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
11화 한 대만 때려 보자
밤늦게 족자를 들고 뒷산에 올랐다.
기를 펼쳐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안 그래도 등산객이 그렇게 많지 않은 자그마한 산이고, 시간까지 늦은 밤인지라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족자에 내공을 주입하시면 됩니다!」
“알아.”
손끝을 타고 흐르는 기. 기를 머금은 족자는 부르르 떨리더니 스르륵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펼쳐져, 그 속에 담긴 그림이 드러났다.
“수묵화?”
산과 호수를 그린 수묵화. 검은 묵의 짙고 옅음만으로 표현한 세계가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림이 드러난 족자는 손으로 들고 있지 않아도 공중에 고정된 것처럼 떠 있었다. 손을 대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몰입도가 느껴졌다.
‘기분 탓이 아니군.’
느껴지는 기의 파동으로 어렴풋이 알았다. 이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라는 것을.
즉, 이것 자체가 하나의 던전인 셈이다.
빠져들 정도로 빼어난 그림 퀄리티는 실제 정경을 묘사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그것 이상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계에 발을 들이도록 꾀어내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른 세계로 끌어들여서 뭐 어쩌려고?
오히려 나도 바라는 바였다. 보는 눈이 없는 곳에 갈 수 있는 건.
─똑.
그림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수면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풍경이 일변했다.
어두운 동네 뒷산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에 펼쳐진 건 한지 색의 세계였다. 구름도, 산도, 나무도, 호수에 비친 정경도 모두 묵색으로 점철된 곳.
「크하하하하!」
온 세상을 울리는 것처럼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과장이 아니라는 듯 주변의 송목들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별개로,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침입했지?」
“네가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냐?”
「사,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다.」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이 있어 물었다.
“근데 너 말이 짧아졌다? 밖에 있을 땐 대협, 대협 소리 하던 놈이.”
「다, 닥쳐라. 한낱 인간 주제에 내게 이런 치욕을… 내가 잊을 줄 알았더냐!」
“네가 자진해서 한 거잖아.”
나는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딱히 자존심을 굽혀야만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종용한 적도 없고. 그저 저 녀석이 내 환심을 사기 위해 알아서 먼저 굽히고 들어온 것에 불과했다.
「…이놈! 적당히 손속을 두려 했거늘, 안 되겠구나! 언제까지 그 시건방진 입을 놀릴 수 있는지 지켜 보겠다!」
슬슬 귀가 울렸다. 목청이 좋은 것 하나는 인정해 줘야 할 듯싶다.
“그럼 튀어나와.”
「어…….」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며?”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럼 주먹 대 주먹으로 대화 한번 해 보자고.”
「이놈!」
내 도발에 녀석이 노호성을 내지르며 나타났다.
쿠궁, 쿠궁!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한 커다란 뜀박질 소리. 바위가 땅 위를 마구 두드리는 듯한 소음 후에 나타난 건 하얀 털을 가진 커다란 짐승이었다.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 있어, 네 발로 뛰는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보려면 고개를 한참 들어야 했다.
하얀 털과 검은 무늬. 호랑이의 형태를 빌린 커다란 짐승. 녀석의 이름은 백호였다.
“백호인가…….”
「영광으로 알아라! 이 몸이 미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걸!」
동서남북을 다스리는 신성한 동물, 사신수四神獣.
들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백호란 이름은 호랑이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실제로 호랑이와 같은 생김새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하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이 실제로 하얀 호랑이이기도 하고, 스스로 그렇게 자처하는 것 같으니 일단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크크큭. 얼어붙었군.」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 생각에 잠시 잠겨 있었더니 백호 녀석이 건방지게 웃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초면에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녀석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마저도 감안하고 충분히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에 넣었지만, 버릇은 고쳐 두는 게 주인 된 자의 도리다.
나는 교육계의 대부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이 몸은 개가 아니다!」
백호가 달려들었다. 육중한 몸을 내던지며 휘두르는 앞발은 그 중량만으로도 압도적인 일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목의 허리가 부러지고 바위가 하늘을 날았다.
그 광경에 인상을 찌푸렸더니 백호 녀석은 기세가 등등해져서 외쳤다.
