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아저씨가 누굽니까?
“아으, 머리야…….”
클레어가 이마를 붙잡고 중얼거렸다.
클레어는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마가 머리 안쪽을 조이고 있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고통 속에서 눈을 뜨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더라.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되돌려 보려 해도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희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헤집어 내려 하면 할수록 두통이 강해졌다. 열리지 않는 문의 빗장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결국 클레어는 생각하는 걸 그만뒀다.
대신 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 말라…….”
클레어가 이불 밖으로 발을 뻗었다. 침대 위를 미끄러지듯 땅 위로 발을 디디자, 서늘한 공기와 달리 방바닥은 따뜻해서 기분 좋았다.
앞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길을 찾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익숙한 자신의 집이었다. 바닥만을 쳐다보며 부엌까지 걸어 나가 냉장고 앞에 다다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냉장고 문 앞쪽엔 작게 정수기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정수기만 가지고는 물을 마실 수 없었다.
클레어가 냉장고의 문 앞에 이마를 박고 고민했다. 서늘한 표면이 이마를 식혀 주고 있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내리깐 시선 아래에 정수기가 보였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그냥 물이 떨어지는 곳 아래에 입을 대면 입 안에 물이 고이지 않나?
나이스 아이디어.
클레어가 슬그머니 허리를 숙였다.
“자요, 컵.”
“아…….”
누군가 손잡이가 달린 컵을 내밀었다. 클레어는 컵을 받아 들고 물을 가득 따랐다.
차가운 냉수를 쉬지 않고 들이켜니 머릿속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이어졌다. 하지만 덕분에 머릿속이 한결 맑아졌다.
부엌은 어떤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에 냄새가 섞여 있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감각이 선명해지니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머리가 피부를 건드려서 간질거렸다. 손가락으로 대충 머리를 정리하고 나니, 그제야 앞이 제대로 보였다.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였다. 도마 앞에 선 누군가가 무언가를 칼로 썰고 있었다. 칼과 도마가 만나 규칙적으로 도각, 도각 하는 소리를 냈다. 서두르지는 않으면서도 능숙한 태가 났다.
생소한 풍경은 아니었다. 클레어는 자연스레 식탁에 앉았다. 늘 앉던 자리에서,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새로이 자리 잡은 일상이었다.
‘…그런데.’
익숙해야 할 터인데.
‘뭔가 평소랑 다른 듯한…….’
자꾸만 느껴지는 위화감에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이지 않는 실이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듯한 찝찝함이 느껴졌다.
위화감의 정체는 목 아래를 내려다보면 눈치챌 수 있었다.
“……?”
없었다.
하의가.
“…핫!”
클레어가 옷깃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완전히 반라 상태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있어야 할 게 없었다. 적어도 누구한테 보여 줄 만한 꼬락서니는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왜……?’
클레어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지난 기억은 완전히 까마득했다.
설마 무의식적으로 벗어 던졌나?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평소… 아니, 가끔 그런 짓을 하곤 했으니까. 혼자 사는 집에 조금 편히 있는 것 정도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만 이젠 혼자가 아니란 점이 문제였다.
다행히도 웃옷은 기장에 여유가 있었다. 아래로 잡아당기면 충분히 덮을 수 있었다.
그래도 바람 훤히 통하는 하의 실종 (진짜) 상태로 있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도율은 아직 아침 준비 삼매경이었다.
클레어가 몰래 자리를 뜨려는 순간.
“다 됐어요.”
“네?!”
도율이 접시들을 식탁 위로 나르기 시작했다.
의자를 내빼려던 클레어가 반사적으로 식탁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배와 식탁 사이에 주먹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타이트한 거리였다.
도율은 몇 번인가 부엌과 식탁 사이를 왕복했다.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여유 있는 걸음걸이 덕분에 조금은 틈이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이 넓은 집은 방 사이가 멀었다.
클레어가 그 시간을 가늠했다.
과연 도율이 등을 돌린 사이에 방까지 뛰어갈 수 있을까? 뛰는 소리가 들리면 돌아보지 않을까?
달그락.
식탁 위로 접시가 쌓이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면 모든 고민이 허사가 되고 만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던전에서, 찰나의 선택이 목숨을 좌우하는 순간도 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의 목숨까지도.
‘…지금!’
결단을 내린 클레어가 재빠르게 의자를 밀어내고 다리를 뻗었다.
끼이익!
의자 다리가 거칠게 밀려나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상정 내의 일이었다. 클레어는 헌터였다. 몸을 다루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끼약!”
숙취에 시달리지만 않았어도.
철푸덕.
차라리 조용히 넘어졌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설프게 낙법을 펼치며 바닥에 따귀라도 날리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났다. 나사 빠진 비명 소리는 덤이었다.
“…….”
맨살에 차가운 공기가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클레어는 감지感知와 관련된 스킬 따윌 갖고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도율이 지금쯤 꼴사납게 엎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리란 사실을.
발소리를 최대한 죽여 걷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엉덩이 위로 천 하나가 덮였다. 짐작하건대, 앞치마였다.
클레어는 그대로 코를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입맞에 맞아요?”
“…….”
내 물음에 클레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어는 식사 시간 동안 말 한 마디 안 하고 조용히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고 있었다.
평소라고 해서 밥 먹는 동안 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침묵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드물다기보단 오랜만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직전에 엄청난 치태를 보인 참이었으니.
나도 놀라긴 했다. 우당탕 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클레어가 속옷 차림으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게 아닌가.
집이 넓은 덕분인지, 각자의 생활 공간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어 첫날을 제외하곤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는데. 행여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잊어 주세요.”
식사를 마친 듯한 클레어가 부탁했다.
