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이런 거 좋아하지?
“바쁜 건 이쪽인데 말이야.”
소년이 눈썹을 모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곤란한 참이었다. 이곳에서의 일이 너무 지루하게만 흘러가서, 후딱 해치우고 다른 곳에 가서 재미를 좀 보려고 했더니.
날파리 같았던 눈앞의 상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흐음…….’
그다지 환영하고 싶은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도 잠시. 소년이 다시금 생각을 고쳐 먹었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좋잖아?’
애초에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굳이 이곳까지 놀러온 거였는데, 재미가 없어 다른 곳에 가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여기서 재미를 볼 수 있다면야,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좋은 건 좋다 치고.’
상대가 갑자기 의욕을 되찾은 건 칭찬해 마땅한 일이었지만. 소년은 한 가지 불만으로 입가를 비스듬하게 끌어 올렸다.
“건방진데, 너.”
소년의 말에 도율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누군가에게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의아한 일이었다. 물론, 상대가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긴 하지만.
소년의 손가락이 도율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진심을 내기만 하면 나 같은 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그 태도.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어.”
“…….”
그런 얘기였나.
도율이 숨을 가볍게 내쉬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몸 안에서 잔존하던 기(氣)가 맹렬히 회전하며 그 존재를 과시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상황을 보던 것과는 전혀 상이한 흐름이었다.
“건방진지 아닌지, 보면 알겠지.”
“너…….”
소년은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도율이 보이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소용돌이치는 힘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쪽 인간이었냐?”
소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대부분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력(魔力)이 아닌, 내공. 그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그 존재를 아는 듯한 자를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공이라는 생소한 힘을, 이 세계에서도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대현 그룹의 회장, 주대현이 알고 있었고. 백귀의 주인, 망량이 같은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눈앞에 있는 상대 역시, 그 정도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상대로부터 캐내고 싶은 정보가 많았지만.
“말했지.”
도율은 대화를 선택하지 않았다.
“떠들 시간 없다고.”
도율이 몸을 날렸다.
* * *
“오늘인가.”
새벽.
해가 짧은 시기엔 동틀녘이 늦어, 이른 시간에는 아직 어두웠다.
어스름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청진명이 창을 놓고 꼿꼿하게 앉아 눈을 감고 있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한쪽 눈을 떴다.
눈꺼풀 속에 잠겨 있던 눈동자는 암순응이 끝나 있어, 어둠 속에서도 상대가 누군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런 꼭두새벽부터 길드원을 격려하러 온 거야?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지.”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로얄 로드의 젊은 길드장.
최윤호였다.
대한민국의 4대 길드. 아니, 이제는 3대 길드라고 불리는 대형 길드 중 하나인 로얄 로드를 전두지휘하는 인물이었다.
일과 시간이 아닌 이른 새벽. 대동하는 비서도 없이 나타난 최윤호를 향해 청진명이 물었다.
“잠은 제대로 자는 거야? 나야 각성자니 워낙 튼튼하다 쳐도. 그러다 몸 상한다.”
“문제 없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최윤호가 적은 수면 시간을 독한 카페인으로 메우는 건.
그렇다고 잔소리 한다 해서 들을 인간도 아니었다.
‘떠들어 봐야 나만 입 아프지.’
청진명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소용 없는 일에 힘을 쏟지 않았다.
“젊다는 게 좋긴 좋구만.”
최윤호는 다른 길드장들과는 다르게 젊다 못해 어리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나이가 적었다.
그러나 그가 다른 길드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로얄 로드라는 거대한 길드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로얄 로드라는 평범했던 길드를, 수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4대 길드 중 하나의 위치에 끌어올린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로얄 로드를 이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이끌면 로얄 로드가 되기 때문.
물론 거기에는 청진명을 비롯한 S급 헌터들의 활약 또한 빼놓을 순 없었지만,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청진명은 헌터들 중 넘버 원이지만.
최윤호는 온리 원이라고.
“몸조심해라. 그러다 쓰러지면 난리 난다. 안 그래도 요즘따라 별의별 일이 많은데.”
