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드디어 당첨이네
“종이컵 가져왔죠? 꺼내 봐요.”
차 안에 있는 백우진을 향해 말했다. 분명 그 근처에 종이컵이 있을 테니까.
웬만한 다른 물건들, 핸드폰을 비롯한 전자기기나 조금만 복잡해 보이는 물건들은 모조리 압수당했다. 임무가 끝날 때 돌려받기로 약속하고.
심지어 볼펜 한 자루까지 모두 다.
하지만 종이컵 정도는 괜찮았다. 그조차도 달리 특별한 장치를 해 두지 않았다는 검사를 받고 나서야 소지가 허락되었다.
그때 허락을 구하려고 백우진이 한 말이 아주 가관이었다.
임무 도중 차 안에서 소변이 마려우면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를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하니까, 불카누스 쪽 보안팀 과장도 질려 하며 허락했다.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이걸로 대체 뭘…….”
백우진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종이컵을 꺼냈다.
어허.
다 쓸데가 있어서 가져오라 한 것이거늘.
창문을 내려 종이컵 묶음을 받아 들었다. 그 중 두 개만 꺼내고 나머진 다시 차에 넣었다.
백우진이 남은 종이컵 묶음을 어딘가에 보관하는 사이. 나는 두 개의 종이컵 사이로 얇게 가공한 내공의 실을 연결했다.
그중 하나를 백우진에게 내밀자, 백우진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
“실 전화.”
“…예?”
백우진이 종이컵의 바닥을 확인했다. 구멍이나 실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엔 온전한 종이컵 그 자체였다.
“이게 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어딘지 못미더운 기색이었지만 백우진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차라리 각성자에 대해 아주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군말 없이 믿었겠지만. 온갖 수준의 각성자들을 대해 본 백우진조차도 이런 묘기가 가능하다는 얘기는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급한 일 있으면 그걸로 연락하고요.”
주변의 분위기와 마력을 탐지한 결과. 당장 위험한 몬스터나 사람. 혹은 독와 관련된 무언가가 검출된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었다.
“창문 올리고 있어요.”
“실 전화라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는 괜찮아요.”
“…….”
백우진이 더더욱 미심쩍다는 듯 종이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하는 말은 잘 들었다. 내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각성자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잘 들리죠?”
[……!]멀찍이 떨어져 시험 삼아 종이컵에 대고 말을 걸자, 백우진이 놀라 부스럭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럼 갑니다, 정찰.”
터널은 앞과 뒤로 향하는 길이 뻗어 있었다. 무언가 다른 공간이나 결계 속에 들어온 건 확실하지만, 그 방향성만은 여전했다.
선택지는 둘.
‘앞으로 갈까, 뒤로 갈까.’
긴 고민은 필요 없었다.
뒤로 왔다면 왔던 길을 되돌아 가게 된다. 터널을 빠져나가게 될 수도 있지만, 내 목적은 탈출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향해야 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소년?”
터널 안.
대열의 최선두를 달리는 차량에서 전방을 가로막고 서 있는 실루엣을 확인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성인이라 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중학생 정도의 소년이라 칭할 수 있는 외형을 가진 아이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
소년은 어딘가 침울하다는 듯이 자세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위를 낼 걸 그랬어, 가위를…….”
자세히 보면 소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주먹은 그대로 멈춰 버린 듯이 굳어서 꽉 쥐어져 있었다.
한편 차 안에서는 무전을 보내기 바빴다.
무해해 보이는 어린아이가 서 있다고 해도. 이곳은 터널 안이었다. 미아가 울고 있기엔 다소 부자연스러운 상황과 장소였다.
이쪽을 향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건 아니었지만. 우연히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연락해.”
“예!”
전방에 미상정 개체 등장.
그리고 전투를 상정한 대기였다.
“아아. 여기는 뿔. 여기는 뿔. 상황 붉은 장미다. 검은 구름을 대비하라. 다시 한번 반복한다. 상황은 붉은 장미. 검은 구름을…….”
