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제정신인가?
“또 오십셔, 누님!”
“오십셔!”
판잣집 아이들이 일렬도 도열해 일사불란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
샤디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 보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어린 애들이 순식간에 저 깍듯한 태도를 배웠는지. 샤디아는 대답하지 않고 어물쩍 흘려넘겼다.
방랑 검객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다행이라 했지만서도.
이곳에서의 용건은 모두 끝났다. 비단 판자촌뿐만 아니라, 불야성 내에서. 가 볼 만한 데는 모두 가 봤으니 이젠 돌아갈 일만 남았다.
‘마지막이라면.’
내가 방랑 검객을 잠깐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줄 게 있어서.”
여우 가면 위로 손가락을 올리고 약간의 내공을 주입하자, 마력으로 가공된 가면이 똑 하고 깔끔하게 갈라졌다.
나는 갈라진 절반을 떼어 내 방랑 검객에게 내밀었다.
“받아.”
“이건……?”
“필요하지 않나? 나와 싸웠다는 증거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반으로 갈라진 여우 가면이었다.
사실은 어차피 기성품에 불과한 제품이었다. 여유분이라면 몇 개라도 있다. 이미 저번에도 한 번 부숴 먹은 전적이 있었으니.
그러니 방랑 검객도 마음만 먹으면 그럴싸하게 꾸밀 수 있었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직접 내미는 것과는 아무래도 의미가 달랐다. 내가 허락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웬만하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내가 썼던 가면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는 녀석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안심이고.
“…이런 걸 받을 수는…….”
“줄 때 받아.”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감사합니다.”
“그럼 간다.”
내가 등을 돌리자 샤디아가 따라붙었다.
“담에 또 놀자, 누나!”
“놀자!”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샤디아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표정을 바꿔 내게 물었다.
“지금 나 놓고 갈라 그랬지?”
“어떻게 알았냐.”
“너무하네! 하루 종일 부려 먹어 놓고선.”
샤디아가 툴툴거렸지만, 나는 사과하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엔 어땠지?”
내 물음에 샤디아는 지나온 길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뿌렸다.
“분명히, 평범한 애들은 아니지만…….”
나는 방랑 검객에서 사정을 들었으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실험을 자행하는 연구소 출신의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평범한 존재들은 아닐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웃었다.
“자기가 찾는 애들은 아니던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기감을 통해 평범한 아이들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망량이 준 나무 고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으니.
게다가 애들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도 하고.
결론적으로, 불야성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던 셈이다.
‘그 주혁이란 놈은 행방을 알 방법이 없나?’
사실상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지금까지 싸워 왔던 적들 중에서도 ‘파경대계’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은 손에 꼽았다.
그림자 마녀. 그녀는 센터장 영감과도 오래 아는 사이라고 했을 정도로 오래 살았으니 독자적으로 터득했을 가능성이 높았고.
집행부. 주대현 산하의 조직인 만큼 주대현에게 직접 배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혁이란 놈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투기장의 다른 랭커들은 사용하지 못하는데, 혼자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중간에 몇 년인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거라는 언급도 그렇고.
내가 파경대계라는 기술을 처음 본 건 망량의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는 걸 생각하면. 주혁이라는 녀석도 사라졌을 때 이매라는 여자와 만났던 건 아닐지.
‘확실하진 않지만.’
알아두는 편이 좋을 거라고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 * *
“수고했다.”
불야성을 빠져나오니 산 너머로 해가 걸려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오기 직전이었다.
헤어지기 전 샤디아에게 그렇게 인사를 남겼더니, 정작 샤디아는 그게 불만이라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야?”
이 녀석 보게.
또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건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니 샤디아가 억울하다는 듯 토로했다.
“아니, 그렇잖아. 이 야밤에 불러내서 막 끌고 다녀 놓고 보수가 겨우 수고했단 한마디가 끝? 아무리 나라도 이건 수지가 안 맞는다구.”
해괴한 소리가 아니라 정론이었다.
“…뭘 원하는데?”
다행히 돈이라면 어느 정도 모아 둔 게 있었다. 수익으로는 센터장 영감에게 임무비로 받은 게 있는데, 평소엔 클레어의 카드를 쓴 덕에 지출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는 것만 아니라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샤디아가 원하는 보수는 돈이 아니었다.
샤디아가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입술에 붙이고 휙 흔들었다.
“수고했다고 사랑을 담은 뽀뽀 쪽♥이라거나?”
“…….”
하겠냐.
“농담이야.”
내가 정색하자 샤디아도 금세 꼬리를 내렸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릴 줄 알고 그냥 해 본 거였다.
“하여튼 넌…….”
“대신 이건 괜찮지?”
샤디아가 내 뺨에 키스했다. 고양이처럼 잽싼 몸놀림이었다.
“너…….”
“아하하!”
샤디아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들었다.
“쫓아오진 않을 거지? 사슴 같은 아내한테 돌아가서 아침밥 해 줘야 한다며. 늦겠다.”
“…….”
샤디아의 말대로. 조금만 있으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늦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시답잖은 술래잡기를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순 없는 법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자기♥”
그렇게 말한 샤디아가 멀어졌다.
나는 구태여 그 뒤를 쫓지 않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나는 한 가지 위화감을 느꼈다.
‘불이…….’
불이 켜져 있었다. 채광 좋은 유리창 덕에 해가 뜨면 금세 빛이 쏟아지곤 하지만, 아직 그러기엔 일렀다. 집이 밝아 보이는 건 전등이 켜져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안 꺼 놓고 나갔나?
그것도 이상했다. 여긴 혼자 사는 집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라도 클레어가 소등을 했을 텐데.
‘설마…….’
그러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아니. 그럴 리가.’