원래는 4개로 맞물려 있던 대형 길드 사이의 힘의 균형이 한순간에 깨지질 않나. 음지에서는 음지대로 오랜 세월 암약하던 마녀 하나가 사라지질 않나.
최윤호가 쓰러지면 로얄 로드 역시 어떻게 될지 몰랐다. 꼭 외부에서의 공격만이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내부에서 길드를 홀랑 집어삼키려는 이들 역시 없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최윤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알잖아. 그런 건 내 관심 외라고.”
“…그렇겠지.”
청진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4대 길드 중 하나를 갖고 있으면서. 당장에 은퇴하더라도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으면서.
로얄 로드의 길드장 최윤호는 그 무엇 하나 욕심내지 않았다. 심지어 길드조차도.
장악이 아니라 성장. 최윤호가 길드에 바라는 점은 그 하나뿐이었다. 덕분에 외부에서는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이라느니 하는 소릴 하며 최윤호를 성인군자라도 되는 듯 추앙했지만.
‘반대로 그래서 미워하기도 하고.’
가끔 있었다.
헌터 업계의 주역은 헌터이며, 고작 일반인인 최윤호 따위가 청진명이 가졌어야 할 영광을 나눠 누리게 해서야 되겠냐고 말하는 이들이.
‘속이 빤히 보이는 말들이지.’
돌려 말하고 있지만. 로얄 로드의 몰락을 원하는 이들의 얕은 이간질에 불과했다.
청진명과 최윤호. 두 사람 사이의 불화가 싹트기만 한다면, 로얄 로드는 지금과 같은 위상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테니.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단순한 비즈니스인 것도, 그렇다고 학연이나 지연 같은 얄팍한 관계로 묶인 것도 아니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최윤호의 말이었다.
이상한 표현이었다. 청진명과 최윤호는 지금까지 제법 오래 함께 손발을 맞추며 수많은 던전을 공략했다.
그러니 시작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청진명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디어 시작이라는 최윤호의 말대로. 지금까지 했던 일은 모두 밑거름에 불과했다.
오늘 있을 던전 공략은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팀원을 선별하고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정보를 모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면.
오늘의 일은.
“선전포고.”
최윤호가 단어를 씹듯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분노화 회환. 지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약간의 환희가 감돌고 있었다.
눈빛이 탁한 건 피곤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감정으로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일까.
“복수극의 개막이다.”
복수극(復讐劇).
청진명과 최윤호.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키워드였다.
최윤호의 복수는 청진명의 복수이기도 했다. 그러니 청진명 역시, 결코 다다를 수 없었던 일의 시작에 발을 걸치게 된 것에 기뻐해야 할 터였는데.
최윤호가 보이는 반응만큼 기쁘지가 않았다.
‘윤호야.’
이제는 최윤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최윤호는 길드장이었다. 그것도 어중이 떠중이 길드가 아니라, 로얄 로드라는 대형 길드의. 비싼 정장을 걸치고 곧게 선 자세.
근거투성이인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해묵은 피로가 새겨져 있었다.
청진명이 기억하는 최윤호의 옛 모습은 이렇지 않았다.
지금보다는 훨씬 어렸고, 그만큼 순수했다. 그때의 어수룩한 청년이 지금의 거물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땐, 조금 노려봤더니 안색이 파랗게 질려 쫄기까지 했었다.
‘그땐 좀 웃겼는데.’
지금의 최윤호는, 사회적으로도 성공했고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한 실력을 갖춘 경영자였지만.
‘알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다.
그래도.
왠지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여기!”
쾅-!
소년이 허공에 손바닥을 내리치자, 도율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떨어졌다.
도율이 그 공격을 피하자 곧바로 다음 공격이 날아왔다. 두 개의 손을 가진 소년이 반대쪽 손을 두 개만 곧게 펴서 가위를 만들어 냈다.
“싹둑싹둑!”
허공에 바람을 찢는 듯한 소리가 휘몰아치며 절삭력을 가진 파동이 나타났다.
도율 또한 손가락을 폈다. 이건 단순한 손짓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 아니었으니. 내공을 담아 칼날을 만들어 냈다.
