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솔직히 말해
“그래서 묻겠는데.”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알고 있겠지? 해결할 방법.”
내가 테이블 위를 두드리자, 주대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주대현은 나보다 훨씬 전부터 이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세계적인 대기업 대현 그룹의 회장이기까지 했다.
그런 주대현이 오랜 세월 동안, 그 정도 힘과 권력을 가지고 이 저주를 해제할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주대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소용없다.”
“…….”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다. 가능했다면 내가 지금까지 손 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으름장을 두는 주대현에게 내가 물었다.
“방법이 있긴 있다는 거네?”
“…….”
내 물음에 주대현이 노려봤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이군.”
질렸다는 말투였다.
주대현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다른 누구의 이해도 구하지 못한 채로 홀로 고독하게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찾았을 테니.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대로인 상황에 환멸을 느낄 법도 했다.
나 역시 홀로 다른 세상에 동떨어져 있을 땐 모든 걸 포기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인간이 차원을 넘어 다른 세상을 오가는 일이 있다면, 찢어진 영혼을 되돌리는 일도 가능할 테니까.
“사도라는 놈들이 그 열쇠인 건가?”
그러자 주대현이 눈을 크게 뜨고 응시했다.
“네놈, 그걸 어디서 들었지?”
“글쎄.”
사도라는 존재에 대한 언급 역시, ‘망량’에게 들었던 내용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망량이라는 녀석 역시 인간은 아니었다. 아직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까지 믿어도 될지 확실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대응은 보류하고 있었다. 지금까진 손을 쓸 이유가 없었지만.
‘교차검증이 가능하다면 얘기는 다르지.’
망량과 주대현의 이야기.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한다면 믿을 만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망량과 달리, 주대현은 사도라는 자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댈 생각을 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의외군.’
성격으로 따지자면, 망량은 유들유들해 보이는 편이었고 주대현이 보다 호전적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주대현 쪽에서 싸움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오히려 이쪽이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강한 건가? 사도라는 자들이.”
고작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마음이 꺾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주대현 역시 강함으로 치자면 깊이를 알기 어려운 강자였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 왜지?”
“상성이다.”
주대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각성자가 뭐라고 생각하나?”
“각성자?”
주대현의 눈빛은 진지했다. 선문답을 하기 위한 물음도 아니었다.
정작 내가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갑자기 각성자가 뭐냐고 물어봐도…….’
나는 팔짱을 끼고 고뇌에 빠졌다.
각성자란 건 사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존재였다. 교과서에서 ‘역사’로 아웃브레이크에 대해 배웠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잠재운 영웅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 영웅 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 있는 주대현이었고.
지금처럼 각성자와 마석, 그리고 관련 사업이 익숙해진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라 온 내게. 그 질문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모르겠는데. 침공에 대항한 영웅? 그 후예들?”
교과서대로의 대답을 내뱉었다. 자기 얘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주대현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냉정했다.
“각성자가 되고 나면 단계별로 나눠진 난이도의 던전을 통해 순차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 그런데 이상하지 않나?”
“뭐가?”
“만약 이게 ‘침공’이라면, 약자를 위한 밑거름을 안배할 이유가 어디에 있지?”
“…….”
주대현의 말대로. 막 각성한 각성자는 마력도, 전투 기술도 미흡하다. 그런 그들이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것이 E등급 이하의 약소 던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던전의 등급은 모두 골고루 나뉘어 분포되어 있다.
단순히 사람이 그렇게 정리해 놓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생성된 던전들이 그렇게 균일하게 나뉘어 짜 맞춰져 있는 것도 지나치게 정갈한 느낌이 들었다.
“…전쟁 나가는데 골라 내보낼 수 있나. 잡졸도 있고 장군도 있는 거지.”
“마석은 또 어떻지?”
주대현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마석을 통해 인류 사회는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더 효율적인 에너지원. 덕분에 더는 자연을 해치거나 땅속을 헤집으면서 에너지를 구하지 않아도 되게 됐지. 자연스레 모든 기술이 마석을 분석하고 사용하는 부분에 집약됐다.”
그것도 교과서에 쓰여 있는 내용대로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질서에 가장 큰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또한 대현 그룹이었다.
“더 많은 마석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각성자가 필요해졌고. 더 질 좋은 마석을 구하기 위해 각성자들이 등급을 끌어올렸지.”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그게 뭐?”
“마지막으로.”
주대현이 물었다.
“인간이 뭘 먹지?”
“뭘 먹냐니. 그야 밥이나 고기…….”
“그건 이 세상에서 난 것들이다. 마계에 있는 자들은 뭘 먹을 것 같나?”
“걔들도 거기 있는 걸 먹겠지.”
거기까지 말하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일종의 먹이 사슬이었다.
지구의 생태계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를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마계에서도 각자의 생물들이 먹고 먹히는 관계가 있을 거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선 존재들이라면.
“사도들이 먹는 건 마력이다.”