그러나 무전기에서는 치지직 거리는 노이즈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누구도 답신을 하지 않는 상태. 연결이 끊겨 있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젠장, 이건 또 왜 이래?”
무전기를 툭툭 쳐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 잔고장이 일어날 정도의 제품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분위기가 맴도는 지금. 최선두의 차량에 탄 대원들은 본부의 지시 없이 내부적으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일단 나가 보지.”
안에 탄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무장을 갖춘 채로 차 문을 열었다.
제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게 평범해 보이는 소년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대단한 마력을 숨긴 각성자일지도 모른다.
겉모습으로 방심을 유도당하는 수준의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 모두 긴장감을 최대로 끌어 올린 채 조심스럽게 소년에게 접근했다.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그러나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시에 불응할 시…….”
“뽑기 시간이네.”
그러다 소년이 갑작스레 고개를 들었다. 곱슬곱슬한 은발 사이로 붉은 안광이 새어 나왔다.
“우선 너희는…….”
소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매끄럽게 전방을 훑었다. 대원들에게는 그것이 마치 커다란 혀가 자신들을 끈적하게 핥아 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싹한 기분을 뒤로하고 누군가 소리쳤다.
“공격 준비!”
터널 속에서 외침 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소년의 목소리는 그사이를 가르듯 메마르게 뻗어 나갔다.
“꽝이네.”
그리고 아무런 소란도 벌어지지 않았다.
선두는 주요 지점인 만큼, 각 역량에 있어 최고를 자랑하는 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적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정찰 대원. 만일의 사비를 대비해 가장 빠르고 멀리 말을 전할 수 있는 파발 대원. 그리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가장 끈질긴 방어력을 가진 대원.
마지막으로 소란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가장 은밀하게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암살 기술에 특화된 대원까지 있었다.
“꽝!”
소년이 주먹을 뻗었다.
얇은 팔을 뻗어도 아무런 압력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뒤이어 나타난 거대한 주먹이 터널을 강타했다.
터널을 가득 메운 힘의 격류가 인간의 몸을 간단히 짓이겼다.
그렇게 대원들은 모두 소년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 채로 명을 달리했다.
“역시 가위를 뽑을 걸 그랬어.”
소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어 나갔다.
* * *
‘경계로군.’
전방을 향해 걸어나가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력의 막이 느껴졌다.
손을 대 보면 이것이 일종의 미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로 앞에 있는 공간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그리고 그 끝은.
‘저 뒤쪽.’
즉. 이 공간 내부를 계속 돌도록 만들어져 있는 결계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런 공간이 하나 두 개가 아니었다. 경계로 나누어진 이 구역에 백우진과 내가 탄 차량 단 하나만 있다는 건, 이런 경계가 차량 대수만큼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두 뿔뿔이 나눠서 쳇바퀴를 돌도록 한 다음. 뭘 할 생각인 건지는.
“하나씩 까 보는 건가.”
[예?]모두 모여서 작당을 하면 귀찮다고 여길 만도 했다. 힘을 합쳐 덤비든, 그렇게 시선을 끄는 사이 물건을 빼돌려 달아나든.
그리고 그 확인 작업은 가장 앞에 있는 차량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냄새가 나.’
간만에 맡아 보는 진한 혈향이었다.
이곳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게 아니라면, 범인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실 전화에 대고 상황을 설명했다.
“전방에 결계가 있습니다. 안쪽에 갇혀서 같은 길을 계속 달렸던 겁니다. 다른 차량도 같은 상황일 겁니다. 여기 있으면 다른 일이 없는 이상 안전할 걸로 보입니다. 일단 앞쪽에서 일이 터진 것 같으니 보고 오겠습니다. 연락은 안 될 겁니다.”
