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3
13화 저 이제 시집 못 가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클레어 씨가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감싸 쥐고 시선을 피했다.
“이럴 사이라뇨?”
“그… 이런 짓을 할 사이는…….”
한국은 전통적인 유교 국가였다. 남녀칠세부동석. 남녀를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가르침 아래에서 자란 나지만, 요즘도 그 정도로 유별나게 구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심지어 외국인인 클레어 씨가 이런 폐쇄적인 태도를 취할 줄은 몰랐다.
“우리 사이가 뭐가 어때서요?”
“그, 이런 건 분명하게 순서가…….”
“순서는 웬 순서요? 그냥 돈 내고 받으러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
클레어 씨는 내 가벼운 태도에 치를 떨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저질.”
그리고 당황하던 태도를 지우고 단호하게 말했다.
“도율 씨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전 이런 일은 분명하게 서로의 합의와 절차를 지켜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보통 아닌가요?”
“…보통 마사지 받을 때 그렇게까지 하나요?”
“마… 사지?”
내 물음에 설교 조로 이어지던 클레어 씨의 말이 멈췄다.
“네. 마사지요.”
나는 대답하며 클레어 씨의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는 내 집요한 시선을 어떻게든 떨쳐내고자 애쓰는 중이었다.
클레어 씨가 말이 없자 내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니까 클레어 씨는 마사지를 받으려면 안마사와 손님 사이의 합의와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말씀이시죠? 그리고 우리 사이는 안마 하나 주고받을 사이도 안 된다는 거고요.”
“그건, 그게…….”
“예, 예. 저만 그렇게 생각했던 거군요. 그래도 전 저희가 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제가 착각한 거네요? 알겠습니다. 앞으론 철저하게 비즈니스만 하자고요, 비즈니스만.”
“그러니까아……!”
클레어 씨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처량한 표정이 가관이었다.
* * *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클레어 씨가 간이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진짜 마사지만 하는 거죠?”
“…….”
엄밀히 말하자면 진짜 마사지와는 조금 달랐다. 손끝에 기를 실어 혈맥부터 근육까지 모두 풀어헤치는, 따지고 보면 파괴와 재생을 통한 치료에 가까운 행위였다.
하지만 모든 걸 설명하긴 귀찮으니 그냥 마사지로 퉁 치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는 최대한 뻔뻔하게 나갔다.
“아니, 거기서 입을 다물면 안 되죠!”
그때 쑤욱하고 손가락을 찔렀다. 클레어 씨의 목, 쇄골과 이어지는 부분으로.
예상치 못한 통증에 클레어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악─!”
힘 조절에 실패한 건지 클레어 씨는 바로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가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라 나도 놀랐다.
─구우웅.
한차례 짙은 마력이 퍼졌다. 클레어 씨가 반사적으로 취한 방어 행동이었다.
[비상! 비상!] [허용치를 초과하는 마력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타워 안전을 위해서 마력은 허용 수치 이하로 제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건물 내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다행히 오래가지 않고 경고 문구만 한 번 읊고 끝났다.
“아, 미안. 아팠어요?”
별안간 클레어 씨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더니 간이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저기요. 아직 앞에 다 안 끝났는데요.”
“뒤로… 뒤로 먼저…….”
역시 너무 세게 찔렀나.
아까 그녀가 보인 추태… 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비명횡사를 떠올려 보면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갔다.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소리가 조금이라도 덜 새긴 하겠지.
나는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여기 방음 좋잖아요. 아무도 못 들었을 거예요.”
“…그쪽이 들었잖아요. 저 이제 시집 못 가요.”
“이미 저한테 왔잖아요.”
“…아.”
잡담은 끝내고 나는 다시 기감을 펼쳤다. 기를 퍼뜨리는 것으로 클레어 씨의 몸을 보다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후면 근육이라고 부르는 몸 뒤쪽의 근육들은, 눈이 앞에 달려 있다 보니 본인은 볼 수 없어서 그 중요성에 대해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근육들은 신체 밸런스나 동작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근육 자체는 잘 성장했지만…….’
클레어 씨의 등을 가로지르는 기립근. 그녀는 S급 헌터라는 위치에 맞는 훌륭한 근육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검술이라는 게 원래 완력 하나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완력만큼이나 중요한 게 민첩성과 유연성. 그리고 탄력, 협응력, 균형 감각이다. 다시 말해 안 중요한 게 없다는 뜻.
클레어 씨는 꾸준한 실전과 관리를 통해 탄탄한 몸을 갖췄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마사지를 제안한 것도 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클레어 씨가 훈련장에서 검술 동작들을 펼칠 때, 미세하게 밸런스가 흔들릴 때가 있었다. 잘못된 습관이 형성되기 직전의 상태. 무의식중에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조금씩 잘못된 길로 새는 것이었다.
근막 유착.
근육을 둘러싸고 있는 조직이 손상된 상태였다.
원인은 과로였다. 성실한 클레어 씨니까, 통증이 느껴져도 본인이 참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마력으로 그때그때 때우거나.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런 건 단순한 스트레칭으론 풀 수 없다. 따로 도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나에겐 이미 최고의 도구가 준비되어 있었다.
바로 기氣였다.
“읏……!”
“참아요.”
손가락 끝으로 클레어 씨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통증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과정이었다.
내공을 운용하자 몸 안에 내재된 기가 전신을 따라 흘렀다. 그 흐름 속에서, 손끝의 기를 조금씩 덜어 의지를 담았다. 그 기는 손과 맞닿은 클레어 씨의 등으로 퍼져 나갔다.
미세하게 나누어진 기가 클레어 씨의 등, 내가 짚은 부분의 근섬유를 이완시켰다.
