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4
114화 상대가 누구죠?
“아! 여기야!”
금발의 여인이 카페 안에 들어서자 이미 도착해 있던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손을 흔들고 있는 건 대현 길드 특유의 제복 느낌이 나는 검은 코트를 걸친 여자였다. 그 키나 몸짓, 얼굴까지도 익숙했지만, 한 가지 생소한 점이 크게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리에 앉으며 클레어가 물었다.
“그 머리는?”
“아… 이거?”
주하린이 멋쩍게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끝을 휘감았다.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새빨갛지? 넌 처음 보는 거던가? 며칠 전부터 이 상태였는데.”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하린의 머리는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불꽃을 연상시키는 듯 뚜렷한 색깔이었다. 상당히 눈에 띄는 변화여서, 짚어 두지 않고 넘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생소한 모습에 클레어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단순한 기분 전환…치고는 파격적인데요.”
“뭐, 그렇지.”
주하린도 클레어와 같은 반응을 이미 몇 차례 겪어 봤다는 듯이 익숙한 태도로 대했다.
“흔한 일이잖아. 마력 때문에 머리색이 변하는 것 정도는.”
“그건 알지만…….”
그녀의 말대로, 마력을 통한 신체 변화 중 하나로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색이 변하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그중에서도 검은색은 가장 변화가 적은 색이었으나, 마력이 뛰어날수록 변화를 이겨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주하린 정도 되는 헌터라면 신체에 그러한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이상할 것 없었다.
“이제 와서 말인가요?”
주하린은 이미 몇 년이나 현역 헌터로 활동해 온 긴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변화는 보통 각성한 직후나 본격적으로 마력을 활용하기 시작할 즈음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서로의 모습을 알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그때의 주하린도 이렇게 눈에 띄는 붉은 머리색이 아니었다. 변화가 찾아왔더라면 분명 그 시기였을 텐데도.
클레어의 물음에 주하린은 그 질문 역시 예상했다는 듯 대답했다.
“관둔 거야, 염색.”
“염색?”
염색이라면.
지금이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이전엔 염색을 통해 숨기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왜 그런 일을?”
“그건…….”
주하린이 남에게 말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적잖은 노력을 들여서 머리를 검게 물들인 건 조금이라도 언니와 가까워지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눈에 띄는 차이가 있으면 피붙이라는 실감이 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자매 사이가 가까웠으니까.
염색을 그만두게 된 건 그런 경위에서였다.
“그냥 조금, 눈치 볼 사람이 없어져서.”
“눈치 볼 사람?”
“아무것도 아냐.”
주하린이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본론이라면…….”
“가르쳐 주기로 했잖아. 그…….”
주하린이 주위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죽였다. 그러고도 모자란지 손날을 세워 입가를 가렸다.
“연애하는 법.”
그렇게 말을 꺼내고, 주하린은 부끄럽다는 듯이 시선을 피하며 손으로 얼굴을 부쳤다.
덕분에 미처 보지 못한 건, 클레어의 반응 역시 주하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티팩트의 효과 덕분에 이야기를 엿들을 사람이 없는 걸 알면서도, 괜시리 주변을 살피게 됐다.
클레어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왜 하필 나한테…….”
솔직히 말하자면, 클레어 역시 남에게 연애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도움을 받으면 받았지.
남들을, 세상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있는 위장 부부 생활을 하고 있지만. 클레어는 그다지 손쉽게 남을 속여 넘길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렇게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면서 알지도 못하는 일에 그럴싸하게 큰소리를 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진심으로 조언을 구하고 있는 거라면 더더욱.
하지만 주하린은 클레어를 적격의 상대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내 주변에서 결혼까지 성공한 애는 결국 너밖에 없단 말이야.”
“결혼이라고… 크게 대단한 건…….”
“그건 경험자인 네 생각이고!”
“…아니, 정말 그런 게…….”
클레어는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저기, 뭐라고 할까……. 제 경우는 정말 특수한 경우라,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한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요. 나 말고도, 이런 거 물어볼 만한 사람을 따로 찾는 게…….”
클레어가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당신, 아카데미에서 친구 많지 않았나요?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요?”
“…….”
그 말대로였다.
주하린에겐 클레어와 달리 넓은 인맥이 있었다. 알고 지내는 이들이라면 사막의 모래알 개수만큼이나 많았다.
친하게 지내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말할 것도 아니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줄기는 해도, 편히 말할 수 있는 상대 정도는 있었다.
그래도 문제는.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라고……?”
주하린이 소스라치게 몸서리를 쳤다. 상상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안 돼, 안 돼. 놀림당하는 건 그렇다 쳐도, 혹시 소문이라도 새어 나가면 큰일 나는 거야. 잊었나 본데 나, 이래 봬도 대현 그룹 후계자야.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단순한 스캔들로는 안 끝난다고.”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미 한차례 경험해 본 클레어는 나름대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다는 걸 느꼈었다.
잠자코 수긍하던 클레어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내뱉었다.
“저는 괜찮고요?”
“당연히 괜찮지.”
당연히……?
주하린이 당당하게 대답하며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대답에 클레어가 오히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클레어가 멋쩍게 엄지손가락이 아래를 향하도록 뒤집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그 정도로 절 신뢰하고 있을 거라곤…….”
“그야 너, 친구 없잖아.”
“허?”
주하린의 대답에 클레어가 손을 내리고 눈을 껌뻑였다.