「크하하! 겁을 잔뜩 집어먹었군!」
“그게 아니라, 난 이곳 경치가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
적당히 힘이 빠질 때까지 상대해 주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내 안에서의 우선순위는 이곳의 경치를 지키는 것이 저 녀석의 신체적 건강보다 앞서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이곳은 장소가 좋았다. 기의 흐름이 어지럽지 않다. 조용한 산속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때와 같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부드럽게 기를 주천할 수 있다.
단전의 기가 혈맥을 타고 온몸을 두드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던 시절과 비교하면 실로 오랜만. 없던 기도 쥐어짜 내던 그때와 달리, 녹슬었던 기계에 기름을 칠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었다.
「크하하하! 발악을 하는구나! 마지막인 줄 알고 기를 있는 대로 쥐어짜 내고 있…….」
그래. 즐거웠다.
사사로운 싸움에 목숨을 걸던 순간이 아니라, 스승님께 무공을 처음 배우던 시절이 떠올라서.
느긋하게 지켜보던 백호의 모습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기습하거나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지만, 당연히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백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녀석이 택한 건 협상.
「저… 대협. 아무리 저라도 그거 맞으면 죽습니다?」
“백호야.”
「예……?」
나는 씨익 웃고 부탁했다.
“한 대만 때려 보자.”
백호는 이미 털 색이 하얘서 이보다 더 창백해질 방법이 없었다.
* * *
“하아.”
기분이 꿀꿀했다.
「뭐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대협?」
소리는 방석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방석이란 물론 백호의 머리털을 말하는 거였다. 귀가 말랑해서 생각보다 깔고 앉기 괜찮다.
백호는 현재 땅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사족 보행을 하는 동물도 원산폭격이 가능했나.
“불편한 일? 있지.”
모처럼 제대로 된 일격을 날려 보나 했더니 백호 녀석이 잽싸게 튀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말았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도망치는 곳으로 방향을 조정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파리한 안색으로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녀석을 보니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 쓸모가 있는 녀석인데 진짜 골로 보내면 좀 아쉽잖아.
그리고 사실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거 어쩌냐? 저거.”
「아, 저 구멍 말씀이십니까?」
하늘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내가 날린 일격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구멍 주위론 마치 종이가 찢어진 것처럼 구겨진 흔적과 불규칙한 단면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은 주변의 색과는 확연히 다른, 완전히 새까만 검정이었다.
여러모로 이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곳 경치가 마음에 든다고 한 건 다름 아닌 난데, 내 손으로 이곳 경치를 망쳐 버린 셈이다. 그 점이 제법 우울했다.
「어차피 그림 속 세계 아닙니까, 대협.」
“뭐, 인마?”
그럼 너도 그림 속 존재인 것 같은데 똑같이 찢어 주랴?
백호 녀석은 얼굴도 안 보이는 내 심기를 바로 간파하고 황급히 수습했다.
「아, 아. 그게 아니라요. 이곳은 그림 속 세계이기 때문에 바깥에서 내공만 주입하면 충분히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대협.」
“진짜냐?”
「예.」
그건 희소식이었다.
나는 백호의 머리에서 내려 땅 위에 섰다. 그러자 백호도 슬슬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슬슬 돌아가 볼까. 사장님이 걱정하시겠네.”
「사장… 님이 뭡니까?」
“사장님? 나보다 높으신 분.”
「…농담이시죠?」
“진짠데.”
백호가 와들와들 떨었다.
「그런데 대협, 나가는 법은 알고 계십니까?」
“어.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한번 망쳐 보니 어떻게 하는지 알겠다.”
하늘을 때렸을 때 풍경이 찢어지는 그 감촉. 그때의 느낌은 분명 이 세계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나가는 방법도 얼추 비슷하다는 뜻.
나는 풍경의 경계를 허물어 내가 나갈 구멍을 만들었다. 이번엔 진짜 조금만.
그 너머로 몸을 던지자 밤이 깊은 뒷산. 내가 족자를 펼쳤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인간은 못 하는 게 뭐지?」
“뭐랬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협!」
나는 족자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찢어진 부분을 고치는 것과 더불어 백호 녀석을 바깥으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족자의 그림 속에 팔을 넣고 백호의 귀를 잡아당겼다.
