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2
112화 밥 살게
“언니.”
주예린이 주하린의 눈빛을 읽어 내더니 곧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할 말 다 끝났으니까 데려가.”
“고마워.”
…얘네들 전음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잠깐 얘기 좀 가능할까?”
언니에게 허락을 받은 주하린이 내게 물었다.
어차피 우리도 할 이야기가 있었다. 주예린과도 한차례 했던 이야기지만, 대현 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동시에 길드의 관리자는 주하린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려면 주하린과 하는 것이 맞았다.
“커피 마셔?”
“네.”
“그럼 원내 카페로 가자. 거기 나쁘지 않아.”
나야 커피 맛 따윈 잘 모르니 아무래도 좋았다. 믹스 출신인지 원두 출신인지만 간신히 구분하는 정도였다.
도은이가 입원해 있을 때 커피는 금지였고, 클레어도 카페 커피보단 집에서 타 먹는 믹스커피를 선호하는 성격이어서 와 본 적이 없었다.
주하린이 말한 병원 내의 카페는 웬만한 상업 시설처럼 깔끔하고 잘 꾸며져 있었다. 병원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서인지 한결 단정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어머, 아가씨.”
카페 점원이 주하린을 알아본 건지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요즘 통 얼굴을 못 뵀네요. 물론 여기 오실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기야 하겠지만요.”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며 웃었다.
“일단 전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랑… 넌 뭐 마실래?”
“같은 걸로요.”
“두 잔 주세요.”
“네에.”
말꼬리를 늘이며 주문을 받은 카페 점원이 문득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쪽 분은 누구세요? 보아하니 길드 직원분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쪽은…….”
주하린이 나를 소개하려다가 조용해졌다.
남한테 소개하기 쉽지 않은 입장이긴 했다. 주예린을 호위하는 건 마무리된 참이었고, 같은 길드 소속의 부하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내가 속한 소속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밝힐 수도 없었으니까.
“그냥 아는 헌터.”
결국 그게 가장 적당한 대답이었다.
주하린의 대답을 들은 카페 직원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음 지었다, 시간이 걸려 나온 대답이 적당히 둘러댄 변명이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이.
“그럼 이제부터 알아 가는 사이?”
“…아, 아니야.”
“뭘 부끄러워하고 그러세요. 아가씨 나이 정도 됐으면 남자 하나둘 정도는 만나 볼 때 됐죠.”
“그런 거 아니라니깐…….”
주하린이 곤란해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가짜 부부도 연기하고 있는데, 이 정도로 당황할 숙맥이 아니다.
나, 제법 처세가 훌륭해졌을지도.
“주문하신 음료 두 잔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주하린이 커피를 받고 등을 돌리는데, 카페 점원이 발길을 붙잡았다.
“어머. 바로 가시나요? 안쪽에 자리 많은데요.”
그녀의 말대로, 카페 내에 비치된 공간엔 빈 좌석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하지만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남들에게 들려 줄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지나가다 듣는 사람이 있어서도 곤란했고.
이는 주하린 역시 알고 있었다.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런 이야기라서요.”
“어머, 어머.”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카페 점원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힘내요.”
“…….”
더는 부인하기에도 지친 건지, 주하린이 황급히 카페를 빠져나왔다.
* * *
“따라와.”
주하린이 앞장서서 안내한 곳은 병원 옥상 근처에 테라스처럼 조성된 휴식 공간이었다.
백화점 옥상에도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더라니. 대현 그룹은 높은 곳에 정원 가꾸는 걸 좋아하는 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백화점은 다른 손님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공간이었지만, 병원의 테라스는 임직원들만 출입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경고 문구와 잠금장치가 걸려 있었다.
“이거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요?”
“당연하지.”
주하린이 카드를 꺼내 근처에 갖다 대자 바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하린이 먼저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아찔한 높이에 겁을 먹을 만도 했지만, 주하린은 익숙하단 듯이 몸을 걸쳤다.
탁 트인 전경. 근처에 높은 건물도 달리 없었기에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은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주하린이 도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뒤따라 마셔 봤더니 확실히 그녀 말대로 나쁘지 않았다.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뭐부터 말하면 좋을까?”
주하린이 말을 골랐다.
“일단, 고마워.”
뭐가 말입니까?
그렇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주하린이 손을 꼽으며 지난 일을 나열했다.
“다소 억지스러운 부탁이었는데 들어준 것들 말이야. 언니를 호위해 달라는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그만두거나 중간에 때려치우지 않고 끝까지 참고 고집을 들어준 것도 고맙고.”
“돈 받고 하는 일이잖습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성질머리 더러운 사모님 성격 받아 주는 일이 고된 일이 아니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주하린이 지불하는 비용은 그 노고를 싹 잊게 할 정도로 시원시원했다.
이래서 대기업, 대기업 하는구먼.
하지만 주하린은 그런 내 대답에 다 안다는 듯이 슬쩍 웃었다.
“능청 떨기는, 몸값 맞춰서 준 건데. 다른 일을 해도 당연히 그 정도는 받잖아.”
“…….”
아니, 그런 적 없는데.
“그리고…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을 해 줬잖아.”
주하린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얼 말하는 건지 나도 알 수 있었다.
집행부.
대현 그룹의 소속이자 회장 주대현의 오른팔. 직속 명령을 하달받아 움직이는 다섯 칼날.
그중 하나는 주하린이 전투 불능으로 만들기는 했지만, 나머지 네 사람을 막아 낸 건 나 혼자의 힘이었다. 대현의 직속 특수부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게 하나같이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덕분에 그때는 나도, 조금은 본실력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적당한 결과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힘을 내지 못하도록 억누르지 않았더라면, 주변에 미치는 피해가 어마어마했을 테니까.