잊으라는 말에 나는 본의 아니게 아까 그 광경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말았다. 아무리 나라도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방법 따윈 모른다.
그래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나. 대답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잊어 드리죠, 어제 일까지 깔끔히.”
그렇게 클레어를 안심시키려 했더니, 클레어가 내 말을 곱씹었다.
“어제……?”
클레어가 의문스러운 눈길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기억 못 하는 겁니까?”
아차 했다.
설마 필름이 끊겼을 줄이야. 아침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뭐, 뭔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이 아니잖아요.”
“…안 듣는 게 나을 텐데요.”
“네……?”
클레어가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의 짓을 했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클레어의 시선을 피하며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 * *
클레어는 게임을 하자는 말 따윈 까맣게 잊고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눈은 한참 전에 풀려서, 모처럼의 푸른 눈동자가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가게 조명이 어두운 편이어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반응이 옅어진 듯한 클레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 씨.
-아 씨?
욕하는 게 주사인가.
그래도 그 정도면 그나마 얌전한 편이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내게 클레어가 물었다.
-옆에 앉아도 돼요?
클레어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내 옆자리로 이동했다. 그래 봤자 원형 테이블의 테두리를 타고 조금 이동한 것에 불과했다.
가까이에 앉자 그녀가 하는 말이 보다 명확해졌다.
-아저씨…….
그 말에 내가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저기, 클레어 씨. 보면 알겠지만 제가 아저씨 소리 들을 정도는…….
-아저씨.
-…취했나.
적당히 장단에 맞춰 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클레어가 더욱 가까이 엉겨 붙었다.
-쓰다듬어 주세요.
-…예?
-쓰다듬어 주세요, 얼른.
클레어가 내 손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 위로 가져다 놓았다.
술에 취한 여자를 멋대로 다루는 건 볼품없는 짓이라 생각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 정도는 허용 범위 내의 일이라고 쳐도 되는 건가?
고민에 빠진 내가 반응이 없자, 클레어는 앙탈을 부렸다.
-이잉…….
-…….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방금 들은 게 제대로 된 게 맞나? 차라리 나도 환청을 들을 정도로 취했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클레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은이가 초등학생일 때 이후론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똑바로 하는 건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클레어는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기대 왔다. 마음에 드시는 걸지.
남들이 흘끗 시선을 던지며 눈꼴시다는 반응을 보였다. 클레어의 목걸이가 정상 동작하는 덕분에 정체를 들키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부끄러움은 왜 나의 몫인 걸까.
-…술 깨면 죽고 싶을 텐데.
-……?
그보다 걱정인 건 맨정신으로 이 모든 일을 받아들여야 할 미래의 클레어였다.
그후로도 클레어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주로 어리광을 받아 주는 형태의 일이었다. 설마하니 이런 주사가 있을 줄은 몰랐다.
더 문제인 건.
-…저기, 클레어 씨. 이제 그만하고 슬슬 집에 돌아가죠.
-히잉.
뜻대로 해 주지 않으면 곧잘 앙탈을 부리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술에 깨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에게 마구 어리광을 요구한 것과 앙탈을 부린 것. 둘 중 어느 쪽이 좀 더 죽고 싶은 일일까.
나는 클레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결국 이 짓거리는 클레어가 완전히 곯아떨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꾸벅꾸벅 조는 클레어를 들쳐 업고 차에 태워 집에 도착해 침대 위에 눕혀 놨다.
* * *
그리하여 시간은 다시 지금.
지난 기억을 떠올려 보면, 속옷 차림으로 자빠진 것 정도는 애교가 아닌가 싶다.
클레어가 내게 다가와 얼굴을 밀어붙였다.
“말해요.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는 게 약이라니까요.”
“이……!”
판도라의 상자는 열지 않는 게 상책이라지만. 결국 열고 마는 게 인간이다. 클레어 역시 지금 금기에 손을 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쇠를 가진 건 나였다.
“진실 게임.”
“…네?”
갑자기 그 소리가 왜 나오냐는 듯, 클레어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진실 게임, 하자고 했었죠? 이긴 사람이 누굽니까?”
“…당신이요.”
“그럼 질문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죠?”
“…….”
클레어가 떨떠름하게 노려보았지만, 달리 할 말은 없는 듯 입을 닫았다.
진실 게임을 하자고 한 건 다름아닌 클레어였다. 그녀가 제안한 게임의 결과를 거론하니 클레어도 얌전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됐죠?”
잠시 침묵하던 클레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하세요.”
“하다니? 뭐를요?”
“질문. 아무거나.”
“……?”
클레어가 새초롬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이 승자니까, 아무 질문이라도 하세요.”
고지식하긴.
나는 피식 웃으며 사양했다.
“난 됐어요.”
“…그래서야 게임이 아니잖아요. 빨리하세요.”
“괜찮다니까요.”
그러자 클레어가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겠네요.”
어딘지 모르게 쌉싸름한 기색으로.
“당신은 나한테 궁금한 게 없을 테니까.”
그 말과 달리, 내가 클레어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클레어의 그 말은, 내 태도에 대한 불평이었다. 마치 무관심을 원망하듯이.
“잘 먹었어요.”
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와 같이 깨끗이 비운 그릇이었다.
내가 클레어를 불러 세웠다.
“그럼.”
클레어가 돌아봤다.
“한 가지만 물을 테니까,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어떤 거죠?”
“…정말 시시한 건데, 크게 궁금한 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아, 뭐냐고요!”
클레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기까지 와서도 나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걸 묻는 게 맞는 건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아저씨가 누굽니까?”
상상도 못 한 질문이었다는 듯.
클레어는 잠시 동안 대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