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그건 당신입니까
“관두지.”
이런 건 확실히 대답해 두는 편이 좋았다.
원한이니 뭐니 말해도. 역시 난 백우진을 그렇게까지 괴롭힐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성실하게 잘해 나가고 있다면, 의외지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식객이 있을 테지.’
일전, 우연히 백우진을 맞닥뜨렸을 때.
백우진은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먼 친척이라고 대답했던 그 애는, 탐정에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아이. 호적을 바꿔치기 하거나 조작했던 흔적조차 없었다는 말에 따르면.
‘그건 즉…….’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저쪽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쪽은 행정 체계가 미개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현대처럼 전자 기기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쪽 세상, 이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가 호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 손을 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혹시.’
아이들을 데리고 불야성에서 지내고 있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전직 연구원이었다는 그는 연구소에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살고 있었다. 싸움이나 난폭한 분위기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 거기서 살고 있는 건 역시 그 애들에게도 호적 같은 게 없기 때문이겠지.
그와 비슷한 사정을 가진 게 아닐까. 그리 짐작할 수 있었다.
‘의외군.’
백우진은 냉정한 성격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생판 모르는 남을 선뜻 도와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백우진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태여 손을 보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한동안은 지켜보는 걸로 내 안에서 결론이 났다.
최지연이 한숨을 쉬고 내뱉었다.
“어디 눈에 안 띄는 데에서 알아서 먹고살면, 나도 터치할 생각은 없어요.”
최지연의 입장에선 백우진이 굴러 들어온 돌으로 보여도 할 말 없나.
“그러니까 그쪽이 좀 대신 알아봐 줘요. 대체 꿍꿍이가 뭔지.”
꿍꿍이는 네가 갖고 있잖아.
한숨을 쉬면서도, 나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백우진이란 남자에 대해서.
“그건 업무 지시인가?”
내가 그리 묻자 최지연은 질린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부탁인 걸로 해요.”
“그러지.”
승낙이었다.
* * *
“왔습니까.”
주차장에선 백우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대 피울 줄 알고 느긋하게 왔는데. 아니었나?”
어차피 담배도 안 피우는 난 그걸 기다리기도 뭐하니, 대신 최지연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건데. 백우진은 그 시간 동안 딴짓을 하지 않은 것처럼 경직된 자세였다.
내 말에 백우진이 조금 놀랐다는 듯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흡연자라는 거.”
“음…….”
“당신 정도 되는 각성자라면 그 정도는 바로 아는 모양이군요. 감각이 뛰어나다더니.”
백우진은 스스로 납득했다.
잘 피우게 생겼다거나, 몸에 남은 담배 냄새로 알아차렸다거나. 그런 해괴한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다.
“안 피운 지는 좀 됐습니다.”
“…그래? 왜?”
“별 이유는 없습니다.”
백우진이 또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역시 어처구니없는 발언이었다.
금연을 시작한 사람은 으레 장황한 이유와 거창한 목표를 늘어놓기 마련인데. 백우진은 마치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듯 담담한 태도였다.
담배가 피우기 싫다고 안 피울 수 있는 거였으면 그 많은 흡연자들과 금연 문구는 왜 생겼겠냐고.
“갑시다.”
백우진이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올라타려니 조금 생소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평소엔 내가 운전을 해서.”
“당신 정도 되는 각성자가 말입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클레어는 스스로 운전대를 쥔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 도은이가 운전을 해 주니까.
‘…클레어에겐 다른 이유가 있긴 하지만.’
헌터가 아니었어도 스스로 운전대는 절대 못 쥐게 했을 거다.
“출발하겠습니다.”
백우진이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운전이야 누가 하든 똑같지 않나 생각했지만, 백우진은 낡은 중고차도 고급 세단처럼 매끄럽게 모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백우진이 차를 모는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창 밖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백우진 씨.”
정면을 응시하던 백우진이 운전대를 쥔 손끝을 들썩였다.
이름을 불려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이곳엔 나와 백우진,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 가면 쓴 그의 정체를 훔쳐 들을 걱정은 없었다.
“백우진 씨는 왜 이 일을 시작했습니까?”
“저 말입니까?”
백우진이 그리 되물으며 시간을 끌었다.
“전에 있던 길드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었으니. 알고 지내던 다른 업체도 많았을 것 같은데, 왜 센터에서 일하는 건지가 궁금해서요.”
“…….”
백우진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쪽은 절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예.”
왜지? 싸움이라도 있었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약점을 알고 있는 사람을 멀리 하고 싶은 법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
그런가.
플레이아데스는 한국의 4대 길드라 불릴 정도로 거대한 길드였다. 게다가 뒤로는 지저분한 짓도 서슴치 않았던 것 같으니.
그곳의 부길드장 정도 되면 보통 사람은 모르는 이런 저런 정보를 알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길드가 망한 지금, 혼자 남은 백우진은 홀로 위험 정보를 쥐고 있는 위험 요소다. 그렇다고 해서 섣부르게 제거하려 했다간 위협을 느낀 백우진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상호 불가침 상태인 겁니다, 지금은.”
“그렇군요.”
이런 상황에서 상대 쪽 조직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그건 언젠가 틈을 봐서 제거해 주십쇼 하고 목을 갖다 바치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럼 여기는 그쪽이 아니란 겁니까?”
“…모르는 겁니까?”
내 물음에 백우진이 되려 물었다.
“모르는 게 이상합니까?”