거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대현이 했던 이야기가 뭘 위한 밑거름이었는지도.
“이 세상은, 사도란 자들에게 먹이를 던져 주기 위한 거대한 양식장이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런 이야기는 교과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봐, 골방에 틀어박혀서 공상 과학 소설이라도 집필하고 있던 거야?”
내가 핀잔을 줬지만 주대현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태도였다.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주대현이 뭔가를 잘못 알았을 가능성은 낮았다.
가장 강력한 각성자 중 한 명인 동시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살았으며, 돈과 권력이 있는 만큼 지식과 정보 역시 충분할 테니까.
나는 이야기에 반박 거리를 찾을 생각은 관두고 물었다.
“상성이라는 건?”
“말 그대로다. 사도들은 마에서 태어나 마를 먹어 치우는 자들. 마력을 지배하는 것은 타고난 능력이나 마찬가지지.”
“그 말은.”
주대현의 입에서 냉혹한 평가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 하더라도, 사도들의 앞에선 단순히 커다란 먹잇감에 불과하지.”
골치 아픈 이야기긴 했다.
인간이란 결국 맨몸으론 야생 동물 하나 못 이기는 나약한 존재다. 도구를 쓴다 하더라도 마력을 쓰게 된 각성자만큼은 아니었다.
사도란 놈들이 단순히 총을 겨눈다고 이길 수 있는 놈들일까? 그럴 것 같지도 않으니…….
“그래서 실현 불가능한 방법이라 한 건가?”
“그래.”
주대현이 이제야 이해했냐는 듯 무거운 눈빛을 보냈다.
“이제 알았겠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과연.’
주대현의 입장에서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느껴질 만도 했다. 각성자라는 것 자체가 일종의 함정이었던 셈이니.
하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진 않았겠지? 알고 있는 게 있으면 최대한 알려 달라고.”
주대현이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만 보내진 않았을 거다.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단서를 끌어모았을 거다.
내가 요구하는 건 바로 그거였다.
그러자 주대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지금까지의 얘기를 뭘로 들은 거냐?”
그렇지, 참.
주대현에게 필요한 건 지금까지의 발버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사실이었다.
집행부나 다른 녀석들이 보고하지 않은 건가? 나에 대해 조사했다는데, 단순한 조사로는 알 수 없었던 사실인 걸까.
어쨌거나. 나는 주대현을 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봐.”
“…….”
“내가 신기한 거 하나 보여 줄까.”
그런 내 말에 주대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팔짱을 꼈다.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이.
“놀라 까무러치지 말라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 * *
“누구죠?”
“으음…….”
클레어의 물음에 주하린이 고민에 빠졌다.
도움을 받고자 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 뻔뻔할지도 모르지만.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대현 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무게라든가, 사회에 불러올 파장이라든가. 그런 이야기를 떠나서.
“…미안. 상대는 밝힐 수 없어.”
“혹시.”
클레어가 집요하게 캐물었다.
“임자 있는 남자라도 넘보는 거 아닌가요?”
클레어의 물음에 주하린이 황당하다는 듯 부인했다.
“뭐어? 너,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설마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요.”
주하린은 분명히 재벌 가문의 일원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으레 표현되곤 하는 막무가내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건 같은 아카데미를 나온 클레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차할 때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이 나라에 대현 그룹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을, 이미 한 차례 도움을 받는 걸 통해 깨달은 바 있는 그녀였다.
“임자 하니 말인데.”
주하린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미 만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기도.”
“…그래요?”
“그것도 일반인인가 봐.”
“일반인?”
클레어의 머릿속에서 점점 도율의 실루엣이 멀어졌다.
‘괜한 걱정이었나?’
일반인을 만나고 다니는 헌터. 그게 도율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엮이는 여자가 딸려 올 때는 있어도 언제나 거리감을 유지하고. 일반인과 어울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면.
주하린에게 짝이 생기는 건 여러모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거 큰일이네요. 그런 거라면 뺏기기 전에 손을 써야죠.”
“너 갑자기 말이 바뀐다?”
“…아무튼. 물어볼 게 있는 거 아니었나요?”
주하린이 미심쩍게 바라봤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어쨌거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우선 내가 밥 산다고 하긴 했는데, 정말 밥만 먹고 헤어질 순 없잖아. 일단 영화라도 보자고 꼬셔 볼까 하는데…….”
“영화…요?”
클레어가 별세상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생소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너 영화 본 적 없어?”
“…없어요.”
“뭐어? 그게 말이 돼?”
주하린이 재차 물었다.
“그럼 보드게임 카페는? 방 탈출은? 놀이공원은?”
“…….”
주하린의 물음에 클레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다 경험이 있는 척을 해야 했나. 아니, 결국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꼬리가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답이 없는 클레어를 바라보며 주하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 솔직히 말해. 돈 주고 결혼했지?”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대답하려던 클레어는.
‘…어쩌면 비슷할지도.’
그런 생각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