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지가 할 소린가
“내가 아는 사람이에요?”
도율이 짐짓 태연을 가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따분해 보이는 얼굴 뒤로 도율은 클레어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짚어 보고 있었다. 그래도 한동안 매니저 활동을 했던 만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클레어 자체가 워낙 인간관계가 협소한 편이라, 짚이는 건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팀원들 정도가 전부였다.
‘청진명은 아저씨 소리 듣기 싫어할 것 같고.’
청진명은 실제로 클레어보다 나이가 많고, 무슨 소리를 듣든 흐르는 물처럼 넘길 것 같은 쾌남 같은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도율이 기氣를 통해 파악한 파에 따르면, 은근히 그런 걸 담아 둘 성격이었다.
‘사투리 쓰던 남자는? 아니면 그 덩치 크고 말수 적은…….’
도율은 클레어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상상 속에선 뭐든지 가능했다. 어젯밤 자신이 겪었던 일에 다른 누군가를 대입해 보니.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숨겼지만, 도율은 표정 관리에 능한 편이 아니었다. 그건 사람 표정을 읽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클레어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불편해 보이는 기색의 도율을 보며, 클레어가 역으로 물었다.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건가요?”
“예?”
질투.
도율의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못 한 단어였다.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는 건지, 도율은 한쪽 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더욱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려라고나 할까요. 클레어 씨가 어떤 사생활을 가지든 내가 간섭할 이유는 없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지켜야 할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까…….”
협회 지부장에게 호출당했던 일도 있었고, 방송에 나가기도 했으니. 적어도 남들 앞에 보이는 것 정도는 성실하게 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결국 클레어의 입장을 위한 것이었다.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율은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클레어가 활동을 중단하면 동생인 도은이 실직자 신세가 되긴 하겠지만, 그 능력이라면 금방 다른 소속을 구할 수 있을 테고.
어떤 책임감이 개입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행동의 원리는…….
‘역시 질투잖아.’
질투라고?
이 벽창호 같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자 클레어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핫.”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도율은 이미 그런 클레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처럼 차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그가 무언가에 혈안이 된 얼굴로 물었다.
“누구예요?”
“저기, 너무 가깝…….”
“대답 안 해요?”
도율이 클레어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보였지만, 도율은 그저 뒷걸음질 치는 클레어를 따라갔을 뿐이었다. 클레어가 벽을 뒤로하고 등을 기대자 도율이 따라붙었다.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나도 알아 둬야 이런 저런 일에 대처하기 용이할 것 같아서요.”
입으로는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이고 있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클레어 정도 되는 헌터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그런 신체적인 반응을 놓칠 리가 없었다.
벽으로 밀어붙여진 상황에서, 내려다 보는 도율을 올려다 보는 클레어가 생각했다.
‘…짜, 짜릿해.’
이대로 뇌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떨렸다. 머릿속에서부터 이어진 저릿함이 목덜미를 타고 등골까지 곤두서는 느낌.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질 것 같았다.
“대답.”
도율이 재촉하자 클레어가 목소리를 골랐다. 클레어는 이미 뇌내 마약의 노예였다.
“그 사람은.”
클레어가 그렇게 운을 떼자 도율이 일체의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 반응이 더욱 클레어의 등을 떠밀었다.
“우리가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비즈니스…….”
도율이 흐음, 하고 공감하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범인 후보들이 정해지고 있었다. 클레어와 비즈니스 관계라고 한다면, 역시 동료인 남자들 중 하나로 좁힐 수 있었다.
클레어에게 자기가 모르는 동료가 있을 리는 없으니, 예상대로 팀원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무렵, 도율은 서서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동료라면 등 뒤를 믿고 맡기는 사이일 테니까, 보다 깊은 감정이 싹튼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자신은 그걸 막을 만한 입장조차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알고자 했던 건 정말 앞으로의 행동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존재가 클레어의 관계 형성에 지장을 줘선 안 되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차분해진 도율에게, 클레어가 다시 한번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런데?”
“전 비즈니스 사이로만 남긴 싫다고 생각해서요.”
“…….”
빠드득.
도율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관계는 어차피 영원한 게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었고,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려 하니 생각과는 달랐다.
“왜 그러세요?”
클레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도율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클레어가 소리 죽여 웃었다.
“언제는 데이트를 하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바람을 맞히더라고요.”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이 정도 놀려 먹었으면 그만 들켜도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지만, 도율은 눈치채긴커녕 분개할 뿐이었다.
“쓰레기잖아요, 그 자식.”
“…….”
클레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율은 그것이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비난해서 기분이 불편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무안해진 도율이 헛기침을 하고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 사람이 못되게 굴면 말해요.”
“왜요? 혼내 주기라도 하게요?”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러자 클레어가 가볍게 주먹을 쥐고 입가를 가리며 쿡쿡 웃었다.
“아마 안 될걸요.”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혼내 준단 말인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었는데, 클레어의 그 말은 본의 아니게 도율을 자극했다.
“클레어 씨, 나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요.”
“그래요? 그 사람도 되게 셀 텐데.”
도율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는 게 무슨 기분인지 이해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누가 더 센지 붙어 보게 데려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바나도 아니고. 꼴사납게 암컷 앞에서 힘자랑을 하는 수컷처럼 굴기는 싫었다.
‘그 새끼…….’
도율의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인물, ‘아저씨’란 인간에 대한 평가가 점점 더 내려갔다.
