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이 색마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디언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악수를 건넸다.
내민 손을 잡았더니 우악스럽게 움켜쥐고 거칠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응시하는 게 참 부담스럽긴 했다.
그런 가디언의 뒤로 뒤늦게 도착한 경찰들이 범인과 그 일당을 연행해 가고 있었다.
“아오, 씨…….”
범인의 정체는 대도 블랑셰.
모습을 바꾸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라는 모양이었다.
“사기, 공문서 위조, 절도, 공공 기물 파괴 등등. 인명 피해만 없다 뿐이지, 온갖 범죄란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니는 여자였죠. 그런 주제에 바람같이 사라지는 재주가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모습을 바꾼다라.
그런 걸 감지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닐 터였다. 다만 저 여자의 스킬이나 아티팩트가 좀 더 강력해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거였겠지.
“국제기관에도 수배가 된 여잔데, 마침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탕 해 먹으려다 딱 걸린 거죠. 겨우 꼬리를 잡았나 싶었더니 갑자기 사람 많은 곳으로 도망치기에 다소 거친 ‘협조’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덕분에 빠르게 해결되었군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원래는 이런 사건을 도맡아 해결해 주는 스페셜리스트를 섭외해 놨는데, 이거 바로 돌려보내게 생겼군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고 있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가디언이 물었다.
“분명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도움을 주신 분께서 정체를 밝히시겠다면, 저희도 흔쾌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됐습니다.”
“겸허하시기까지! 부디 많은 분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하지만, 이 이상 제 바람을 강요하는 것도 꼴사나운 짓이겠지요. 네!”
가디언이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의 정체를 들키기 싫은 건 물론, 내가 활동할 때 쓰는 가면도 유명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나름대로 센터장 영감의 비밀 조직에 속해 있다는 걸 염두에 둔 대처였다.
‘…게다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각성자 사이에서 경찰이자 형사로 통하는 가디언이 나를 무슨 용감한 시민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켜세워 주니 영 낯간지러웠다.
나쁜 의도로 그러는 건 아니었으니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엔 옆에 여자 끼고 허세나 부리는 시정잡배인 줄 알았더니, 정말 대단한 재주를 지니고 계신 귀인이셨군요! 제가 몰라뵀습니다!”
취소.
기분 나쁜 거 맞다.
슬쩍 주하린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를 끼고 운운하니 혹시 마음이 상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인 듯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럼 이만.”
그렇게 마무리하고 떠나가려는 찰나.
사람들 무리를 헤치고 누군가 가디언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언니! 나도 바쁘니까 발칵발칵 불러 대지 좀 말라고 했지!”
“아, 왔니?”
턱을 찌를 듯 손가락을 세우며 다가온 여자는, 얼굴 위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위로 굵직한 나선 모양의 줄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안경이었다.
“오자마자 미안하지만, 바로 돌아가도 돼.”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아오!”
안경 쓴 여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말하는 걸 들어 보니 급하게 불러서 서둘러 온 모양인데, 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저거라면 화가 날 만도 했다.
하지만 가디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쪽 분께서 사건 해결해 주셨거든.”
“뭐? 대체 누가…….”
그녀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가디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상당히 놀란 듯한 눈치였다. 이런 일은 자신이 전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달리 가능한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다급히 돌린 시선 끝엔.
내가 있었다.
“오랜만.”
“어…….”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이 튀어나왔다는 듯, 탐정이 어벙하게 입을 벌렸다.
“조수?”
탐정과는 불야성에서 협력했던 사이였다. 싸움은 전혀 못하지만, 정보 수집 쪽으로 특기가 있었다.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나와 같이 센터장 영감 밑에서 일하는 ‘현학’의 동료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게다가 피차 정체를 알고 있는 사이기도 했고.
탐정이 의아하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냥 우연이야.”
정말로.
주하린이 밥 사 준다고 불러서 나왔는데, 시간 남으니까 영화나 보자고 한 상황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일을 빨리 해결하면 영화를 다시 틀어 줄 줄 알았는데, 영화관에서 사과와 함께 티켓 값을 환불해 줬다.
…그런 건 됐고, 난 보던 영화를 계속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약 거래를 적발한 주인공이 오히려 덤터기를 쓰고 범인으로 몰린 상황이었단 말이다.
가디언이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셨나요?”
“예, 뭐.”
“…조금?”
가디언의 질문에 나와 탐정 모두 답을 피했다.
우리가 아는 사이인 건 비밀 임무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속한 조직 역시 비밀 조직이었으니, 아무에게나 밝힐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여러 모로 말을 아끼는 게 좋은 상황.
할 말 안 할 말 안 가리는 가디언은 의외로 눈치껏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적절한 대처를 할 줄 아는 듯했다.
“어떻게 아는 사인데?”
집요하게 캐물은 건 주하린이었다.
좀처럼 보여 주지 않는 날카로운 눈매로 탐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커다란 동글뱅이 안경은 단순히 얼굴 면적을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정체를 숨기는 위장 스킬이 달려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꿰뚫어 보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그러다가 사람 뚫리겠네.
탐정도 그 시선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쳤다.
“비즈니스예요, 비즈니스…….”
“흐음…….”