앞으로 가서 해결한다면 여기 있는 백우진은 달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이해했습니다.]백우진의 응답을 듣고 경계를 넘었다.
실 전화의 연결은 잠시 끊어졌다. 경계를 넘는다 하더라도 연결할 수 있긴 하지만.
‘눈치채겠지.’
억지로 연결고리를 뚫어 놓으면 이상을 감지할 확률이 높았다.
가볍게 몸만 몰래 넘어오니, 바로 앞 구역에서는 불카누스의 사장 임수길이 도로에 나와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젠장…….”
그런 임수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바로 앞에 있었습니까?”
“그래, 이 자식아! 앞으로 가면 뒤에서 나오니까 내가 네 앞에 있겠지! 아까 몇 번이나 반복해 봤잖아, 이 금붕어 대가리… 헉!”
소리를 지르던 임수길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 숨을 삼켰다.
“어, 어디서…….”
“어디서긴요. 저쪽. 넘어서 왔죠.”
나는 등 뒤의 경계를 가리켰다.
임수길과 함께 탄 자들은 불가능한 모양인지 깜짝 놀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역시…….”
임수길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장과 함께 탄 대원들에게 물었다.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거. 다른 분들은 불가능했습니까?”
“…예.”
“그렇군요. 그럼 저 혼자 넘어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넘어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곳에서 얌전히 있어 준다면 차라리 신경 쓸 게 적어져 다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물어볼 게 한 가지 있었다.
“물건은 어딨죠?”
“무, 물건이라면…….”
“수송하려던 물건. 어느 차량에서 보관하고 있느냐는 뜻입니다. 사장인 당신이라면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딘지.”
임수길이 대답을 미루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걸 알아야 하나?”
“알면 일이 단축될 수도 있죠.”
해당 차량이 나올 때까지 쭉쭉 나아가면 번거롭게 확인 작업을 거칠 필요가 없으니.
혹시나 이만한 짓을 벌여 놓고, 그게 모두 시선 끌기에 불과하고 물건만 훔쳐 달아날 생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고뇌에 잠긴 임수길이 결국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실토했다.
“바로 여길세.”
“그렇군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장의 말을 허락 삼아 내공을 뻗어 확인해 보니, 사장이 탔던 차량의 트렁크 쪽에서 기운을 차단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엄중한 보관 장치인 모양이지.
가장 중요한 물건을 탄 차량에 사장 본인이 직접 탄다라. 이걸 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당당하다고 해야 할지.
게다가 내가 탄 차량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차량.
‘의외로 신뢰받고 있었군.’
여차할 때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건이 있는 장소를 알았으니. 이런 짓을 벌인 범인이 여기까지 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좀.’
사장과 물건이 있는 장소에서 일을 벌이긴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았다.
사람도, 물건도 지켜야 했고. 정체도 계속해서 숨겨야 했으니.
게다가 이번엔 범인 쪽에서 물건을 들고 내빼려 할 수도 있다. 도망치는 놈을 쫓는 것도 내키지 않았으니, 이곳에 물건이 있다는 걸 들키기 전에 해치우고 싶었다.
사장에게 전했다.
“전 앞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은 여기서…….”
“혼자 가겠다고? 그러지 말고 같이…….”
그때.
앞쪽에서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있다는 것은 귀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무공을 익힌 몸이라 귀가 예민해서도, 내공을 통해 주위를 미리 파악하고 있어서도 아니라.
찰박거리는 소리가, 불현듯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소리는…….’
얕은 물가를 거니는 소리.
하지만 차가 지나다니는 고속 도로. 비가 왔던 것도 아니고, 산길이었던 이곳에 물웅덩이 따위가 있는 건 부자연스러웠다.
이 소리는 분명, 신발 밑창에 무언가 질퍽한 것이 들러붙어 나는 소리였다.
“이야~”
소리의 주인이 터널의 주황색 불빛을 받으며 등장했다.
“드디어 당첨이네.”
은발의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