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18
118화 앞으로도
“…가라.”
“예…….”
정민성이 축 처진 어깨를 이끌고 멀어졌다.
분위기를 봐선 소주라도 한잔 사 주면서 신세 한탄이라도 들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나도 할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부디 좋은 여자와 인연이 있길.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기도가 전부였다.
정민성을 배웅하고, 다시 검진 센터가 있는 로비까지 올라오자 그새 짧은 검사 하나를 마치고 돌아온 도은이가 면박을 줬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나는 커피를 나눠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불행한 사고가 있었어.”
“웬 사고?”
“아래층에서 정민성을 만났는데…….”
도은이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됐어. 안 들을래.”
“그래?”
“어. 그 새낀 소식만 들어도 재수가 옴 붙어.”
확실히.
걔가 재수가 없기는 없더라.
도은이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앞니로 빨대를 질겅질겅 씹었다. 플라스틱 빨대가 납작하게 눌려 휘파람 같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샜다.
“클레어 컴벨 씨, 오염도 검진 결과 나왔습니다. 보호자와 함께 담당의 진찰실로 이동해 주세요.”
“보호자도 함께?”
헌터 클레어 컴벨의 보호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매니저인 도은이였다.
하지만 도은이도 다음 검진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람이 줄어드는 속도를 보니 차례가 머지 않았다.
“오빠가 같이 가.”
“내가?”
도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땐 매니저 일도 좀 해 봤잖아. 보고하는 법 안 까먹었지?”
“어.”
“그리고 뭐, 명색이 배우자이기도 하니까.”
그건 참 쓸데없는 사족이었다.
“아무튼. 가라, 오빠몬!”
“…알았다.”
애초에 굳이 검사를 받아야 할 필요도 없는 내가 병원까지 따라온 이유가 이런 잡다한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이동하던 클레어의 곁에 가까이 붙으니 그녀가 살짝 놀란 듯 곁눈질했다.
“당신이 함께 가나요?”
“왜, 못 미더우십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간호사로 보이는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진찰실에 도착하자,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 의사가 앉아 있었다.
“아, 클레어 씨? 반갑습니다. 담당의 최인혁입니다. 검진 결과 소견 들으러 오셨죠?”
“네.”
“그런데 옆에 분은…….”
“저는…….”
미처 대답하기 전 의사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치고 자답했다.
“아! 남편분이시군요!”
“…….”
의사라면 분명히 방송 같은 건 챙겨 볼 틈도 없이 바쁠 텐데, 이젠 이런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됐나.
“방송은 참 재밌게……. 아, 참. 이런 얘길 하려고 오신 게 아니죠. 바쁘실 테니 바로 결과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바쁜 건 아니지만. 방송 얘기 듣는 건 낯부끄러워서 도저히 견딜 만한 일이 아니었다.
클레어도 마찬가지인지 내심 안도하는 눈치였다.
‘오염도라.’
이번 검진 항목은 오염도.
헌터들이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는 항목 중 하나였다.
던전에 출입하는 헌터들은 그곳에서 외부의 마력에 장시간 노출되기 때문에, 그 몸에 점점 자신의 것이 아닌 마력이 뒤섞인다.
심지어 격한 전투를 벌이느라 마력을 많이 소모할수록. 큰 상처를 입을수록 더 많은 수치의 마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 양이 적다면 시간이 흘러 자신이 가진 마력으로 중화할 수 있지만,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않고 계속해서 헌터로서 활동을 이어나갈 경우. 몸에 계속해서 누적된 외부의 마력이 쌓이고 쌓여서.
임계점을 넘을 시, 더는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는 건 즉.
‘헌터 인생 끝장이지.’
마력이 정순하지 않다는 것 곧 실력의 퇴화를 의미했다. 게다가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무리를 하면 일상생활에마저 무리가 올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 오염도 관리에 실패한 헌터는 얌전히 은퇴하는 게 본인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헌터들이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항목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체내의 마력을 분석해 얼마나 순수한지, 아니면 오염되어 있는지. 그 비율을 알아내기 위한 검진이었다.
‘헌데…….’
