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장사꾼 다 됐구만
“이건 사기야!”
청진명이 소리쳤다.
지금 청진명의 양쪽으로 남자가 한 명씩 붙어 있었다.
그들은 청진명의 팀원 중 하나인 고철민과 정하준. 클레어의 팀이기도 한 만큼 나도 이름과 얼굴이 익숙한 이들이었다.
“와 이라는교, 행님요!”
“진정…….”
“아오, 놔 봐!”
청진명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세 사람 사이의 힘겨루기가 팽팽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청진명이 제아무리 S급 헌터이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강자 중 하나이지만, 팀원인 헌터들 역시 그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각성자일 것이다. 단순한 완력으로 친다면 청진명을 앞서는 사람도 있을 거고.
게다가 아무리 열이 뻗친다 해도 실내에서 그렇게 큰 힘을 썼다간 건물에 피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사력을 다할 순 없었다.
절묘하게 조절된 마력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흔들리면 쏟아질 것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
“창까지 들고 뛰 나오고. 진짜 미칬나?! 이카는 거 걸리면은 우리 싹 다 백수 된다 안카요!”
각성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건 중죄였다. 라이센스 정지까지 가면 던전 공략은 고사하고 부정적인 꼬리표가 찍히게 되니.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일이었다.
팀장이 그런 구설수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밥그릇이 그대로 날아갈 판이니, 옆에 팀원들이 필사적으로 말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행동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지만.
청진명에겐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오……. 진정하고 내 말 좀 잘 들어 봐.”
“씨부려 보이소.”
“너흰 모르겠지만, 난 사실 저 남자와 개인적으로 약속한 게 있다고.”
“무슨 약속인디요?”
“대련을 잠깐…….”
저도 모르게 내뱉은 청진명이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말하면 더 들어 줄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범행 계획을 자백한 범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경찰은 없었다. 두 사람이 더욱 단단하게 청진명을 옭아맸다.
“이 인간이 드디어 제대로 돌아 버렸구마. 무슨 툭 치면 나자빠지게 생긴 사람한테까지……!”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툭 치면 나자빠지게 생겼다니.
뭐, S급 헌터들 사이에서 일반인이란 그런 인식인 법이었다. 이런 말에 발끈해서 귀찮은 일에 휘말릴 내가 아니었다.
“막내도 질색팔색을 하고 있잖수!”
고철민이 클레어를 가리켰다.
클레어는 내 앞에서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었다.
정황상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게 맞긴 하지만, 동시에 자기 팀장을 배신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막내 너까지…….”
클레어가 슬쩍 청진명의 시선을 피했다.
팀원들에게 모조리 배신당한 청진명이 마지막으로 기댄 건 결국 나였다.
“이봐, 댁이 좀 설명해 달라고. 우리 약속한 게 있는 거 맞지?”
물론 있긴 하지만.
오늘은 딱히 청진명과 싸우러 온 게 아니었다.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게다가 나에겐 달리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왜 이러세요? 청진명 씨.”
“야, 이……!”
청진명은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고 울분을 삼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 상황이 되도록 나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 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말한다 하더라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실력 행사로 나온다면 나도 그에 맞춰 줄 수밖에 없고.
아니.
그럴 땐 클레어에게 맡겨 두고 튀면 되려나.
“오케이. 구속시켜!”
질질질.
고철민과 정하준이 청진명의 팔을 잡고 끌고 갔다. 모든 수단이 가로막힌 청진명은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끌려가고 있었다.
모든 의욕을 잃은 줄 알았던 청진명이 소리쳤다.
“이대로 내가 포기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
기운도 좋은 양반이구만.
“바보들…….”
송민아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일단 이쪽은 클리어인가.”
청진명과 클레어가 속한 그 팀원과 모두 만나 나무 고둥을 확인해 봤지만, 특별히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난항이구만.’
솔직히 말해서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이쪽이라고 보고 있었다.
청진명의 팀은 S급 던전을 공략하고 다니는 팀이었다. 그런 만큼 다양한 환경을 접하고 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이매’라는 여자의 흔적을 접했다면 아마 던전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던전이 아닌 이쪽 세상 어딘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인 건가.
“그래서, 오랜만에 현업에서 뛰는 거 보니 기분이 어때?”
“뭐?”
그러자 도은이가 옆에서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이 인간은 뭐 하러 온 거래?”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 일 같은 건 관심 외였으니까.
어쩌면 도은이는 내가 다시금 매니저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른다. 딱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러던 도은이가 한숨을 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뭐, 어쩔 수 없나. 아무래도 오빠는 예전 일을 신경 쓰는 듯하니…….”
“…….”
“미안하게 됐어. 그런 사람한테 잠깐이나마 매니저 일을 맡겨 뒀던 건.”
“…별로 그런 건 아냐.”
도은이의 걱정과는 달리, 지금은 정말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옛날 일이라고 한다면 내가 저쪽 세계에 가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쪽 세상으로만 쳐도 최소 10년이 지난 일이었고, 실제로 내가 겪었던 시간으로 친다면 그보다 더 오래 전이었다.
