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20
120화 네 애야?
“죄송합니다.”
백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 맞은편에는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들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헌터들인가?’
딱히 그들이 헌터 전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체격이나 분위기, 그리고 평상복 속에 숨겨져 있는 몇몇 아티팩트를 통해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사내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력을 보면 확실했다.
“죄송하다니. 말로만 하면 다야?”
“…….”
사내들이 시비조로 대꾸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백우진의 표정에는 동요가 없었다.
상대가 헌터인 데다가 수도 많으니 겁을 먹어도 이상할 것 없지만, 백우진 역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길드의 관리자였다. 그 경력이 어딜 가진 않는지, 백우진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백우진이 안경을 고쳐 쓰고 답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배상?”
대답을 들은 남자가 턱을 쓰다듬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놔, 백억.”
“…….”
“왜? 못 내놓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진 못했지만.
고작해야 길거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으로 백억을 요구하는 게 터무니없는 일이란 것 정도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못 알아보는 건가…….’
백우진은 길드 ‘플레이아데스’의 부길드장이었다.
플레이아데스라고 한다면,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한때 대한민국의 4대 길드라 불리던 길드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헌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곳 중 하나.
그리고 그곳의 이인자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얼굴만 봐도 알아볼 법했지만.
‘원래 대외적인 활동은 거의 안 했었지.’
얼굴이 알려질 만한 일은 모두 길드장인 백건영이 도맡아서 했었다. 부길드장은 직책뿐인 심부름꾼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관련 사업의 영업 쪽이라면 모를까. 헌터들에겐 오다 가다 스쳐 지나간 얼굴에 불과한 느낌이었을 테니.
“잠깐, 이 녀석…….”
그들 중 누군가 백우진을 알아보고 손가락질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얼마 전에 망한 그 길드 부길드장이잖아?”
“망했다면……. 플레이아데스?”
“그래, 거기.”
“오, 진짜인 거 같은데?”
딱 보자마자 떠올리기 어려웠을 뿐, 사내들은 백우진의 얼굴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냉정을 유지하던 백우진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거기 길드장이 뭐, 불법 저지르다가 잡혀 갔다며?”
“길드장에 간부들까지, 싹 다 해외로 날랐다던데? 길드 건물도 박살 났고.”
“와, 씨. 무슨 짓을 하다가 걸린 거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그나저나 부길드장님은 왜 국내에 남아 계신대?”
“몰라. 자금 세탁이라도 하고 계신가?”
“큭큭. 뭐야, 그럼 돈 많겠네.”
남자들의 조롱에도 불과하고 백우진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명백하게 태도가 달랐다. 이전까지 해야 할 일을 처리할 뿐이라는 듯 무심했던 태도가 어느새 차가운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거기까지 하시죠.”
그런 백우진의 앞을 가로막고 선 건 아니나 다를까, 클레어였다.
“엉? 이건 또 뭐야?”
클레어 역시 아티팩트의 효과로 정체를 숨기고 있어서 다른 이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큰 소란을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물러가시죠.”
“하하. 이 아가씨 말하는 거 좀 보게.”
“어디서 잘난 척이야?”
말로 해서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클레어도 그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고 목걸이를 매만졌다. 방금 한 말은 으레 하는 경고였다. 성실한 성격 탓에 지키는 규칙.
클레어가 정체를 밝힌다고 해서 이 상황이 단숨에 나아질 거라는 계산도 서지 않았다. 오히려 유명인이라는 빌미를 잡아 더 건들거리면 몰라.
이런 상황을 성실한 태도만으로 헤쳐 나가는 건 어렵고 빙 둘러 가는 길이었다.
내게 이런 건 다른 세상에서 밥 먹듯이 보던 상황이었다. 워낙 흔한지라 대개는 모른 척 지나갈 때가 많았다. 그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꼭 말려들고 말았을 때에는.
“그건 하지 말죠.”
“……?”
내가 클레어의 손목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목걸이 형태의 아티팩트를 조작하려던 클레어의 마력이 차단되었다.
“하. 뭐, 줄줄이 소세지냐? 넌 또 어디서 튀어나온…….”
굳이 대답할 것도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되돌려준 건 눈빛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약간의 내공을 담았다.
이 정도 마력을 가진 헌터라면 내공에 얼만큼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 정도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것은, 지금의 내겐 상당히 익숙한 일이었다.
“커억……!”
사내들이 경련하더니 목과 가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헌터도 마력을 다룰 수 있을 뿐, 기본적인 생리는 인간과 같았다. 거대한 내공에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하면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더 힘을 주면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지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탁.
그런 나를 붙잡은 건 클레어였다.
돌아보니 클레어가 눈을 지그시 감고 두어 번 고개를 저었다. 저들을 향한 싸늘한 시선엔 변화가 없지만, 굳이 내가 그럴 필요도 없다는 의미였다.
“…….”
내공을 다시 거두자, 놈들은 기절한 건지 탈진한 건지 모를 상태로 자빠져 있었다.
“당신은…….”
등 뒤에서 백우진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레어는 목걸이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고 있으니, 마력도 없는 일반인인 백우진이 그 효과를 뚫고 알아볼 방법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 얼굴은 방송을 통해 알려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백우진과 나는 구면이었다.
“…오랜만이군요.”
뭐라 인사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서로가 꺼림칙한 관계였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나는 백우진이 몸담고 있던 길드인 플레이아데스를 날려 버린 전적이 있고.
