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34
134화 삐지셨죠?
“지금은 좀…….”
“왜? 칭찬엔 때와 장소가 없는 법이라고.”
“아버지도 있고…….”
가뜩이나 아버지 역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였다면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기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있는 그대로의 본모습이었다.
그 상황에 클레어와 꽁냥거리는 행세를 하라니. 난 못 해.
“자업자득이라고. 그러게 왜 보자마자 하지 않았어? 그때는 둘만 있었을 텐데. 바~ 보.”
그땐 칭찬할 상황이 아니었다. 클레어가 고름을 제대로 묶지 못해서 도와줘야 했으니까.
게다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고. 거기서 칭찬을 해 봤자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거다.
그렇다고 다 입지도 않은 상황에서 미리 칭찬하는 것도 애매했고.
도은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게 생각할 게 뭐가 있어?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고 오라니까.”
“별로 떠오르는 건 없는데.”
“없다고? 진짜로? 어이, 아가씨~ 한복이 이렇게 야한 옷인 줄 처음 알았는데. 크헤헤. 뭐 이런 생각 같은 거 안 들어?”
말하는 꼬락서니 좀 보게.
얘기를 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걱정이었다.
“너는 말투가 왜 이렇게 아저씨 같냐…….”
“오빠가 뭐 보태 준 거 있어?”
하나도 없다.
“말 돌리지 말고. 그럼 흔해 빠진 말이라도 하지 그래, 언니는 그래도 기뻐할 테니까.”
설날이라 들뜬 건지 도은이는 한층 더 집요했다. 이대로 내가 아버지 앞에서 클레어에게 추파를 던지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가족 앞이니까 더 하기 어려운 것도 있잖아.”
“웃기시네. 그건 핑계지. 난 없거든?”
도은이가 자신만만하게 비웃었다.
어쩔 수 없군. 동생과는 지저분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번에.”
“…응?”
내가 무언가 운을 떼자 도은이가 미세하게 반응했다.
겉보기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테지만, 나에겐 거짓말 탐지기 뺨치는 날카로운 감각이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이 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기다.
“로얄 로드에서.”
움찔.
겉으로 드러나는 떨림은 아니었지만. 미세하게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그 젊은 길드장이랑…….”
“…….”
전에 로얄 로드에 갔을 때.
도은이와 함께 있다가 복도에서 비서를 끼고 걸어오는 젊은 남자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가 바로 로얄 로드의 길드장. 그리고 그런 그가 구태여 걸음을 멈춰서 말을 걸었다. 단순한 인사치레나 궁금한 점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도은이에게 흥미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도은이도 예전에 일이 조금 있었다는 말을 했었고. 무슨 내용인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자세히 묻지 않았지만.
“무슨 일…….”
거기까지 말하자 도은이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크게 호흡했다.
“하아. 그래. 알았어. 내가 졌다.”
결국 항복을 받아 냈다.
하지만 더 물러설 수 없는 곳이 있다는 듯 도은이가 당부했다.
“대신. 둘만 남게 되면 꼭 하라고.”
“…….”
“대답.”
“그래.”
내 대답이 영 못 미더운 건지. 도은이가 다시 한번 겁을 줬다.
“내가 나중에 확인한다.”
숙제 검사 하냐고.
* * *
“그러고 보니 설인데 차례 음식은 안 보이네요?”
어디 시골 종갓집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 집 역시 차례상을 준비하는 집이었다.
상에 올리기 위해 과일이나 감 따윌 사기도 하고. 밥과 국 그리고 산적이나 동그랑땡 같은 건 직접 만들기도 했다.
보통 전날에 준비를 모두 마쳐 두지만, 오늘은 설 당일인데도 차례 음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하셨어요?”
내 물음에 아버지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제 안 한다.”
“그래요?”
“시대가 시대이지 않느냐.”
그런가?
요즘은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안도 늘었다고 들었지만, 설마 우리 집도 그런 집이 됐을 줄이야.
그때 도은이가 툭 던지듯 내뱉었다.
