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2
12화 그거 벗고 여기 누워볼래요?
클레어 씨가 엄청난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진열대에 놓인 그릇을.
우리가 있는 곳은 가까운 시내의 애완용품 전문점이었다.
우리라고 함은 나, 클레어 씨, 그리고 백호를 포함한 셋을 의미했다. 처음엔 클레어 씨가 백호를 쫓아내려고 하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클레어 씨가 말한 ‘나가요’의 의미란, 개를 키우려면 필요한 용품을 사러 가자는 뜻이었다.
「대협, 사장님은 원래 그렇게 말이 짧습니까?」
「좀 그래.」
나는 백호를 품에 안고 뒤에 서 있는 상태였다. 참다 못 한 백호가 물었다.
「대협, 지금 저희 몇 분째 여기 서 있는 겁니까?」
「30분 정돈가…….」
「이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내가 한번 물어볼게.」
나는 클레어 씨에게 다가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집중하고 있었다. 개 밥그릇 고르기에.
진열대엔 재질이나 크기가 다양한 개 밥그릇이 진열되어 있었다. 기르는 개의 종류에 맞게 적절한 크기의 밥그릇을 골라야 했다. 그 외에 생긴 것도 다양해서 클레어 씨는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모습의 클레어 씨는 처음 본다. 방해하기 꺼려졌지만, 충언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저기, 클레어 씨. 그냥 적당히 골라도 되지 않을까요?”
“적당히?”
돌아본 클레어 씨의 눈빛이 무서웠다.
“…가 아니라, 역시 이런 건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백호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흰돌이.”
“아, 예. 흰돌이한테…….”
클레어 씨는 백호의 이름을 흰돌이라고 지었다.
「그 이름 진짜 촌스럽지 않습니까? 적어도 전 싫습니다.」
「길바닥에 나앉을래?」
「짐승한테 이름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흰둥이고 백구고 구분만 하면 그만이지요.」
백호는 흰돌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집 최고의 서열을 가진 클레어 씨가 결정한 사항이니, 나도 군말 없이 따르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넌 흰돌이다.
“뭐래요?”
클레어 씨가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눈을 치뜨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눈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붙었기 때문이다.
클레어 씨에겐 나와 흰돌이가 어느 정도 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해 놓은 상태였다. 전음을 통해 정확한 의사소통까지 가능하고, 원래는 산만 한 호랑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던 클레어 씨는 잘됐다는 말 한마디로 넘어갔다. 내가 테이밍 관련된 스킬이라도 익혔다고 짐작한 것 같다.
이쯤 되면 무섭다.
“도율 씨?”
“…오른쪽 게 좋대요.”
“그래요?”
겨우 하나 클리어.
클레어 씨는 포스트잇에 적어 놓은 구매 목록 중에 밥그릇, 물그릇 항목에 취소선을 그었다. 남은 건 사료, 간식, 방석, 계단, 목줄, 등등이 있었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 브이튜브 같은 걸 보면서 자료 조사를 한 결과였다.
벌써 꽤 늦은 시간. 야밤에 끌려 나와 개고생 중이었지만 힘들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음엔 저쪽 코너로 가 봐요.”
클레어 씨는 평소와 같이 앞장서 걸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건 벌써 내 일과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비교할 수 있었다. 평소의 그녀와 지금 그녀가 보여 주는 모습의 차이를.
평소의 클레어 씨가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흠잡을 틈 없는 걸음걸이를 보여 준다면, 지금의 그녀는 들뜬 아이처럼 서두르고 있었다. 걱정 때문일까,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내가 아는 그녀는 언제나 냉정하고 이지적이었다.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지난 며칠 그녀의 매니저로 일하며,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외의 일면을 보는 게 퍽 즐거웠다.
“방석은 뭐가 좋아 보여요?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이쪽이 예쁘긴 한데, 아직 배변을 못 가릴 수도 있으니 이쪽 방수가 되는 걸로 할까…….”
「저기, 저 그 정도로 모자란 놈은 아닙니다만.」
흰돌이가 정색했지만, 뜻은 전해지지 않았다.
나는 설핏 웃고 전했다.
“이 녀석, 아무 데나 막 싸지르니까 배변 봉투도 사고 배변 패드도 사고 합시다. 버릇이 아주 잘못 든 녀석이에요.”
「대혀업!」
“그래요? 아주 단단히 교육을 해야겠네요.”