스무 살 전에 있었던 일 따위는 이미 오래전 사진처럼 흐릿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복도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앗.”
젊은 남자였다. 비싸 보이는 정장을 걸치고 옆에는 비서로 보이는 여성을 대동한 채 선명한 구둣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은이가 단숨에 대외 업무용 모드로 돌변했다.
남자 역시 도은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무심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지근거리에 도착하자 걸음을 늦췄다.
“회의였나?”
“네, 길드장님.”
“그렇군.”
무미건조한 대화였지만. 도은이는 뻣뻣하게 웃고 있었다.
길드장이라.
이곳은 ‘로얄 로드’의 건물. 다른 길드에서 방문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방금 그 대화나 행동거지를 보면 이곳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로얄 로드의 길드장.
겉보기엔 상당히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대한민국의 4대 길드라 불리는 로얄 로드라는 대규모 조직을 이끌기엔 더더욱.
하지만 그의 어디에서도 초췌함이나 피로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남들 위에 서고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느껴지는 인상.
한마디로.
왕의 자질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데…….’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건, 길드장이면서도 각성자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기를 펼쳐 자세히 살펴봐도 틀림없었다.
이 남자는 각성자가 아니라 무릇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럼 수고하게.”
“넵. 길드장님도요.”
길드장이 다시 걸음을 옮기자, 비서도 목을 까딱여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내가 물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쫄아 있냐? 저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무슨, 일은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었는데?”
도은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얘가 이러는 건 되게 드문데.
길드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떠올렸다. 저 남자, 겉보기엔 남에게 실례될 만한 무언가를 저지를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기도 하고…….
“혹시 쟤도 그거야? 너한테 집적거린…….”
“아이, 씨.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건 아니라는 듯. 도은이가 거세게 부정했다.
아무래도 전례가 있는 일이다 보니 먼저 물어봤다. 정민성이라는 녀석이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
“그럼 뭔데?”
“아니, 뭐. 그냥…….”
도은이가 멋쩍게 뺨을 긁었다.
“반대야, 반대.”
“반대?”
내가 캐묻자 도은이가 한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저 사람한테 조금……. 아주 살짝, 오해한 게 있어서 그만.”
“…….”
뭐야, 그런 거였나.
도은이는 손가락을 좁게 펼치고 있었지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마 보통 일은 아니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로얄 로드의 길드장이 대범하게 넘어가 준 거겠지. 얘는 오히려 그게 더 부담스러운 걸 테고.
“네가 그렇지, 뭐.”
“…….”
그러자 도은이가 치를 떨었다.
“내가 이 인간한테 이런 말을 다 듣다니…….”
상당히 분한 듯한 목소리였다.
* * *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아저씨?”
다음으로 내가 방문한 건 서지유의 가게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지유가 아니라 사장님의 가게지만.
“사장님은?”
“배달 나갔어요.”
“아하.”
이젠 역할 분담이 완전히 된 건가.
사장님은 원래 손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불야성에서 장사할 때에는 환경이 받쳐 주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큰 차이는 없었다.
주방은 완전히 딸내미에게 맡기고, 사장님은 이제 배달을 하거나 카운터를 보는 건가.
“그럼 점심땐?”
서지유는 아직 학생이었다. 낮 시간엔 학교에 있어야 할 나이였다.
내 질문에 서지유는 마침 잘 물었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 말을 쏟아냈다.
“요즘은 방학이니까 그나마 괜찮다 쳐도, 평소엔 점심 장사가 아주 안 되니까 저녁에 술장사하는 걸로 입에 겨우 풀칠해요. 아예 야간 시간을 확 늘리든가 해야지.”
…이젠 누굴 사장님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그럼 학교는?”
“사람 말을 뭘로 들은 거예요? 방학이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방학이 끝나면?”
“그럼 곧 졸업이죠.”
“…대학은?”
그러자 서지유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안 갈 건데요?”
“…….”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으니, 대학이 필요한지 어떤지에 대해 말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아는 꼬마가 이렇게 말을 하니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꼰대 다 됐나?
“…그래.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하겠지.”
이해심 많은 어른인 척, 그렇게 답을 회피하는 방법밖에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말인데.”
나는 진정으로 신경 쓰이던 걸 가리키며 물었다.
“저 여자는 네가 부른 거냐?”
내가 가리킨 건 카운터석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여자였다.
구릿빛 피부에 검은 단발머리. 금색 눈동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투명한 듯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여자.
분명히 내가 아는 누군가였다. 샤디아라는 이름의, 아크투러스 투기장에서 만났던 여자.
‘쟤가 왜 여기 있냐.’
전에도 여기서 만나긴 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샤디아는 우연히 이 가게에 왔었다.
서지유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원래 가끔 와요.”
“…괜찮냐?”
“괜찮아요. 와서 괴롭히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확실히 그 말대로, 샤디아는 지금 얌전히 술을 즐기고 있었다.
나한텐 시도 때도 없이 성가시게 굴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렇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신선한 모습이었다.
“아, 그리고.”
서지유가 의미심장하게 쓱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샤디아 씨가 오면 매출이 늘거든요.”
“…….”
이 녀석.
정말 장사꾼 다 됐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