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사랑했다
“네놈, 설마 그건…….”
주대현이 모처럼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공內功.
이쪽 세상에서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내가, 저쪽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름이나 출처 따위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게 마력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힘이라는 점이었다.
“이거라면 그 사도라는 놈들에게도 먹히겠지.”
“…….”
주대현이 턱을 감싸쥐고 고뇌에 빠졌다. 가늠을 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가능성은 보이는군.”
“가능성?”
확신이 아니라?
사도라는 자들이 마를 먹어 치우는 지배자들이라고 한다면, 내공을 가진 나는 놈들의 먹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내공과 마력은 서로 반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극인 존재.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불확정 요소는 뭔데?”
내가 그리 묻자 주대현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네놈의 실력이다.”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네놈의 실력 그 자체가 사도들의 것에 미치지 못할 경우, 모처럼의 이점을 살리지도 못하고 당해 버릴 테니까 말이다.”
“…….”
이 영감탱이가 진짜.
“내 실력은 의심할 것 없어.”
“과연 그럴지, 말로는 못 할 말이 없다.”
단순한 말 하나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주대현이 완고하게 눈꺼풀을 닫았다.
“전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다. 한 번 실패하면 두 번의 기회는 없겠지. 그런 중요한 일에 말뿐인 실력을 믿어 줄 것 같나?”
대현 그룹이 부리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인 집행부. 그들 중 넷을 내가 쓰러뜨렸다. 심지어 세 명은 동시에 상대하기까지 했다.
그런 보고가 누락됐을 리는 없다. 실패가 부끄러워 거짓을 고할 놈들이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대현은 아직 뭔가를 더 보여 주길 원하는 건가. 사도란 자들이 그 이상의 실력이 있어야만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란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길 원한다면.
“보여 줄까?”
숨길 것도 없었다.
탁.
주대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만 마무리하지.”
“뭐?”
“다른 일정이 있다.”
혼자 틀어박혀 있는 주제에 일정은 무슨 놈의 일정.
제멋대로구만, 이 영감탱이.
노려 보는 내 시선에 개의치 않고 주대현이 자리를 정리했다. 손짓 몇 번에 다관과 잔들이 치워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그래.”
일방적인 통보에 별로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사양할 때 얌전히 떠나는 것도 손님의 예의였다.
맨몸으로 왔으니 떠날 때도 챙길 건 달리 없었다. 주대현의 말대로 이만 돌아가려는 찰나, 그의 목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다음 만남은 조만간 전령을 보내지.”
“…….”
“들어가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다음이라.’
일단은 이 괴팍한 노인네한테 기회를 받았다고 봐도 무방한 셈이었다.
* * *
“진짜 괜찮대도 그러네.”
“안 돼.”
도은이가 축 처져서 불쌍한 척을 해도, 클레어는 단호하게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뿐이었다.
도은이와 클레어와 나.
우리 세 사람이 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서울 미래 병원. 대현 그룹 소속의 종합 병원으로, 비교적 최근에는 주예린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방문했었고. 그보다 전에는 도은이가 오랫동안 신세를 진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가 병원에 방문한 건 도은이의 정기 검진 때문이었다.
메두사의 마력으로 인한 석화병. 그 후유증이 남지는 않았는지 검사를 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건강 검진까지 하는 날이었다.
“사람 진짜 많네.”
해가 바뀌기 직전이라 그런지 병원엔 검진을 위해 방문한 손님들이 가득했다. 그 광경을 본 도은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은이가 클레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러는 언니도 철저히 받으라고, 검사.”
“알았어.”
검사를 받는 건 클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별달리 건강에 적신호가 온 적은 없지만, 헌터라면 정기적으로 신체 검사를 받고 그 결과를 협회에 제출해야만 했다. 지키지 않으면 라이센스가 정지된다나.
헌터에겐 신체적 건강 상태 외에도 정신 건강이나 마력과 관련된 수치들을 돌볼 의무가 있었다.