내가 고개를 저으며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연결된 중문을 열었다.
가능한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그러자 거실은 빛이 빠져나오고 있던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거실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소파에는 누군가가 가벼운 파자마 차림으로 태블릿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클레어였다.
“왔어요?”
인기척을 느낀 클레어가 내게 물었다.
“어… 네. 다녀왔습니다.”
나는 힐끗 시계를 확인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르다면 이른 시간.
클레어는 일정이나 약속이 있을 땐 어떻게든 시간을 지키지만, 휴일 같은 날엔 늦잠이 많은 편이었다. 평일에도 미리 일어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은이 왈, 미녀는 원래 잠이 많은 법이라나.
아무튼. 그런 클레어가 지금 이 시간에 깨어 있다는 것은…….
“…안 잤어요?”
내 물음에 클레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요.”
각성자니까 밤을 샌 정도로 몸이 상하거나 할 일은 없기야 하겠지만.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클레어가 화면을 끄고 내게 다가왔다. 팔짱을 끼고 슬리퍼를 끌고 걸어오는 모습에 나는 바짝 얼어 가만히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날 올려다보던 클레어가 별안간 손가락으로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즈기…….”
여태까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인지 당황하는 사이, 클레어는 손가락을 비비듯 문질렀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건 삐졌다는 걸 표현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나간다고 미리 말해 뒀고. 아침까진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시간도 제대로 지켰는데. 어딜 봐도 화낼 만한 이유는 없었다.
뺨을 꼬집는 걸 그만둔 클레어가 자신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은 내게 보란 듯이 조금 내밀어져 있었다. 의도한 건지 아닌 건지는 몰라도.
“흐음.”
클레어가 서늘한 표정으로 콧소리를 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적으로 불그스름한 염료를 바른 듯 물들어 있었다.
“핫.”
그제서야 떠올라 나도 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내 손가락에도 붉은 무언가가 묻어나왔다.
샤디아의 붉은 입술이 떠올랐다.
‘그때 묻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저기, 이건…….”
“알아요.”
그러나 클레어는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대충 무슨 상황일지 뻔하네요. 보나 마나 당신이 허락한 일은 아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뺨에 그런 걸 묻히고 당당히 들어오진 않았을 테니.”
“…뭐, 그렇죠.”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 놀려 먹기 위한 장난질이라는 거고요. 그 여자 생각은 이제 뻔해요.”
“…그, 그렇군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긴, 우리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데. 이 정도로 흔들릴 건 없죠.”
“…….”
그러자 클레어가 우뚝 멈췄다.
“그럼, 못 믿겠으니까 신체검사라도 한 번 할까요? 옷 벗고 싶어요?”
“…아뇨.”
옷 속에는 흉터가 있었다.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몸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샤디아가 클레어에게 흉터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그 이야기에 대해 들은 게 있다면, 분명히 궁금해서 더 물어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레어는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저번에 한 번, 진실 게임을 하잡시고 술을 마셨다가 떡이 되긴 했지만.
모르는 척해 주는 건가.
“밥이나 해 줘요. 배고파요.”
아니면 진짜 밥이 먼저인 걸지도 모른다.
* * *
“…자네, 지금 뭐라고?”
센터장 최강현이 마주앉은 남자를 향해 물었다.
각성자 지원 센터, 센터장 집무실. 지금 이곳에는 의외의 손님이 와 있었다.
피차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지내던 사이도 아니었던. 몇 번 마주치지 않았던 남자의 방문에 최강현은 의아해하면서도 흔쾌히 남자를 맞이했다.
그리고 집무실 응접 소파에 앉아 접대용 음료를 마시며 남자는 태연한 얼굴로 뻔뻔한 소리를 했다.
“일 좀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누가 들으면 여기가 직업 소개소라도 되는 줄 아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남자의 이름은 백우진.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물론 길드가 분해된 지금은 ‘전’이라는 글자가 붙어야 했고. 듣기로는 어디로도 소속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백수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잠적하고 지낸다고 들었는데.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셨나?”
“비슷합니다.”
백우진이 태연하게 받아 넘겼다.
최강현이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놈은 당최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이 없었다. 떠보는 걸로는 한계가 있었다.
“자네 능력이라면 찾는 이들이 아직 많을 테지. 굳이 이 늙은이한테 와서 부탁할 이유가 있나? 이쪽이 한 일을 잊진 않았을 텐데?”
“…….”
과연. 그 발언에는 백우진도 멈칫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를 무너뜨린 건 공식적으로 헌터 협회의 조사라고 발표되어 있지만. 실상은 최강현이 이끄는 조직이 길드의 비밀을 캐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백우진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부길드장이었던 그로서는 눈앞의 영감이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백우진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자세를 다잡았다. 사실 그는 언제나 진지해 보였지만.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음.”
최강현은 단박에 이해했다.
아직 백우진을 필요로 하는 건 대개 어두운 일을 병행하는 자들이었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한다. 안 되는 일도 어떻게든 되게 한다. 그것이 백우진의 존재 의의였으니까.
그쪽에서 대가로 지불하는 건 대개가 막대한 금액의 현찰이었다.
하지만 백우진은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기 위해 굳이 최강현에게까지 찾아왔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부탁할 게 있습니다. 센터장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보수로 저를 부려 주십시오.”
백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센터장 최강현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이 무욕해 보이는 남자는, 지금껏 자신의 아버지가 가꿔 왔던 길드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 길드가 부서진 지금, 삶의 의욕을 잃고 나자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무슨 부탁을 하기 위해 이렇게 직접 움직이며 고개를 숙이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무슨 부탁인가?”
그러자 백우진이 대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초등학교 입학입니다.”
다소 짧았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최강현이 미친놈 보듯 백우진을 나무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