「말이 씨가 된다고, 이러면 저 진짜 합니다?」
「그럼 바로 얼차려지, 이 녀석아.」
「…내 팔자가 개 팔자군.」
클레어 씨와 키득거리고 있었더니 멀리서 다른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카트를 끌고 있는 젊은 두 남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기야, 쟤들 좀 봐. 신혼인가 봐.”
“오~ 좋을 때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별로라는 뜻?”
“…더 좋다는 뜻이지.”
자기들 딴에는 거리가 있으니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헌터인 클레어 씨나 무인이었던 나나 청력에는 자신이 있다. 전부 다 들었다.
얼굴에 화끈하게 열이 올랐다. 클레어 씨도 마찬가지인지 낯빛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 당황스러운 건 신혼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지금까지 클레어 씨와 붙어 다닌 적은 많았지만, 이런 평가를 들은 건 처음이다. 어째서일까. 이유를 생각해 보면 평소와 다른 점은 한 가지뿐이었다.
클레어 씨의 태도다. 늘 냉랭한 기운을 뿌리던 그녀와 달리 오늘은 아주 살갑고 활발했으니까.
“…쇼핑 카트가 다 있네요. 짐이 많아질 것 같으니 가져올게요.”
“…네, 네. 부탁드려요.”
카트를 끌고 온 후, 클레어 씨는 지금까지와 달리 평소처럼 차분한 태도를 내비쳤다.
피차 알고 있었다. 아까 전의 얘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쯤은. 하지만 암묵적으로 서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합의했다.
“가죠.”
쇼핑이 재개되었지만, 클레어 씨가 냉정한 태도로 돌아온 후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요한 물품을, 가장 합리적인 품목으로 선택할 뿐.
역시 별것도 아닌 차이로 고민하던 건 쇼핑을 즐기는 거였나.
그렇게 재빠르게 쇼핑을 마치고 계산대에서 카트에 담은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늘어놓을 때였다. 두 사람이 각자 하다가 손이 스쳤는데, 클레어 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접었다.
“…죄송.”
“…뭐, 뭐가요.”
계산대 직원은 바코드를 찍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이 촌극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 때, 카트의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 흰돌이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놀고들 있네.」
이번만은 대꾸할 수 없었다.
* * *
“이상하네요.”
“뭐가요?”
“흰돌이는 개라고 들었는데, 왜 츄르를 좋아하는 걸까요?”
뜨끔했다.
츄르는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이다. 스틱 형태로 낱개 포장된 사료인데, 젤리처럼 쭉 짜서 주는 방식이다.
문제는 하얀 강아지라고 소개한 흰돌이가 이 츄르란 거에 환장한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츄르는 고양이한테나 먹히는 사료인데, 강아지인 흰돌이는 왜 고양이 간식에 사족을 못 쓰는가?
그건 사실 흰돌이가 호랑이이고, 고양이과이기 때문이다.
“그, 글쎄요. 길에서 지내던 시절에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입맛이 변했나…….”
“그런 걸까요?”
어설픈 변명 후에 흰돌이에게 전음을 보냈다.
「야, 좀 참아 볼 순 없냐?」
「…이건 제 본능이 시키는 일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흰돌이가 고개를 저었다.
말은 해 봤지만, 사실 녀석도 최대한 참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코가 츄르를 쫓고, 꾹 다문 입에서 침이 새는데 어쩌겠는가.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클레어 씨도 신기하게 생각할 뿐 수상하다고 여기는 정도는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아니, 솔직히 수상하긴 하다. 하지만 클레어 씨는 흰돌이에 관련된 일이라면 이상하게 생각을 깊게 안 하는 면이 있었다.
평소에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도피성으로 지능 저하가 일어나는 걸지도.
「대협이 이 맛을 알겠습니까? 후……. 대협은 이런 거 먹지 마십쇼.」
「안 먹어.」
흰돌이 녀석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똥폼도 이런 개똥폼이 따로 없다.
아는지 모르는지 클레어 씨는 웃으며 흰돌이에게 인사했다.
“그럼 우린 다녀올게.”
「잘 다녀오십쇼, 사장님!」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진 업무.
스케줄은 도은이가 짜지만 나도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리 내용을 확인하고 가야 하는 장소까지 알아뒀다. 사장님이 조수석에 타자마자 바로 네비를 찍었다.
“훈련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오늘 스케줄은 자율 훈련이었다.
던전 공략이 없어도 몸이 굳는 걸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피지컬 트레이닝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체력이나 근력 훈련 역시 중요하지만, 오늘은 보다 중요한 일정이었다.