‘한가한 건 나 하나뿐인가.’
이럴 거면 왜 따라왔나 싶긴 했지만. 도은이가 끌고 나와서 어쩔 수 없었다.
“오빠는 배달 담당이야. 내려가서 커피나 사 와.”
“…….”
도은이나 클레어는 검사를 위해 상시 대기하고 있어야 했으니. 잔심부름을 다녀올 사람은 내가 딱이었다.
“이도은 님, 이도은 님 계신가요?”
“아, 내 차례다. 나 갔다 올 테니까 사 와!”
“오냐.”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클레어 역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려 했다.
“그럼 저도…….”
“앉아 있어요.”
“하지만.”
“검사받을 거 있잖아요.”
클레어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다시 의자 위에 앉혀 놓았다.
“쟤한테는 검사 받으라고 해 놓고 자기만 쏙 빼먹으면 무슨 소리 들으려고요? 그냥 나 혼자 다녀올게요. 늘 마시던 거면 되죠?”
“그럼 부탁할게요.”
이 병원에 딸려 있는 카페라면 얼마 전에 가 본 적이 있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으니, 위치라면 기억하고 있었다.
딸랑.
카페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카운터에 기대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주문하시겠어요?”
점원이 내게 물었지만, 그보다는 카운터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눈에 밟혔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통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디서 봤는데…….’
분명히 어디서 만났다. 하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로 중요하거나 깊은 사이는 또 아니었다. 그런 애매한 누군가였다.
“아.”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정민성 씨.”
정민성이었다.
“응?”
카운터 직원에게 눈이 팔려 있던 정민성이 나를 돌아봤다.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리며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입을 벌렸다.
“당신은…….”
정민성.
A급 헌터였던가. 클레어의 매니저로 활동하던 동안 몇 번 마주쳤던 헌터였다.
솔직히 헌터인지 아닌지보다는, 클레어를 향한 구애가 기억에 남았다. 반칙에 가까운 짓을 한 나로서는 미안함을 느낄 만한 상대였지만.
-그 새끼 언니 없을 땐 나한테도 그 지랄 함.
…딱히 정말로 미안하진 않았다.
“그때 그 매니저였던… 이도율 씨.”
“…오랜만입니다.”
“아, 예.”
피차 반갑게 맞이할 사이는 아니었다.
‘주문이나 하자.’
카운터 앞에 서서 세 잔의 커피를 주문하려는 찰나. 정민성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제안했다.
“모처럼인데 커피 정도는 제가 사도록 하죠.”
“예……?”
그쪽이 내 커피를 왜 삽니까?
그런 시선을 담아 쳐다봤지만, 정민성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정민성이 살피고 있는 건 카페 직원의 눈치였다.
‘아하.’
이 녀석, 이번엔 카페 여직원이냐.
내 손엔 클레어가 쥐여 준 카드가 있었지만, 사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잠시 기다리시면 진동벨로 알려 드릴게요.”
여직원이 음료 제조에 들어가자 정민성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잠깐 얘기 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정민성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정민성과 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후.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때 이후로 처음이죠?”
“네, 아마도.”
정민성이 나를 향해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설마 당신이 그 클레어 씨의 남편이었을 줄이야. 방송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땐 꿈에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그건 미안합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본의 아니게 정민성을 속였던 것이나 다름 없었다.
속였다고 하기엔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뇨, 괜찮습니다. 이젠 다 잊었거든요.”
정민성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깍지 낀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나는 급격히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그녀를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둥, 눈물을 보이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둥의 말이라도 들을 것만 같았다.
후자라면 이미 전과가 있기도 하고.
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 화제는… 그래, 정민성이 눈치 보던 여자에 대한 것이었다.
“카페 점원분이랑은 친합니까?”
“그, 그래 보입니까?”
정민성이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었다.
난 분명히 질문을 한 건데.
정민성이 커피를 내리고 있는 카페 직원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그는 묻지도 않은 과거 얘기를 꺼냈다.
