다.
‘표면 장력이…….’
진호와 마셨을 땐 분명 이렇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가고 몸뚱이가 늙어 가는 걸 느끼며, 이제는 슬슬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적당히 즐기는 걸 알아 갈 때였다.
하지만 클레어는 분명 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거다. 술자리 태도가 거의 20대 초반이었다.
“마침 잘됐네요. 게임 하나 할까요?”
“…무슨 게임이요?”
“진실 게임.”
클레어가 조건을 읊었다. 서로 한 잔씩 동시에. 빼는 쪽이 물어보는 거 뭐든지 대답하기. 마력으로 취기 날리기 없음.
“내가 궁금한 게 좀 많아서요.”
클레어가 먼저 잔을 비우고 눈짓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