전투 훈련.
헌터인 클레어 씨가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는 날이었다.
그동안 서류로 적힌 내용이나 영상으로 기록된 자료 화면을 통해 간단히 보긴 했지만, 클레어 씨가 직접 무기를 쥐는 모습을 보는 건 나도 오늘이 처음일 예정이다.
“여기가 훈련장…….”
도착한 곳은 . 수백 평에 달하는 크기를 가진 건물이 위로 수십 층이나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위뿐만 아니라 지하로도 시설이 뻗어 나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극지를 재현한 환경은 물론, 몬스터가 출몰하는 던전이나 게이트에서의 상황까지도 체험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 훈련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레어 씨는 그런 시설의 층 하나를 통째로 오늘 하루 동안 전세 냈다.
“도율 씨는 저기 들어가 있으면 돼요.”
클레어 씨가 가리킨 건 모니터링 룸이었다.
아무래도 훈련하는 헌터 옆에 있다간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모니터링 룸은 특별히 튼튼하게 지어졌다.
이곳에선 훈련하는 헌터의 모습을 다각도에서 촬영, 기록되고 있었다. 실제로 나 같은 야매 매니저가 아니라 전문 트레이닝 지식이 있는 사람이 담당 헌터의 전투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되는 장소였다.
찰칵. 모니터링 룸의 안전장치가 작동하자 클레어 씨가 무기를 꺼냈다.
이곳 헌터들은 거추장스럽게 장비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들의 장비 소지는 ‘인벤토리’라 불리는 스킬이 각인된 아티팩트에 의해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도 가격이 비싸 아무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S급 헌터인 클레어 씨에겐 해당되지 않는 사항.
인벤토리 스킬은 등급에 따라 넣을 수 있는 부피와 중량이 증가한다. 또 그 스킬이 각인된 아티팩트가 작고 가벼울수록 비싸진다.
클레어 씨가 지닌 물건은 A급 인벤토리 스킬이 각인된 반지였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손가락, 나선 모양으로 감겨 있는 반지에 마력이 주입되었다. 그러자 푸른 빛이 일렁이며 길게 뻗어 나갔다.
나타난 건 한 자루의 검.
그녀는 서양식 검을 다루는 기사였다.
방어구는 융통성이 있는 편이었다. 전신을 감싸는 풀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라 주요 부위만 가리는 가벼운 차림이었다.
탱커가 아닌 딜러 포지션이기 때문에 기동성에 치중했기 때문일 거다. 공격은 대부분 흘리거나 피하고, 피치 못할 경우에만 방어구가 있는 부위로 막는 방식.
‘잘 어울리네.’
서양식 기사라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평소의 딱딱한 태도를 생각하면, 이대로 검례를 하며 기사도를 읊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가진 마력을 모두 끌어 올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을 확인하는 무식한 짓을 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건물이 작살 나겠지.
클레어 씨가 행한 건 최소한의 마력을 곁들인 기본 동작 점검이었다.
찌르기와 베기. 시작 동작을 달리하고, 노리는 위치를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무수한 조합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검면으로 받아 내는 동작과 초근거리 전투를 상정한 박투술까지.
그리고 일련의 동작을 이어 흐름으로 만들었다. 어떤 자세, 어떤 상황에서도 다음 동작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몸에 익히는 훈련.
감상은, 성실 그 자체.
검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까지 알 수 있다는 말을 조금은 이해했다.
한창 검을 휘두르던 클레어 씨가 우뚝 멈췄다. 흐름으로 보아 아직 멈출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클레어 씨는 모니터링 룸 너머의 나를 흘깃 보더니 어물거렸다.
“…굳이 볼 거면 모니터로 보시지.”
그제야 깨달았다.
모니터링 룸의 창문, 매직 미러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빤히 쳐다보는 걸 클레어 씨도 모두 알고 있었다는 거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모니터로 볼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육안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더니.
이왕 흐름이 끊긴 김에 쉬어 갈 생각인지 클레어 씨가 모니터링 룸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어때요? 직접 보니까.”
클레어 씨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온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도 녹화된 모니터 화면을 돌려 보며 자신의 동작을 점검했다.
고심 끝에 결정했다.
모니터링 룸엔 휴식을 위한 건지 간이침대도 놓여 있었다. 마침 좋았지만, 걸리적거리는 건 클레어 씨가 걸치고 있는 갑옷이었다.
“클레어 씨.”
“네.”
“그거 벗고 여기 누워 볼래요?”
“…하?”
미친놈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