“너도 나와.”
「아! 아! 아! 찌, 찢어집니다! 대협!」
“좀만 참아.”
「그, 그림이 찢어집니다! 대협!」
백호의 말에 바로 손을 놓았다.
“뭐, 방법 없냐?”
「…크기를 줄여 보겠습니다.」
산과 호수가 그려진 그림의 상당한 크기를 차지하던 백호 녀석이 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 후 녀석을 꺼내 주니 얼마나 작아졌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백호는 작은 강아지 크기로 줄어 있었다. 상당히 앙증맞았다.
「하아. 이게 얼마 만에 맡아 보는 사바세계의 냄새냐.」
녀석이 코를 킁킁거렸다.
진짜 개 같아.
“이제 남은 건 사장님한테 어떻게 허락을 받느냐는 건데…….”
「사, 사장님이라면…….」
“사장님이 허락 안 하면 나도 방법이 없다.”
클레어 씨는 비단 사장님일 뿐만 아니라 내가 얹혀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이기도 했다. 그 정도 시설의 오피스텔이라면 반려견 정도는 들일 수 있겠지만, 키우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집주인인 클레어 씨의 결정에 달려 있다.
「…사장님께서 수락하지 않으면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뭘 어떻게 돼. 그림 속에 처박혀서 지내야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무슨 최선?
미심쩍은 눈길로 묻자 녀석이 가슴을 쳤다.
「제가 아첨 하나는 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알긴 아네.”
「물론 대협께 하는 말은 모두 제 순수한 본심에서 비롯된 진언입니다만…….」
“개소리 말고. 근데 너 전음밖에 못 하잖아.”
「아.」
아는 무슨 아.
“어쩔 수 없지. 이럴 땐 길 잃은 강아지 작전으로 가자. 동정심과 귀여움으로 승부하는 거다.”
「저기, 대협. 호랑이는 엄밀히 따지면 고양이과입니다만?」
“개처럼 생겼으면 개지, 뭘.”
「그건 대협 눈이…….」
내가 노려보자 녀석은 바로 깨갱 했다.
이게 개가 아니면 뭐냐고.
잠시 후.
클레어 씨의 오피스텔에 돌아온 나는 백호를 품에 안고 현관문 앞에 섰다. 혹여 소리가 샐까 우리는 전음으로 작전을 검토했다.
「기억하지?」
「예.」
「잘하자.」
삐리릭.
클레어 씨가 건네준 여벌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은 긴 복도와 이어져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클레어 씨는 굳이 마중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입장을 생각하면 내가 반대로 기다려야 할 포지션이다.
거실까지 이어진 복도를 나아가며 심장이 뛰었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네.
클레어 씨는 거실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진지한 표정을 보니 도은이처럼 예능 따윌 보는 게 아니라 자료를 읽고 있는 모양이다.
“어디 갔다 왔어요?”
“요 앞에 잠깐…….”
“네.”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건지 클레어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직 이쪽엔 눈길도 주지 않았을 정도. 그 정도로 중요한 서류 작업인가.
먼저 말을 붙이기도 뭐해서 나는 품에 백호를 앉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클레어 씨는 왜 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거기 서 있냐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내가 가슴팍에 새하얀 털 뭉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뭐죠?”
“아, 이건 이 앞에서 산책 하다가 주운 갠데…….”
「진입!」
전음으로 신호를 주자 백호가 내 품에서 뛰어내렸다.
작전은 스킨십이었다. 원래 애완동물을 안 키워 본 사람도 실제로 동물을 보다 보면 애착이 생겨서 마음이 기울기 마련. 절대 키우지 말자고 반대하던 부모님을 스킨십으로 무너뜨린 사례는 차고 넘쳤다.
백호가 클레어 씨에게 달려갔다. 이대로 품에 달려들면…….
“나가요.”
“…예?”
단호한 클레어 씨의 말에 나도 백호도 멈춰 섰다.
「중지! 작전 중지!」
「주, 중지!」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 파였나……?」
「제가 원래 호랑이는 고양이과라 했잖습니까!」
「씁…….」
「…이제 어쩌죠, 대협?」
「나도 몰라.」
식은땀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