‘점점 익숙해진다.’
다른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무공을 사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골자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색했던 일들이 점차 손쉬워졌다. 정신을 온전히 집중해야 손가락으로 가능했던 일들이 손바닥으로 가능해졌고, 이윽고 양손으로 펼칠 수 있게 됐다. 이토록 세밀하게 내공을 운용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익히고 있었다.
클레어 씨를 치유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오히려 나 자신의 성취를 높이는 길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은…….’
물론 클레어 씨의 몸 상태를 살피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는 등을 보인 채 엎드린 클레어 씨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살펴보다가 허벅지에서 멈췄다.
검술은 상체 근육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검을 잘 다루기 위해 손아귀 힘, 강인한 팔, 그리고 튼튼한 어깨가 버텨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게 하체의 역할이었다.
나는 클레어 씨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고 경고했다.
“클레어 씨.”
“네?”
“좀 아플지도 몰라요.”
“…지금도 충분히 아팠… 힉?!”
클레어 씨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리 경고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아까와 같은 비상사태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여기가 그 유명한 햄스트링이다. 스포츠 선수들도 자주 부상을 당하는 부위인 만큼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헌터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중요한 부위였다.
“그, 그만……! 읍……!”
클레어 씨가 앓는 소리를 내도 멈추지 않았다.
치과에서 아프다고 그만두는 거 봤나?
그렇게 허벅지를 양껏 주무르고 서비스로 종아리까지 손봐 줬더니 클레어 씨는 침대 위에 완전히 퍼져 있었다.
간만에 회복된 신경이 기뻐하는 건지 간헐적으로 몸을 움찔거릴 뿐이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할까요.”
치료는 꾸준히 받는 게 좋다. 게다가 오늘은 뒤쪽의 근육만 만졌다. 앞쪽도 남아 있으니 앞으로 할 일이 한참이었다.
몸을 일으킨 클레어 씨는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치료를 하는 나도 계속 내공을 운용하느라 피곤했지만, 몸의 약점이나 다름없는 부분들을 계속 지압당한 클레어 씨도 힘든 시간이었을 거다.
“고생하셨어요.”
기진맥진한 클레어 씨에게 타올과 물을 건넸다. 그녀는 나를 흘기더니 채 가듯 물건을 받았다.
* * *
클레어 씨가 돌아가기 전에 잠깐 샤워를 하러 간 사이, 나는 도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몸은 좀 어때?”
[나? 완전 쌩쌩하쥐. 나 병원 체질인가 봐.]피식 웃었다.
도은이는 여전히 병원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큰 문제가 터진 적은 없었다.
사실 석화병에 걸려 몸이 메두사의 마력과 반발하느라 점점 체력을 뺏기고 있었는데, 그 부분은 흰돌이의 능력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병실에 데려가는 중이다.
아쉽게도 완치는 불가능했지만, 건강하게 버틸 시간을 벌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원래 투병 생활이라는 게 체력과의 싸움이니까.
[한창 때보다 나은 것 같은데. 나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 오빠가 언니한테 말 좀 잘 해 봐.]“싫어. 무서워.”
[씨… 인정.]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고 해도 클레어 씨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슬슬 용건을 꺼냈다.
“그런데 너, 오염도라는 게 뭔지 알아?”
[오염도?]도은이가 전화기 너머로 기특하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었다.
[오올. 오빠 요즘 진짜 공부 열심히 하나 본데? 그거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개념인데. 완전 업계 사람 다 됐네?]“그냥 말만 들었어. 자세히는 몰라. 뭐야?”
[오염도는…….]도은이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가 마력이라고 부르는 에너지는 각 생명체가 가진 고유의 에너지다. 하나의 단어로 묶어서 부르기는 하지만 각자 가진 성질이 조금씩 다르다. 때문에 각자 다른 스킬이나 특성을 익히는 것이다.
그건 던전이나 게이트에 서식하는 몬스터도 마찬가진데, 이런 이질적인 마력에 자주 노출될수록 자신이 가진 마력에 악영향이 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던전과 게이트, 그리고 헌터의 등급은 마력의 강함을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실제로 전투를 잘하고 못하고 역시 중요하지만, 순수한 마력의 농도가 부족하면 약한 쪽의 마력은 급속도로 오염되고 만다.
제아무리 잘 싸운다 하더라도 마력이 약하다면 활약하기 어려운 이유가 이것이었다.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낮은 일반인은 도은이처럼 병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헌터라도 무리한 활동을 이어 나가면 그렇게 되고. 정도의 차이였다.
“중요한 건데 여태 몰랐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언니 오염도는 내가 철저하게 계산해서 일정 조율하고 있으니까.]“그래?”
일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주하린이라고 했던가. 던전 공략 정산 회의에서 만났던, 클레어 씨의 동기라던 여자. 그녀가 했던 말엔 분명 오염도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클레어 씨는 도은이에겐 말하지 말라 했지.
그 말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그래. 공부가 됐네. 고마워.”
[오야. 모르는 거 있으면 또 언제든 물어보라구.]전화를 끊자 마침 샤워를 마친 클레어 씨가 도착했다. 머리가 젖어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샤워 직후의 향기가 났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도은이랑 통화하느라 금방이었어요.”
“그래요? 무슨 얘기 했어요?”
“그냥 안부 물었죠.”
그날 밤.
잠든 척 방에 들어간 후 기감을 펼치니 마찬가지로 잠들었어야 할 클레어 씨의 방에서 부산스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내 클레어 씨는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방을 나섰다. 주변을 확인한 그녀는 발소리 하나 없이 집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계단으로 미리 내려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요?”
내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