데이트 도중에 같잖은 변명을 일삼아 여자를 바람맞히는 데다가, (나보다) 약한 주제에 여자 앞에서 센 척이나 하는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딱히, 정말 딱히 클레어가 진짜 사랑을 찾아 떠나는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그런 새끼는 안 되지.’
반드시 뜯어말린다.
일단 그렇게 정했다.
“술도 마셨는데.”
“뭐라고요?”
클레어의 발언에 도율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젯밤의 충격이 미처 가시기도 전이었다.
“…얼마나 마셨는데요?”
“필름 끊겨서 몰라요.”
“…….”
도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당하진 않았고요?”
“네, 뭐. 아무 일도 없던데요. 워낙 쑥맥이라.”
“방심하면 안 돼요.”
도율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남자는 다 늑대라고요. 그놈도 분명 기회만 되면 어떻게 해 보려 할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클레어 씨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도은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소리였다. 뻔한 말이긴 한데 어조까지 비슷한 걸 보면 두 사람이 정말 남매긴 하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그런 것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클레어가 소위 말하는… ‘들이대기’까지 했는데 손끝 하나 댄 적 없는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다 생각하니 조금 열받았다.
클레어가 작게 중얼거렸다.
“…지가 할 소린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클레어가 시치미를 뗐다.
* * *
길드 ‘로얄 로드’에서 청진명에게 배정해 준 개인 집무실.
상당한 크기와 좋은 시설로 채워진 공간이었지만,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청진명은 그 방을 팀원들 공용의 회의실 겸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평소에 시간이 남는 사람은 자유롭게 들러 낮잠을 자거나 게임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오지 않아도 자유였다.
그러나 오늘은 회의가 있는 날. 모든 팀원이 소집되어 한자리에 모였다.
“쟤 왜 저러냐?”
청진명이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클레어를 가리켰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잘 웃고 다니는 미인이라고 여기겠지만, 나름 클레어와 함께 한 시간이 쌓여 있는 이들은 평소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뭐 좋은 일 있었대?”
그러자 송민아가 대답했다.
“통금 생겼대.”
“뭐?”
그 대답에 청진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무슨 성인에 헌터가 통금이야?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야? 말이 되는 소릴…….”
“몰라. 바깥양반이 정했다잖아.”
송민아가 목소리를 죽이고 대답했다.
바깥양반이라고 한다면, 한때 클레어의 매니저로 활동했던 이도율을 일컬었다.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의처증이 심하구만.”
청진명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클레어의 동료들 중에서도, 클레어의 남편인 이도율이 실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청진명과 송민아만이 유이했다.
다른 사람들은 클레어가 남편에게 쥐여 산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입시더. 막내가 돈도 벌고 유명하고 이쁜데 와 남편한테 기가 죽어서 얌전히 말 듣고 다님까? 뭐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고서야.”
근처에 있던 고철민의 말이었다. 저렇게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다. 방송을 보면 이도율은 평범한 가정 주부 남편이었다.
고민하던 송민아가 대충 이유를 갖다 붙였다.
“잘생겼잖아.”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그게 말이 되냐는 소리를 하려던 고철민이 며칠 전 인터넷에서 봤던 게시글을 떠올렸다. 클레어의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방송을 직접 보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더러운 세상.”
고철민이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멀어졌다.
* * *
“…라는 일이 있었다면서?”
도은이 낄낄거리며 통화 상대에게 물었다.
클레어와 도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들은 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직후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전화기 너머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군지 아냐?]“글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백 퍼센트 과장이 더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클레어가 이야기에 허풍을 섞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전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도율의 반응에 도은은 다시금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그런데 이 인간, 진짜 모르는 건가?’
듣기엔 재밌는 이야기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로 없을 순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계속 쳇바퀴를 도는 것도 슬슬 견디기 어려운 시점이었다. 도은이 아닌 척 슬쩍 도율을 떠봤다.
“근데 생각나는 사람이 있긴 해.”
[누군데?]도은이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연기면 장차 레드 카펫을 밟아도 좋을 정도였다.
“오빠.”
[왜?]“아니, 너라고, 너. 네 얘기 아니야?”
[…….]수화기 너머로 침묵이 전해졌다. 전혀 생각도 안 해 봤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도율은 곧바로 부정했다.
[그건 아니지.]“왜 아닌데? 난 다 오빠 얘기 같던데. 아니야? 아닌 거 있어?”
[있지.]있다고?
클레어가 했던 얘기들은 모두 도율과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였다. 아닌 게 있을 리는 없었다. 클레어가 도율과 아닌 남자와 시간을 보낸 적은 없으니까.
도율이 까먹었거나 클레어가 지어낸 사건을 꺼낸 게 아닌 이상 그럴 수는…….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냐?]“…….”
도은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평생 그러고 살아라, 그냥.”
홧김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휴.”
전화를 끊자 잠시 후 그사이 도착해 있던 메시지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그 내용을 읽던 도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건 또?”
메시지에 첨부된 사이트 링크를 터치하자 어떤 사이트가 열렸다.
광고가 마구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제대로 된 사이트는 아니었다. 개미만 한 x 버튼을 찾아 연타하고 나자 겨우 제목이 보였다.
[‘부부의 세상’ 클레어 컴벨, 동물 학대 논란?!]도은이 이마를 문지르며 내뱉었다.
“아, 지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