녀석들은 임무 완수에 눈이 돌아간 놈들이니, 주변 피해 따위를 신경 쓰지도 않았을 거고. 눈에 띄기 싫은 나로선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나도… 목숨을 빚졌네.”
그건 과찬이었다.
대현 그룹은 어떻게 해서든 후계자인 주하린을 살리려 했을 거다. 그를 위해 장손녀인 주예린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주하린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귀한 보석을 썼다면서?”
“세이렌의 눈물 말이군요.”
영감에게 받은 보석이었다.
영감이 언젠가 요긴하게 쓸 일이 있길 바란다며 준 거였다. 결국 요긴하게 사용한 건 매한가지니, 영감도 화를 내진 않을 거다.
“신경 쓰지 마시죠, 그냥 받은 거니까.”
“신경을 안 쓰려면 빚을 갚아야지.”
주하린은 마음이 무거운 건 사절이라며 물었다.
“부탁하고 싶은 거 있어?”
대현 그룹의 차기 후계자인 재벌가 손녀가 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입금한 금액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는 말이었다. 아찔할 정도의 돈을 받아 평생 돈 걱정 없이 펑펑 쓰며 살 수 있을지도.
하지만 내가 할 부탁은 달리 정해져 있었다.
“회장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가능하면 둘이서.”
“…….”
그런 내 대답에 주하린이 금방이라도 한숨을 쉴 것 같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할아범이나 다른 애들한테 전해 듣긴 했어, 네가 할아버님을 독대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야 얘기가 빠르긴 했다.
“…마음 바꿀 생각은 없지?”
“네.”
“이유는…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고?”
그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주하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친조부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마음이 불편한지 표정이 평탄치 않았다.
“거절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냥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 할아버님은, 뭐랄까. 교과서에 쓰인 이야기만 보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만나 보면… 조금 다르다고 느낄 거야.”
교과서와 미디어에서는 주대현을 거목(巨木)이자 국가와 혼란한 시대의 영웅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다. 각성자들이 아무리 평균 수명이 길다고는 해도.
그로부터 무언가 신성하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어떠한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반대로 해코지를 할 생각이었어도 소용이 없을 거고.”
진지하게 하는 말이었다.
주대현의 직속 부하 다섯 중 넷을 손쉽게 제압한 전적이 있는 내게 하는 말.
하지만 주대현이 사람을 부리는 건 본인보다 강한 자들을 고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집행부 개개인보다, 그들의 힘을 모두 합친 것보다, 주대현 개인의 힘이 강하다는 확신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말이었다.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정말 단순히 얘기만 나눠 보려는 거니까요.”
주하린이 그런 나를 못 미더운 눈길로 바라봤다.
“알지도 못하는 노인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 보겠다고 그러는 건지, 참…….”
주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잡념을 털어 내곤 내게 확언을 주었다.
“알겠어. 할아버님이 계신 곳까진 들여보내 줄게. 하지만 할아버님이 대화에 응할지 말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바로 쫓겨날 수도 있어.”
들으면 들을수록 고집불통 영감탱이라는 인상만 강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걱정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주대현. 그 작자 역시 나를 보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를 테니까.
* * *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후계자이자 손녀인 주하린의 확언이 있었으니, 이젠 정말 안심하고 기다릴 일만 남았겠지.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내가 다 마신 커피 컵을 구기며 인사를 남겼다. 하지만 주하린은 그런 내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남았는데.”
“네?”
“거스름돈, 남았다고.”
쥐어 짜낸 목소리였다.
“무슨 거스름돈이요?”
“…할아버님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건, 그룹 후계자인 내가 들어주는 부탁.”
“네……?”
주하린이 난간 위에 올린 팔로 턱을 괴고 시선을 피했다.
“그와 별도로, 언니의 목숨을 살려 줘서 고맙다는 동생의 보답을 하고 싶은데.”
“아하.”
그룹 차원의 공적인 일과 가정사에 가까운 사적인 일. 이번 일은 그 두 가지가 섞인 사건이었다.
두 가지 모두 마음의 빚이 남아 있어서 불편한 거라면, 보답도 두 번을 하는 게 맞다는 논리였다.
누구나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었지만, 본인이 그래야만 마음이 편한 거라면야. 보답을 받는 입장인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요. 뭘 또 주시겠습니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얼마나 짭짤한 보수를 받을지 궁금해졌다.
“…밥 살게.”
“네?”
돈 얘기가 아니었어?
실망한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던 건지. 주하린이 조금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결국 그녀가 덧붙였다.
“…술도.”
별로 달가운 대답은 아니었다.
“술은 좀…….”
“왜? 술 안 좋아해?”
“그런 건 아닌데, 얼마 전에 난처한 일이 좀 있었거든요.”
본인의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에겐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여자야?”
주하린이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이 여자, 직감이 엄청나다.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뭐어, 그래?”
주하린이 떨떠름하게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쩐지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일반인 여자 만나고 다니는구나.”
“…….”
각성자는 조금만 마력을 다룰 줄 알아도 취기를 날릴 수 있었으니, 합당한 추리였다.
S급 헌터가 술 내기를 하다가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했다는 얘기는 입이 찢어져도 못 한다. 그것도 당신 아카데미 시절 동기 중 수석으로 졸업한 여자가 그랬다는 사실은.
“근데 그거 알아? 각성자와 비각성자 커플은 헤어질 가능성이 다른 커플들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던데. 차별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 사람은 환경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한다는 말이지.”
주하린이 잘난 듯이 설명했다.
일반인 아닌데…….
“아무튼, 연락할게.”
“기대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주하린이 낯부끄럽다는 듯이 왈칵 소리쳤다.
“기, 기대는 하지 말라고!”
몰라서 하는 말이지.
나는 상당히 기다려졌다.
주대현과의 만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