“우리 집 차례 안 지낸 지 꽤 됐어.”
“왜?”
클레어가 놀러 오기 때문인가? 외국인에게 밥상 앞에서 절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클레어는 겉보기만 외국인일 뿐. 여기서 나고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나 문화에 익숙했다.
그러니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사람이 있었잖아.”
“…….”
그런 거였나.
실종 처리된 상태였던 나를 제사상이나 차례상 위에 올리는 게 싫어서. 애초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도록 치워 버렸다는 뜻이었다.
이젠 다 옛날 일이라는 듯.
아버지가 무심하게 얘기했다.
“무얼. 생판 모르는 귀신한테 제삿밥 먹인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인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풀었다.
“차례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밥도 안 먹고 쫄쫄 굶을 순 없으니… 슬슬 식사 준비를 시작해 볼까.”
“아. 앉아 계세요. 제가 할게요.”
아버지는 요리사였다. 그것도 해외의 커다란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일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평소엔 먼 이국 땅에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요리에 치여 사는 분이시니. 적어도 쉬는 동안만은 요리 생각 안 하고 지내게 해 드리고 싶었다.
내 나름대로 아버지를 편히 해 드리려고 꺼낸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절했다.
“됐다. 누굴 지금 할아범 취급하는 거냐? 그런 건 손주라도 안겨 준 다음에 하지 그러냐.”
“아니, 저기요…….”
손자 소리에 화들짝 놀라 클레어를 힐끔 보았지만. 분명히 같이 들었을 게 분명한 클레어는 들리지 않았던 척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물론 진지하게 한 소리는 아니라는 듯. 아버지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너한테 맡기고 형편없는 요리를 먹느니 내가 하는게 차라리 속 편하다.”
“뭐라고요?”
그건 가벼이 흘려 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분명 아버지는 요리에 있어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 역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라 자부했다.
“전에는 분명 맛있다고 했잖아요.”
“그건 고기가 비쌌잖냐. 그걸로 맛이 없으면 범죄다. 이번엔 그 고기도 없고.”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저도 그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래 봬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요. 만드는 족족 먹어 치우는 누군가가 있어서.”
“…저기요.”
하지만 내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도, 아버지에겐 가소로운 치기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
“좋죠.”
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주방에 섰다.
이곳은 도은이의 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집이기도 했다. 요리에 진심인 아버지인 만큼, 주방은 둘이 써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뭐야. 갑자기 웬 요리 대결? 둘이 뭐 냉부 찍어?”
“미안하지만 동생아, 사나이에겐 물러설 수 없는 때가 있는 법이다.”
“얼씨구.”
도은이가 염병한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룰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메뉴는요?”
“재료를 보고 스스로 한번 떠올려 봐라.”
여전히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군.
이러면 어웨이인 내가 불리한 거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었지만, 구차하게 그러지 않았다.
어웨이라고 한다면 아버지야말로 늘 어웨이의 전장에서 싸우는 분이었다. 이국의 땅에서, 이국의 식재로, 이국의 요리를 하셨으니까. 그런데도 군말 하나 없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나도 그 아버지의 아들이니. 이 정도로 우는 소리를 할 순 없었다.
아버지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30분 주마.”
분명히 아버지는 그토록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으실 테지만, 그 30분도 나를 위해 시간 여유를 넉넉하게 잡은 거였다.
“어디 한번 날 놀라게 해 봐라.”
“두말하면 잔소리죠.”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드릴 기회였다.
* * *
“이제 나가도 돼?”
도은이와 클레어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두 사람은 심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누가 어떤 요리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도록 방에서 기다리도록 했지만.
‘졌구만.’
결과는 이미 뻔했다.
‘이 능구렁이.’
아버지는 뻔뻔하게도 뵈프 부르기뇽을 준비하고 있었다.
냄비에 소고기와 함께 각종 야채 그리고 와인을 넣고 무려 하루를 푹 재워야 하는 밑 준비가 필요한 요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일이라곤 소고기를 굽고 양파를 카라멜라이징 한 후 다시 약간 졸인 것뿐.