나는 클레어를 몰래 바라봤다.
‘무리 좀 했다고 했지.’
클레어는 도은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페이스를 조절하지 않고 격한 활동을 지속했던 전적이 있다. 그 당시엔 주하린도 걱정할 정도였다.
집에 오염도를 관리하는 기계를 들여 놓긴 했지만, 그런 걸로 말끔히 해소가 된다면 검진을 받을 필요도 없겠지.
과연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긴장된 채로 담당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담당의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상 범위네요.”
“네……?”
담당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숫자와 그래프가 적힌 서류를 보여 줬다.
담당의는 마주 앉은 우리에게 글자가 똑바로 보이도록 서류를 돌리고는 펜으로 몇몇 부분을 가리키며 동그라미를 쳤다.
“수치 아주 정상적입니다. 외부 마력 유입이 동 등급 헌터들 대비 현저히 낮고요. 오히려 활동이 왕성하지 않은 신입 헌터들에 비견될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아주 양호하죠.”
“어…….”
예상외의 결과였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아직 괜찮은 정도가 최선의 대답일 줄 알았더니. 그걸 뛰어넘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라니.
“어떻게?”
“물론 클레어 씨가 헌터 활동을 왕성하게 하시는 편이겠지만. 간혹 이런 헌터분들이 계십니다. 워낙 마력이 진해서 외부 마력이 잘 침투하지 못하는 거죠.”
한마디로 말해서.
재능빨이란 소리였다.
클레어가 나를 향해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이 정도 된다는 듯이 뻐기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왠지 심술이 났지만, 그래도.
“…뭐, 건강하다면 다행이고요.”
떨떠름함을 숨기지 못한 내게 담당의가 짓궂게 미소 지었다.
“죄송합니다. 사실대로 전하는 것이 의사의 소명이라서요.”
“아뇨, 죄송할 이유는…….”
“안 그래도 신혼인 두 분이시니, 가능하면 헌터 일은 쉬면서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으신 거겠죠.”
“…….”
“다 이해합니다. 뜨거울 때죠.”
그런 거 아니야, 이 사람아.
* * *
“시스템 올 그린!”
검사를 마친 도은이가 양손을 허리에 얹고 외쳤다.
걱정과 달리 도은이의 검사 결과는 아주 깨끗했다. 아무런 후유증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지극히 건강한 상태라는 소견이었다.
“오히려…….”
어깨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던 내가 몸무게 쪽을 확인하고 눈을 비볐다.
쓰여 있는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얘 처음 봤을 때도 짜장면 먹고 있었지?’
병실에 가만히 누워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비싼 방을 쓰는 만큼 간호사가 거의 모든 일을 알아서 해 줬을 거고. 몰래 짜장면도 시켜서 먹고, 병원 밥은 병원 밥대로 다 먹었을 테니.
그때의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퇴원한 지 꽤 되긴 했지만, 아직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겨울철의 두꺼운 옷으로 가리려 해 봐도 내 눈은 피할 수 없…….
“뭘 꼬나봐.”
“…….”
도은이가 살벌하게 노려봤다.
나는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언니는?”
“나도 다 정상이었어.”
도은이가 클레어의 헌터 전용 검사지를 팔랑팔랑 넘기더니 정리했다.
“오케이. 이건 내가 제출할게.”
도은이가 서류를 챙겼다.
건강 검진은 이렇게 끝났지만.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함께 클레어의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 내일이면 신년이었다.
“이런 날은 역시 가족끼리 보내야지.”
클레어의 집에서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면목 없다. 구정 때는 돌아가마.]아버지는 일 때문에 해외에 나가 계신 상태였다. 도은이는 이런 날도 안 챙긴다며 툴툴거렸지만, 나는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근데, 집에 아빠도 없으면 내가 좀 들어가서 살면 안 되냐?”
“난 집세도 안 내는 식충이를 얹혀 살게 해 줄 만큼 도량이 넓지 못하거든.”
나 이제 집세 정도는 낼 수 있는데.
그리고 가족끼리 이러기냐.
“너 설마 아버지한테도 집세 뜯냐?”