“때는 바야흐로 한 달 전입니다. 헌터로서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나날을 이어 가던 저는, 그만 사소한 부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말았던 겁니다.”
“아, 예…….”
“거기서 만났습니다. 메마른 나의 인생에 단비를 내려 줄 작은 천사를.”
정민성의 머릿속에선 이미 한 편의 로맨스 코미디 영화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다.
자기를 차갑고 냉철한 성격에 중증의 워커홀릭 헌터로 그려 내고 있었고. 카페 점원은 그와 대비되는 햇살 같은 성격의 강아지 타입의 미녀였다. 우연한 만남에 점점 마음을 열게 되는 헌터가…….
‘후자는 얼추 맞는 것 같은데.’
전자는 영 꽝이었다.
“저 가지런한 에이프런을 보십시오. 몸과 마음에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냥 유니폼이잖아.
어처구니없지만 듣기엔 지루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민성은 헌터보다는 시인에 소질이 있는 게 아닐까. 미사여구를 붙이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부우웅.
그때 진동벨이 가볍게 울렸다.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한 커피를 받으러 가자, 정민성 역시 따라 나왔다.
“그럼 저도 바빠서 이만.”
카페에 너무 오래 죽치고 있으면 날백수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으니 조절하는 모양이다.
“또 오세요.”
“…네. 꼭 또 봅시다, 미애 씨.”
정민성은 으레 하는 말도 가볍게 받아들이는 법이 없었다.
‘…가만.’
미애 씨?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싱글생글하게 웃는 얼굴로 카운터를 보거나 커피를 만들거나 하는 여직원의 얼굴을 보다가 머릿속을 번개 같이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나야 우리 미애가 최고지, 당연히.
“응? 왜 그럽니까? 안 갑니까?”
정민성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기억 속 목소리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아라, 받아.
달칵.
전화 통화가 연결되었다.
[뭐냐, 갑자기? 나 바쁘…….]“진호야. 너 맞벌이랬지. 제수씨가 하시는 일이 뭐라고?”
[…어, 그래. 빠른 본론 고맙다.]진호가 어깨와 턱 사이로 전화를 끼우는 소리가 들렸다. 직후 녀석이 대답했다.
[바리스타, 쉽게 말해서 커피 타는 사람이지. 갑자기 그건 왜?]“일하는 곳은?”
[바리스타가 카페에서 일하지, 어디서 일하냐?]“위치가 어디냐고.”
[서울 미래 병원이었나? 거기 1층인가 지하인가에 카페 하나 있거든. 근데 층수는 헷갈리네. 1층이나 지하나 다 출구 뚫려 있는데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내가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이 정도로 증거가 모였는데도 다른 사람이길 바랄 순 없었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 왜? 너도 집에서 외조만 할라니까 눈치 보여? 얌마. 커피 타는 게 쉬워 보이지만 다 기술이…….]“고맙다. 끊을게.”
[야! 이 새끼, 지 할 말만 하고…….]전화를 끊고 다시 미애 씨를 자세히 살펴보니.
‘약혼 반지…….’
왼손 약지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확실히 미애 씨가 잘 웃고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카페 종업원으로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것에 불과했고. 손가락에 반지까지 끼고 있으니 지킬 건 모두 지키고 있었다.
“민성아…….”
“……?”
내 부름에 정민성이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반말입니까? 물론 내가 이도율 씨보단 나이가 적겠지만, 그렇게 허락도 없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미애 씨를 가리켰다.
그러자 정민성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왜, 왜 그러죠?”
“손가락을 자세히 봐라.”
“손가락은 왜…….”
정민성이 말을 하다 말고 숨을 멈췄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민성은 자기 손가락 위를 하나씩 짚으며 반지가 껴진 손가락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래도 왼손 약지에 결혼 반지가 껴져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민성이 입에 주먹을 물었다.
“사랑했다…….”
그런 놈을 내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이 화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