백우진 역시 자신이 속한 길드였던 플레이아데스에서 내 아내로 알려져 있는 클레어에게 이런 저런 방해 공작을 펼쳤던 일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아, 예.”
백우진 역시 떨떠름한 목소리로 겨우 인사를 받았다.
“저기…….”
목소리를 낸 것은 백우진의 다리 뒤에 숨어 있던 작은 여자아이였다.
초등학생……. 아니, 어쩌면 그보다 어린가.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건 묘하게 의젓한 태도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여자아이가 꾸벅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이 누나가 한 거니까, 감사 인사는 이쪽에 하렴.”
“하?”
그런 내 말에 클레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백우진 역시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만이 순수한 얼굴로 내 말을 믿어 줬다.
“감사합니다, 언니!”
“그, 그래…….”
아이 앞에서 실랑이 벌이는 꼴을 보일 순 없었는지. 클레어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아줬다.
“클레어 씨! 이도율 씨!”
우리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건 주예린이었다.
“바람 쐬러 간다더니 어디까지 간 거에요? 미팅에서 둘이 눈 맞아서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고 말도 없이 그러기가……. 어라?”
주예린의 시선이 우리와 함께 있는 백우진의 얼굴에 꽂혔다.
백우진은 거북한 얼굴로 그 시선을 피했다.
“백우진이?”
“…….”
둘이 아는 사이인가?
주예린은 대현 그룹의 손녀이고, 백우진 역시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어느 정도 안면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근데 얘들은 또 뭐죠?”
주예린이 가리킨 건 바닥에 자빠져 있는 두 놈들이었다.
나는 일관된 진술을 했다.
“시비 걸길래 클레어 씨가 혼쭐을 내줬습니다.”
“아하. 뭐야, 할 땐 하잖아요.”
주예린이 대견하다는 듯이 클레어를 칭찬했다.
“근데 얘들 헌터 아니야?”
“그런 것 같습니다.”
“미친 놈들. 각성자가 술 처먹고 길거리에서 시비를 털어?”
주예린이 핸드폰을 꺼내 쓰러진 놈들의 얼굴 사진을 찍었다.
그 직후 주예린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김 실장? 나야. 아까 보낸 사진 있지? 얘들 라이센스 정지 때려 버려. 사유? 어깨에 힘을 너무 주고 다니더라고. 어, 그래. 고마워.”
“…….”
통화를 끊은 주예린이 내 시선을 보더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사회봉사 몇 시간 하고 교육 좀 받으면 풀려요.”
뭐가 됐든.
이 여자를 적으로 돌리면 상당히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만.”
다른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백우진이 간단히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 했지만.
“어딜 도망치려고?”
주예린이 백우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잠깐 얘기 좀 괜찮지?”
질문이 질문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백우진이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 * *
“언니, 진짜 이쁘다!”
“으, 응. 고마워.”
조금 떨어진 자리에 클레어와 아이가 둘이 앉아 있었다. 아이가 워낙 클레어를 잘 따르고 있어, 아이를 돌보는 일은 클레어가 맡았다.
나머지 셋. 나와 주예린과 백우진이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원래라면 클레어 씨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긴 한데…….”
주예린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주예린에게 있어 가면을 쓰지 않은 나는 단순한 클레어의 남편이자 일반인으로, 돈 잘 버는 아내의 기둥서방으로만 보일 테니까.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클레어의 말이 있었던 덕분이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얘기라면. 이 사람에겐 모두 해도 괜찮아요.
-…뭐, 클레어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반면 백우진은 내가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백우진은 지금 내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그나저나 너 말야, 갑자기 얼굴 안 비춘다 싶더라니.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야?”
주예린의 질문에 백우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려 대답했다.
“늘 하던 일을 안 하게 됐으니. 갑자기 볼 수 없게 되는 게 당연한 거겠죠.”
“…….”
늘 하던 일이라고 한다면.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으로서 처리하던 업무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가 하루아침 사이에 전조도 없이 박살 나 버렸으니. 백우진 역시 전조 없이 실직자 신세가 된 셈이었다.
‘그날…….’
나는 길드를 기습한 것이 아니었다.
길드장 백건영은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비할 시간이 굉장히 길었다고 할 순 없지만, 길드 건물과 인물 배치는 나름대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걸 하나하나 짓밟고 옥상까지 올라갔다. 도망치거나 숨은 놈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백우진은 없었다.
‘부길드장이라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다른 간부나 소속 헌터들은 있을 만큼 있었는데. 길드장 바로 아래라고 할 수 있는 부길드장은 그곳에 없었던 것이다.
그게 보험인지, 아니면 버림패인지.
나로서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다.
‘백우진, 너는…….’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냐.
아니면 칼을 품은 복수귀냐.
백우진을 관찰하는 건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럼 저 애는?”
주예린이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클레어와 놀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설마… 네 애야?”
주예린의 물음에 백우진이 표정을 구겼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하긴. 몇 년이나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나.”
주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누군데? 누구 앤데? 왜 네가 데리고 다니는 건데?”
“그건…….”
백우진이 곁눈질로 아이를 살폈다.
아이가 백우진을 따르고 있기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가족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낯선,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로 보였다.
“먼 친척입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를 잠시 맡고 있을 뿐입니다.”
“잠시라니, 언제까지?”
주예린의 질문에 백우진은 목이 타는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보호자를 구하는 대로 곧바로.”
그 목소리는.
옆자리까지 들리지 않길 바라는 듯 조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