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3
113화 그렇긴 하죠
“자, 이쪽이 최초 유포자.”
주예린이 테이블 위에 거꾸로 돌려 놓은 태블릿을 펜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처음 인터넷에 싸질러 놓은 글 보면 자기가 수의사라고 했는데, 다음 글에서 보면 개 키우는 미대생으로 바뀌어 있고. 또 그 다음 글에선 동물은 잘 모르지만 클레어 팬을 자처하는 30대 직장인이 되어 있더라고. 그런데 까 보니? 짜잔.”
주예린이 태블릿 위로 펜을 미끄러뜨리자 화면이 옆으로 넘어가며 다음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의 배경은 돼지우리같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이었다. 거기서 어떤 여자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어색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스스로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나이 삼십 줄 넘게 먹도록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백조 년이더라고요.”
주예린이 싱글벙글 웃으며 참 재밌는 사실이라는 듯이 밝혔다.
“이런 짓도 한두 번이 아니더라고요. 다른 연예인 기사나 유명 인플루언서 DM으로도 이상한 글 계속 쓰고. 이야, 1분마다 직업이 바뀌네. 캐치 미 이프 유 캔, 그건가?”
화면을 계속 넘기자 같은 인물이 썼다는 수많은 게시글과 댓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보낸 메시지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
이런 걸 다 어디서 구한 걸까. 적어도 공권력의 힘을 벗어나긴 한참 벗어났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와 클레어가 섬뜩함에 시선을 마주쳤다. 주예린이 이렇게까지 손을 쓸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클레어가 주예린에게 대꾸했다.
“…저기, 이건 좀 심한 게…….”
“뭘 모르는 소리. 원래 이런 애들은 적당히 하면 더 정도를 모르고 기어올라요.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못하게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놔야 한다고요.”
그간의 행적을 보면 선처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긴 했다.
지금까진 용케 정체를 잘 숨기고 수사망을 피하며 살아온 모양이었다. 만만한 사람이 아니면 건드리지 않는 신중함도 돋보였다.
실제로 주예린에 대해선 한마디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녀의 뒤엔 대현 그룹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설마 클레어를 건드렸다고 대현 그룹이 전력으로 대응할 줄은 몰랐겠지. 아무리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도 그룹이 나서는 건 다른 차원이 문제니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듯, 주예린이 화면을 조작했다. 다른 폴더로 넘어갔다.
“이건 개소리 확성기들.”
“개소리 확성기?”
“왜, 있잖아요. 저격 브이튜버니 뭐니 하는 애들.”
주예린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들 듣고 화제만 되겠다 싶으면 사실인 양 꾸며서 씨부리고는, 면피용으로 몇 마디 보험이나 깔아 놓으면 책임이 없어지는 줄 아는 머리통 빈 놈들 말이에요. 미디어 사회를 좀먹는 기생충 같은…….”
담겨 있는 분노의 질이 달랐다.
이건 분명 개인적인 원한이다.
“아무튼 그놈들이 올린 영상도 싹 다 신고 때려서 딱지 붙여 놨으니. 알아서 내리든 말든 하겠죠. 어차피 그걸로 수익 벌기는 글렀고. 알고리즘 타기도 틀려 먹었으니까.”
알고리즘이 뭐야?
“그 외에도 선 넘었다 싶은 애들은 싹 다 고소장 날려 뒀어요. 우체통에 고소장 날아온 거 보면 정신들 좀 차리겠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 걱정 말아요. 물론 싹 다 콩밥 먹일 생각인 건 아니니까. 그냥 충격 요법이에요, 반성 좀 하라고. 나중엔 다 취하해 줄 거예요.”
인터넷 세상 얘기가 아니라면 나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소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습니까?”
분명히 대현 그룹에 로펌도 하나 있긴 할 테니까, 그쪽에 시킨 건가?
“아는 검사가 한가하대서.”
“…살려 줘.”
며칠 안 본 사이 수척해진 임지훈이 SOS 사인을 보냈다.
분명 그게 검사의 본업은 아닐 텐데. 남는 시간을 쥐어짜서 하는 일일 테니 밤이라도 샌 듯한 몰골이 이해가 갔다.