거기서 주하린은 태도를 바꿨다.
“대단히 뛰어나신 능력을 가진 분인 것 같은데, 저도 부디 연락처를 받아 두고 싶네요. 괜찮겠죠?”
“네……?”
탐정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주하린이라고 한다면 본인 자체도 뛰어난 각성자이지만, 대현 길드라는 초대형 길드의 수뇌부인 데다가 대현 그룹의 공식 후계자인 몸이시다.
그런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처를 받고 싶다는 얘기를 듣는 건 확실히 호재였다.
“무, 물론이죠…….”
탐정이 기쁨에 겨워 울먹이는 목소리로 승낙했다.
* * *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가디언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고 다른 자들과 함께 멀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범인을 잡았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겠지. 복잡한 절차는 지금부터 시작일 거다. 탈출하지 않게 감시도 해야 할 거고.
가디언이 멀어지고 셋만 남은 상황에서 주하린이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나도 할 일이 생각나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주하린이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지만,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갑자기 생각난 할 일이라.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 집행부의 일일 거다.
‘난리가 났으니, 뭐.’
오늘 주하린의 곁에는 5명이나 되는 집행부 전원이 붙어 있었다. 물론 바로 옆이 아니라 상당히 거리를 두고 지켜 보는 형태이긴 했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5명이나 되는 인원이 붙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따로 목적이 있다 치더라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걸 지키지 못했다는 건 확실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갑작스러운 소동이 일어난 걸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으니.
그런 돌발 상황까지 일일이 예상하고 대비하라는 게 가혹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대현 그룹의 집행부 정도 된다면 그 정도는 해 줘야 했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면 왜 5명이나 붙어 있던 거지.
설마 일부러 흘린 것도 아닐 테고.
모시는 아가씨의 사생활을 방해할 리는 없으니까.
‘개박살들이 나겠군.’
속으로 명복을 빌어 줬다.
“그러니까, 저기…….”
주하린이 우물쭈물하다가 물었다.
“…다음에 또 봐.”
다음이라.
그러고 보면 오늘 약속했던 밥이나 술은 전혀 하지 않았다. 고작 영화 좀 보다가 도중에 끊겨서 나오고 말았지.
이렇게 어수선하게 끝난 걸로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으니. 새로 날을 잡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하린이 웃으며 멀어졌다.
“꼭이다! 꼭!”
그걸 옆에서 탐정이 떨떠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양다리 클라스 쩌네…….”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탐정이 딴청을 피우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클레어 씨도 알아요?”
“뭐가?”
“뭐긴요, 조수가 이러는 거 말이에요.”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람.
“당연히 말하고 나왔지.”
“거봐요……. 네?”
탐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꺼운 안경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난 알아볼 수 있었다.
“뭐가 이상해? 둘이 아카데미 동기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클레어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거라면 몰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알려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은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결국 클레어가 소개해 준 일로부터 파생된 일이니까. 주대현과 엮인 내용은 말할 수 없어도, 복잡한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얘기했다.
‘숨길 만한 일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망량을 만나러 가거나, 주대현을 만나러 가서 사도나 영혼에 대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아는 사람이 밥 사 주겠다는 말에 공짜 밥 좀 얻어먹고 오겠다는 거에 반대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식비도 굳는데.
본인은 일하러 나갔는데 집에서 노는 놈이 밥 축내는 거, 꼴불견일 테니까.
실제론 프리랜서에 가깝지만.
“…클레어 씨도 보기와 달리 마음이 넓네요. 이런 걸 다 허락하고.”
“그래? 본인도 좋아하지 않을까?”
“…뭐라고요?”
탐정이 숨을 삼켰다.
“크, 클레어 씨. 그런 위험한 취향을…….”
“취향은 뭔 놈의 취향이야.”
그나저나.
탐정과 나는 피차 시간이 남는 신세였다. 나는 주하린과의 약속이 도중에 잘렸고, 탐정도 수사를 위해 바삐 왔다가 모든 일이 해결된 후였으니까.
모처럼 시간이 남는다면 의미 있게 쓰는 게 바람직했다.
“그럼 우리도 어디 조용한 데로 갈까.”
“네?!”
탐정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쓰레기잖아요!!”
“…갑자기 뭐래?”
“여자라면 아무나 좋은 거죠, 이 색마!!”
“…….”
여긴 아직 영화관이었다. 사건이 있어서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하긴 했지만, 탐정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이목이 쏠렸다.
갑자기 사람을 왜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라고 말해 두고 싶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너. 나한테 보고할 거 있잖아.”
“보고할 거……?”
“영감한테 못 들었냐? 사람 하나 조사해 달라고 했잖아.”
“…아, 그거요.”
백우진이 데리고 있던 친척이라던 작은 여자아이. 그 아이의 정체에 대해서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떠들 수도 없었으니, 비교적 조용한 장소를 찾아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데.
“나, 난 또 뭐라고…….”
탐정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뒤늦게 손으로 부채질을 해 봐도 소용없었다.
내가 노려보자 탐정은 면목 없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외면한 방향은 마침 영화관 출구를 향해 있었다. 탈출 경로였다.
“가, 가죠! 제가 살게요!”
탐정이 쾌활한 척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