자기는 준비를 다 해 놨으면서 나한테는 무슨 30분을 주겠다느니…….
“이제 깨달았느냐, 아들아. 자고로 군자는 불리한 싸움을 피하는 법이라는 것을.”
“…말을 맙시다.”
하여튼 아버지는 요리에 있어선 인정사정은커녕 자존심도 적당히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요리에 반해 내가 꺼낸 건 남은 소고기와 야채들을 사용해 빵 사이에 끼운 음식.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수제 버거였다.
당연하지만 빵도 햄버거 번이 아니었으니, 이건 뭐 버거도 아니고 샌드위치도 아닌 애매한 물건이 탄생해 있었다.
두 메뉴를 번갈아 보던 도은이가 물었다.
“뭐가 아빠 거고 뭐가 오빠 거야?”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아버지가 어제 하루 종일 스튜를 졸이고 있었을 텐데. 얜 대체 뭘 본 거지? 분명히 집에 냄새가 진동을 했을 텐데.
아버지가 슬쩍 중얼거렸다.
“제 엄마를 빼닮아서. 요리엔 관심도 흥미도 없어.”
“…….”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얘는 분명 개만도 못한 바보가 분명하다.
“이게 오빠가 만든 건가? 아니, 이쪽인가?”
도은이는 요리를 보는 게 아니라 사람 반응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아버지를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답을 알 수 없자 나름대로 짱구를 굴리다가.
뵈프 부르기뇽을 가리키며 외쳤다.
“알았다! 이 잡탕이 오빠가 만든 거구나!”
“넌 그냥 입 닫고 먹기나 해라.”
“…입 닫고 어떻게 먹어?”
바보들은 대꾸하는 말도 똑같은 건가.
사실 애초에 도은이한텐 기대도 안 했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클레어에게로 모였다.
클레어도 이 첨예한 분위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눈치였다.
“저기, 저도 딱히 잘 알지는…….”
괜히 상황을 모면하고자 꺼내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클레어는 실제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집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냉장고에는 식재 대신 식사 대용품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튜브 속에 영양물이 흐물하게 녹아내린 것이.
그래도 도은이보다는 낫지.
“괜찮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돼요.”
아버지와 생각이 일치했다.
우리 두 사람, 아니 이미 평가는 집어치우고 밥을 먹어 치우고 있는 도은이까지. 우리 세 사람 모두의 시선이 클레어에게 집중되었다.
클레어가 두 음식을 차례대로 맛보았다. 요리를 먹고 눈에 띄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되어서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느 쪽입니까?”
나와 아버지가 집요하게 묻자, 클레어가 시선을 마구 흔들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클레어의 앞. 양쪽에 놓인 접시. 클레어는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는… 이쪽 게 입에 맛던데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내가 급하게 만든 조악한 햄버거였다.
“예? 정말요?”
“네? 아, 저기…….”
내가 되묻자 클레어는 대단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다는 듯 체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죄송…….”
클레어가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력이 없는 아버지나 도은이에게는 입을 우물거리는 걸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하지만 나한테 미안할 건 없었다. 그건 내가 만든 거였으니까.
그래도 이 결과는 정말 예상외였다. 이미 진작에 패배를 받아들이고 있었을 만큼, 실력이나 준비 과정에서 차이가 났으니까.
그런데도 클레어가 내 요리를 골랐다는 게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잘된 거 아니냐.”
“예?”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가장 듣고 싶은 사람이 해 줬으니 말이다.”
“…아버지.”
“세상 누구보다 네 요리를 좋아해 주는 누군가가 있는 법이다.”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근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클레어의 입맛은 내가 길들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내가 만든 걸 찾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니까 그 말은.
심사 위원이 클레어라서 편파적인 판정이 나온 거라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 거였다.
“삐지셨죠?”
“…….”
그러자 아버지가 당당하게 주장했다.
“내 요리는 세계에 먹힌다.”
삐진 거 맞네.
아버지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영 서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