“어떤가요?”
나와 클레어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최종 결정권을 가진 건 우리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건 클레어의 매니저인 도은이였다. 도은이가 엄숙하게 판결을 내렸다.
“일 처리가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드네요.”
“그렇죠?”
최종 결정권자의 승인이 떨어졌다.
“사소한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도은이와 주예린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크지 않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 부분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건 이렇게…….”
“아, 그렇군요. 그렇게 되면…….”
그렇게 둘이 고개를 박고 한참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기를 한창.
도은이가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씩 웃었다.
“주예린 씨와는 왠지 마음이 잘 맞을 것 같네요.”
“어머, 정말요? 사실 나도 그래요.”
“…….”
나로서는 딱히 권장하고 싶지 않은데.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건 핵무기의 발명에 버금갈 정도로 위험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왠지 이 둘이 손을 잡으면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적으로 돌릴 일이 없기만을 바라야 하는 존재가 탄생하기 직전이었다.
“이야. 더 손댈 것도 없어서 송구스럽네요. 정말 이렇게까지 해 주셔도 되겠어요? 저희 쪽에서 딱히 뭐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아아, 그건 정말 괜찮아요. 다른 사람 부탁 받아서 하는 거라.”
“다른 사람?”
도은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부탁을 하는 사람이라면, 클레어나 자신이 아는 누군가일 텐데. 대현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라면 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짚이는 사람이 없으니 모순을 느끼는 듯햇다.
바로 그 사람이 제 오빠인 줄도 모르고.
물론 정체를 밝히기도 싫었고, 구태여 생색을 내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사람이 왜 우릴 위해 부탁을?”
“글쎄요, 클레어 씨의 팬인가 보죠.”
“흐음…….”
도은이는 고민하다가, 결국 가볍게 털어 버리기로 했는지 내게 농담을 건넸다.
“들었지? 오빠, 긴장해야 되겠는데?”
“…….”
그게 난데 긴장하긴 뭘 긴장해.
* * *
“…사님, 이사님!”
“…어? 어.”
책상 위로 양손을 깍지 낀 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던 주하린이, 부하의 부름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부하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할 말을 마쳤다.
“보고는 이상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나가 봐.”
“예. 그럼 이만.”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지만, 주하린은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힐끔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간 부하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과 사담을 나눴다.
“어때?”
“아직도 엄청 날카로우셔.”
“역시 얼마 전 있던 납치 사건 때문이겠지?”
“그래. 대체 누가 사주한 건지 아직도 잡지 못했다니…….”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 중 가장 연차가 오래된 누군가가 박수를 짝짝 치며 주의를 돌렸다.
“자, 이럴 때일 수록 우리가 이사님을 뒷받침 해 드려야 하는 거야. 쓸데없는 데에 호기심 가지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철저히 할 것. 알지?”
“…그래야지.”
“일하자고, 일.”
길드원들이 흩어져 각자의 영역으로 나눠졌다.
한편 주하린은 집무실에서 여전히 같은 자세로 고뇌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건 당연히 언니인 주예린의 납치를 사주한 집단의 정체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현재 고민 중인 건…….
‘뭐 입고 가지?’
주하린은 길드 제복 외의 옷을 그다지 잘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 생도 시절엔 생도복을 주로 입었고. 졸업하자마자 그룹의 길드에 낙하산으로 꽂혀서 길드 제복을 입고 다녔으니. 심지어는 휴일에도 제복을 입고 다녔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이유가 충분했다. 그녀는 언제나 대현 그룹의 후계자인 동시에 길드의 간부인 존재로 활동했으니. 게다가 그 정도로 편하고 더러워지지 않도록 마법적 가공을 거친 양품이었다.
덕분에 사복을 딱히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이 나이 먹도록 한 번도.
‘…밑에 애들한텐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해.’
부하들이나 동료들은 주하린보다 당연히 경험도 많을 테니, 이런저런 조언을 받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룹과 길드 내에서의 이미지가 있기에 도저히 물어볼 생각 따윈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차선책. 그건 바로 언니인 주예린이었지만. 이미 시도하고 피를 본 이후였다.