“당신 정도 되는 각성자라면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아닌 경우도 있긴 하지요. 다른 지역에서 활동이 길었다거나.”
백우진이 나를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내가 어디 외국에서 활동하다가 최근에 귀국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외국보다 먼 곳에 오래 있었을 뿐.
“비슷합니다.”
“역시 그렇군요.”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애초에 협회와 센터의 차이는 뭡니까?”
“거기서부터입니까…….”
이번에는 백우진도 조금 곤란하다는 듯 목소리에 기운이 빠졌다.
나 역시 클레어의 매니저 노릇을 하며 어느 정도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건 이쪽 업계의 지식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길드나 그 세력 구도에 대한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대해선 자세히 들은 게 없었다.
어쩌다 알아 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은이에게 물어보곤 하면, 알면 다친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었다.
‘다치긴 누가 다친다고.’
그래도 거기서 더 캐물을 순 없었다.
반면 백우진에겐 쉽게 물을 수 있었다. 내가 다른 곳에서 활동이 길었기 때문에 국내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거라는 상황이 깔려 있었으니.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테니. 제가 미리 설명해도 상관은 없겠죠.”
백우진이 운전대를 두어 번 두드렸다.
“당신도 알다시피 협회는 초국가적인 집단입니다. 한국에 있는 것도 결국은 지부일 뿐이죠. 반면 센터는 한국에만 있는 집단입니다. 센터장 최강현 씨가 독단적으로 만든 단체이지요.”
그런가.
생각해 보면 저번에 헌터 협회에 불려갔을 때, 그곳의 수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을 지부장이라고 불렀다.
협회장이 다른 나라에 있는 누군가라면. 국내에서 협회의 최대 권력자는 지부장이 끝이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헌터 협회는 결국 상승 지향형의 집단입니다.”
“상승 지향?”
“전 세계 헌터들의 실력과 수준 향상. 그것이 첫 번째 원칙이라는 뜻입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다소의 저울질 정도는 눈감아 주는 편입니다.”
“저울질?”
“…….”
아니.
미안하지만, 백우진의 말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안합니다. 외국 생활이 길었던 당신에게 표현이 조금 난해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백우진이 숨을 골랐다.
“헌터 협회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단, 너무 대놓고 한다면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니 그걸 숨기는 건 각자의 책임입니다.”
“…….”
백우진이 담담하게 충격적인 소리를 지껄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헌터 협회를 악당으로 몰아가는 이야기라고 들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들으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감사도…….’
클레어는 S급 마석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감사가 들어왔다.
하지만 S급 헌터가 자기가 얻은 마석을 어떻게 사용하건 상관없는 거 아닌가. 심지어 어디 나쁜 일에 쓴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한 건데. 누구 하나 옳지 못한 일이라 할 사람은 없을 텐데도.
그런데도 불려 가서 감사를 받아야 했다면. 그건 협회가 마석을 그만큼 중요한 자원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헌터들의 수준과 실력 향상에 진심이라는 뜻이기도 했고.
“숨기는 게 각자의 책임이라는 건, 그쪽의 경험담인가?”
“…….”
백우진은 잠시 침묵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적발되어 처단당할 때 협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의적인 길을 벗어났다 지탄하기까지 하지요.”
“그렇군. 그럼 센터는…….”
“각성자 지원 센터. 이 집단은 사실 최강현 씨의 독단으로 일궈 낸 집단입니다. 이름 그대로 각성자들의 생활을 지키고 분쟁을 조율하기 위해 만든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우진이 남 일처럼 덧붙였다.
“그만큼 중간에 끼어서 가장 많이 고생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야기가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한국의 4대 길드 중 플레이아데스는 협회와 방향성을 같이하는 집단이었던 말인가.
“그럼 나머지는?”
“글쎄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로얄 로드 역시 던전 공략에 진심인 편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S급 헌터가 이끄는 공략조가 있죠.”
청진명이 이끄는, 클레어가 있는 팀을 얘기하는 거였다.
“반면 천상의 축복은 많은 가디언들이 속해 있기도 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 같으니. 굳이 따지자면 센터 쪽 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대현은?”
“그쪽은 중립입니다.”
백우진이 핸들을 돌리며 차를 꺾었다. 하지만 차체에는 어떠한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목적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가장 튼튼한 자본줄을 쥐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떠한 대의도 내세우지 않는 듯 보입니다. 헌터들의 성장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고요.”
“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백우진에게는 조금 감탄했다.
백우진의 시선은 정확했다.
대현 그룹의 실질적인 수장은 주대현이다. 그리고 그는 마력을 다루는 각성자들을 아무리 육성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사회 안정에 힘 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백우진이 말한 중립이라는 표현도 얼추 들어맞았다.
‘그 자리에서 놀기만 한 건 아니었군.’
낙하산이라던 최지연의 표현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능력이 있으니 그 자리에 앉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저 역시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백우진이 그리 물었다.
“뭐, 마음대로.”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국의 4대 길드라 불렸던 플레이아데스의 전 부길드장께서 지금까지 쌓은 커리어를 통해 관찰한 정보를 몸소 풀어 줬으니. 나도 대답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알려 주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교환과 분업. 인간이 사회를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 행하는 일 아닌가.
“센터에서 길드… 플레이아데스를 무너뜨릴 때 불렀다는 각성자.”
백우진이 차를 세웠다.
네비게이션에서는 어느샌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건 당신입니까.”
백우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