주하린은 컵을 든 손의 손가락으로 클레어를 가리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친구 없는 거 맞잖아. 아카데미 다닐 때도, 말 걸려는 애들은 되게 많았는데 다 쿨하게 개무시하고. 그때 너, 별명 뭐였는지 알아? 얼음…….”
“그, 그 얘기는 저번에도 들었어요.”
클레어가 주하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얼음 뭐시기 하는 부끄러운 별명이 붙어 있었단 사실을 전해 듣는 건 생에 한 번으로 족했다.
“아무튼, 나 틀린 말한 거 아니지?”
“…….”
뻔뻔하게 목을 축이는 주하린을 바라보며 클레어는 오기가 발동했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달라요. 저도 가까이 지내는 헌터쯤은 있다고요.”
허세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정착지가 없는 클레어가 처음으로 오래 몸담은 팀이 생겨, 그곳의 동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몇 개월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진 않겠지만, 클레어에게도 남의 비밀 이야기를 실수로 털어놓을 상대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반쯤 협박이 담긴 클레어의 말에, 주하린은 불안에 떨긴커녕 어쩐지 안심하는 듯한 반응을 내보였다.
“그래?”
그건 잘된 일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 잘 안 돼도 네 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응?”
“…….”
주하린의 호언장담에 클레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에 잠겼다.
사실 전화로 이미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은 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에 응한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거나, 재밌는 가십거리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한 가지 확인해 보지 않곤 못 배길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진짜지?”
“일단.”
클레어가 엄숙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주하린의 표정 역시 덩달아 무거워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아무런 조언도 못 해 드려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나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한다는 거, 알죠?”
“너 한국말 진짜 끝내주긴 하네.”
“시끄럽고요, 제 말 이해했죠?”
주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사심 하나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묻겠는데.”
그 말을 한 시점에서 이미 사심이 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클레어에겐 중요한 질문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경쟁자가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아주 골치 아픈 상대가.
황금빛 눈동자에 구릿빛 피부. 무용수처럼 쭉 뻗은 팔과 다리가 매력적인 데다가… 심지어 속을 알 수 없고 끝을 모를 정도로 적극적인 여자였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감당하기 벅찼다.
그런 상황에서 경쟁자가 더 느는 건 사양이었다.
주하린은, 길드를 이끌고 있는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있어서인지 남자답고 괄괄한 편이었는데. 최근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조금은 어리광이 섞인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 갭이 위험했다.
‘게다가…….’
클레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이 느껴졌다.
‘이건 진짜로 위험해.’
“……?”
주하린이 왜 말을 하다 마느냐고 고개를 기울였다.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클레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상대가 누구죠?”
대답을 듣기 위해 테이블 위로 몸이 쏠렸다.
* * *
“한 가지, 물어도 되나?”
앞서 걷던 백발의 노인이 물었다.
내가 지금 와 있는 곳은 대현의 심장부였다. 집행부가 직접 안내한 장소였다.
그곳이 대현 그룹의 본사는 아니었다. 온갖 계열사를 향한 크고 작은 의사 결정이 정해지는 곳이고, 이 나라를 넘어서 세계 경제의 일부를 좌지우지하는 선택이 오고 가는 곳이긴 했지만.
실제로 대현 그룹이 지금의 위상을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이곳에 칩거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다.
“뭡니까?”
“왜 회장님을 뵈려는 거지?”
“…….”
노인이 급히 덧붙였다.
“아, 오해하진 말게. 여기까지 와서 방해할 생각은 아니니까.”
물론 그러고 싶어도 불가능하겠지만.
그리 말하며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만 궁금해서 말이네. 얘기를 들어 보니, 자네는 처음 집행부와 만났을 때부터 회장님을 뵙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듯한데……. 그게 무슨 이유에서일지, 짐작 가는 부분이 없어서 말일세.”
내가 주대현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
그건 당사자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였다.
“미안하지만 비밀입니다.”
“그런가?”
노인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일 없이 간단히 포기했다.
긴 마룻바닥을 걸은 끝에 마침내, 복잡할 정도로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장지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얇은 살이 기적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손가락만 대도 구멍이 날 것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웬만한 헌터가 전력으로 일격을 날린다 해도 뚫을 수 없는 문.
나라면 힘으로 열어 버릴 수 있었지만.
‘그건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니지.’
지금 난 딱히 몰래 쳐들어온 상황이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손님으로 방문한 처지니까.
집행부 노인이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회장님, 말씀하신 객인을 데려왔습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고. 잠시 기다리자 장지문이 스르륵 열렸다.
“가게.”
노인은 함께 들어가지 않는 건지. 문 앞에 서서 내가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둘만 보고 싶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둘만 보게 해 준다는 건. 회장인 주대현이 간단히 당할 인물이 아니란 걸 뜻했다.
‘넓군.’
문 너머로 펼쳐진 건 단순한 방 하나 크기의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 자체가 또 하나의 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덕분에 좀 더 걸어야 했다.
적막한 공간 속.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가위질 소리?’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어 나가다 모퉁이를 돌자, 그곳엔 분재를 다듬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다.
‘저게…….’
대현 그룹의 회장.
살아 있는 전설.
‘주대현.’
그 역시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완전히 돌리지 않고 맞이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이 찾아왔군.”
그럴 줄은 알았지만.
환대받긴 그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