-남자랑 둘이 볼 건데 뭐 입고 나가면 되냐고?
-…응.
-설마 그때도 길드 제복 입을 건 아니지?
-…아니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주예린이 주하린을 위아래로 흘기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도 시도라도 하는 게 어디냐.
-난 이런 거 잘 모르겠단 말이야.
주하린이 울상을 지었다.
사실 그녀가 스스로 해결해 보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범한 옷을 사서 입어 봤더니 자신이 봐도 영 아니다 싶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굼떠 보이는 차림만 늘어날 뿐이었다.
-나 못난인가 봐…….
그렇게 자조하는 주하린을, 주예린은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차피 펑퍼짐한 옷이나 입으면서 왜 이렇게 뚱뚱해 보이는 거지? 하는 생각이나 했겠지.
-…어떻게 알았어?
-진짜 이게 나한테 있어야 했는데…….
주예린이 주하린의 쇄골 아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고. 여기서 딱 기다려.
잠시 후 주예린이 몇 벌의 의상을 들고 돌아왔다. 주예린의 집에서 드레스룸으로 쓰는 방에 전신 거울이 있었다. 그 앞에 주하린을 세워 두고 옷을 몇 벌 대 보더니 대뜸 지시했다.
-입어 봐.
주예린이 구해 온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확실히 자신이 고른 옷보다 훨씬 어울리는 듯했다.
-어때?
-조금 꽉 끼는데…….
-꽉 끼어? 어디가?
주예린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물었다. 주하린이 시선을 피하며 말을 고쳤다.
-아니, 그냥 입을 만해…….
-흥.
그 외에 다른 옷들도 입어 봤다. 모두 주하린에게 잘 어울리는 옷들이었다.
-다 괜찮네.
팔짱을 끼고 감상하던 주예린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거 다 너 가져.
-어? 이걸 다?
-그래. 어차피 난 안 입거든. 질려서.
그런가?
주하린이 옷을 한 아름 안아 들고 의아해했다. 옷들은 모두 거의 새것처럼 빳빳했다. 자주 입지 않았던 옷들인 걸까?
-앗.
주하린은 발견했다.
옷에 택이 달려 있었다.
-왜?
-아니, 잘 입겠다고.
-싱겁긴.
주하린이 한 가지 더 물었다.
-언니, 마지막으로. 그……. 만나서는 어떻게 해야 돼?
그러자 주예린이 뻔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뭘 물어보니? 당연한 거 아니야? 그냥 자빠뜨리면 되잖아.
-아, 아니. 그건…….
머뭇거리는 주하린을 향해 주예린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아니면 이거 달고 어디 쓸 건데!
-꺅!
주예린이 손을 뻗었다. 주하린이 옷을 들고 도망쳤다. 아무리 그래도 각성자인 주하린의 몸놀림을 쫓아올 수는 없었다.
-어, 언니! 옷 고마워! 나 가 볼게!
-다신 오지 마라, 이년아!
그리하여 의상이 조달된 건 좋았지만.
모두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더 고민이었다. 그중에 뭐가 베스트일지, 스스로 생각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또한 겉모습은 준비가 됐다 하더라도. 막상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행동 강령을 몰랐다.
언니인 주예린은 그 부분에 있어선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 다른 조언을 구해야 하는데. 주하린은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한 사람 있었다.
동기 중 유일하게 결혼까지 성공한 사람이.
주하린이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화음이 들리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여전히 청아한 목소리였다.
그래, 얘라면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아, 난데. 저기…….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물어볼 거?]수화기 너머의 여성이 되묻자, 주하린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답했다. 부탁하는 처지에 뜸을 들여서야 안 되지.
“그… 남자랑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물어보려고.”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이어지다가 답이 들려왔다.
[그걸 왜 나한테……?]진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주하린이 답했다.
“너 유부녀잖아.”
[그…….]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당황한 듯하다가 마치 남의 일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긴 하죠?]누가 보면 아닌 줄 알겠네.
주하린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