“천만의 말씀. 아빠는 홀몸으로 우릴 키운 공로가 있는걸. 10년이나 잠수 탄 누구랑 달리.”
“…….”
얘한테 말로 이기는 건 100년이 지나도 안 되겠군.
“그런 천사는 세상에 우리 언니 정도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까 잘해.”
“노력해 볼게.”
저녁 메뉴는 떡국이었다.
원래 이거 1월 1일에 먹는 거 아닌가? 하지만 도은이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한다고 떼를 쓰기에 조금 이르게 준비했다.
“어때요?”
클레어가 떡국 그릇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이 떡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육수부터 떡과 고기까지 모두 내가 한 것이었다. 게다가 달걀을 흰자와 노른자로 따로 부친 것도 나였다.
클레어가 한 건 그 지단을 얇게 썰어 그릇 위에 올린 게 전부였다. 거기에 김을 잘라 올린 것.
“예쁘네요.”
그러자 클레어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아. 이 고명이, 말이죠…….”
“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얼마 전의 클레어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했다.
원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요리도 칭찬을 해 줘야 빠르게 느는 법이었다. 나는 조금 스파르타식으로 배웠지만.
“가져갑시다.”
식사 준비를 마친 후.
도은이가 숟가락으로 자기 그릇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왜 내 것만 떡이 적은 것 같지?”
그건 내 배려란다.
* * *
“올해는 진짜 다사다난했다. 그치?”
“그러게.”
클레어와 도은이가 공감한다는 듯 마주 보고 쓰게 웃었다.
나에게는 조금 먼 이야기였다. 내게 이 한 해는 온전한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연말 특집으로 하는 방송들을 몇 개 챙겨 보니 시간은 금세 12시를 가리켰다.
댕.
제야의 종을 타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짜가 바뀌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것이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받아라.”
“어. 두 사람도 복 받으쇼.”
대앵.
계속해서 타종 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묘한 기류의 침묵이 이어졌다. 도은이가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아, 나는 아빠한테 전화하고 와야지.”
도은이가 노골적으로 자리를 떴다.
남은 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올해는…….”
온전히 보낸 건 아니었지만, 올해는 내게도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쪽 세상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혼인 도장이 찍혀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도은이가 병에 걸려, 클레어의 도움을 받아 치료할 수 있었다.
올해가 끝나는 순간에, 내가 클레어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도요.”
“…네?”
“저도 고맙다고요.”
클레어도 내게 감사할 일이 있었던가. 잘 떠오르진 않았다.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내게 해 준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에 불과할 거다.
클레어가 덧붙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앞으로도.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클레어의 말대로, 우리 관계는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백년해로를 약속한 것은 아니어도, 당장에 깨어질 관계는 아니었으니.
당분간은 이대로.
함께하리라고 여길 수 있었다.
“저야말로…….”
때마침 통화를 마친 도은이가 하품을 뱉으며 돌아왔다.
“하암. 졸리다. 자자.”
“그럴까?”
클레어가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섰다.
“방은 어떻게 할까?”
“뭐?”
도은이의 물음에 나와 클레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방은 두 개밖에 없는데……?”
클레어가 그렇게 대답했다.
원래는 혼자 살던 집이니, 잘 수 있는 방이 두 개나 있는 것도 과분한 일이었다. 원래 손님 방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쓰고 있었다.
“난 오랜만에 저기서 잘래.”
도은이가 가리킨 건 내가 신세 지고 있는 바로 그 방이었다.
얘도 그걸 모르진 않는데.
“나랑 같이 자겠다고? 미쳤냐?”
“뭐? 나도 싫거든?”
도은이가 우엑,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럼 어쩌자는 건데?”
“왜. 오빠는 다른 방에 가서 자면 되잖아.”
그리 말하며 도은이가 가리키는 건 클레어가 자는 방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은 손님이니까 손님 방에서 혼자 자고. 남은 사람들… 나랑 클레어가 안방에서 같이 자라는 말이었다.
“야, 이도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까불래?”
“아씨… 안 먹히네.”
도은이가 쫄래쫄래 안방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