“여뢰(如雷).”
천둥과 같이 파괴적이고, 번개와 같이 재빠른 칼날. 한발 앞서 발한 검격조차 따라가 마주 베어 냈다.
키이잉!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찢어질 듯한 검명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앞뒤라고.”
소년이 주먹을 마주 부딪쳤다.
그러자 거대한 두 개의 주먹이 도율의 정면과 후방을 동시에 덮쳤다. 빠져나갈 공간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도율은 아까처럼 촐랑촐랑 도망다닐 생각이 없었다.
“어어? 얌마!”
피하지 않는 도율을 보며 오히려 소년 쪽이 당황했다. 여기서 이렇게 쉽게 픽 당하면 허무해서 재미가 없으니까.
그러나 도율에게는 괜한 걱정이었다.
몸을 반의 반 바퀴. 직각으로 돌려 앞뒤로 오는 공격을, 구부정하게 뻗은 두 손바닥으로 각각 받아 냈다.
손바닥으로 감기는 힘을 포착하자마자 도율의 팔이 회전을 그렸다. 위와 아래로. 대칭을 그리는 듯한 문양을 흉내 내자, 그 거대한 파괴력이 도율의 손에 이끌려 방향을 틀었다.
각각의 힘이 천장과 바닥을 때리며 다시 한번 지축의 흔들림을 만들어 냈고.
“아륜(牙輪).”
그 틈을 파고든 도율이 소년의 몸뚱이에 손을 뻗었다. 흉포한 기가 손아귀에 걸리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기 위해 이빨을 드러냈다.
“앗차.”
그러나 소년이 몸을 내빼며 피했다.
“하핫.”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하!”
싸우다 말고 갑자기 무슨 짓인지. 도율이 움직임을 멈추고 소년의 행색을 살폈다.
‘머리가 이상해졌나?’
몇 번인가 제법 강한 기술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피차 큰 피해 없이 넘어갔다. 머리를 세게 쳤던 기억은 없었다.
소년이 웃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맛이지!”
즐거워서였다.
에테리움 파편의 회수. 놀이만도 못한 지루한 나들이가 될 것이 뻔하기에, 일부러 다중 결계를 만들어 나름의 놀이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재미는 없었다. 인간들은 도박이란 걸 하면 그렇게 재밌다고 하던데. 그건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거였다.
어차피 모두 힘으로 치워 버리고 가져갈 수 있다는 걸 아는 상태에서는, 뭘 어떻게 해도 즐길 만한 일로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의외의 만남. 도율과의 싸움을 벌이며 소년은 만족할 만한 즐거움을 누렸다.
“그런데 너 말야, 아직도 영 소극적인 것 같은데.”
소년이 턱을 더듬었다.
“소모가 심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상한이 거기까지인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리 짐작하던 소년이 물었다.
“아직도 사람들을 걱정하는 거야?”
“…….”
결계가 무너지지 않을까. 이곳이 파괴되어 다른 사람들이 도망칠 틈도 없이 생매장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소년이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실례네. 튼튼하다고, 내 결계는.”
“모르는 일이지.”
내가 전력을 내면 튼튼하다고 자부하는 네 결계도 어떻게 될지.
도율이 그런 의미를 담아 말하자, 제대로 자존심을 자극당한 소년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할게.”
소년이 손가락을 튕겼다. 결계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겠지만. 그게 뭔지 도율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소년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지금부터. 네 뒤에 있는 인간들을 모두 죽일 거야.”
“…….”
“아, 물론 찾아가서 죽일 건 아니고. 지금 여기 서서 너한테 큰 거 한 방 날릴 거거든. 막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을걸?”
소년은 도율이 할 일을 가르쳐 줬다.
“너는 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큰 거 한 방 나한테 쏘면 돼. 걱정하지 말어. 어차피 내 뒤로는 시체밖에 없거든!”
“…….”
그거 참 듣기 좋은 소식이었다.
“너희 인간들은 이런 거 좋아하지? 딜레마라고 하던가? 줄줄이 죽는 거.”
소년은 딜레마를 선로 위에 있는 사람들을 줄줄이 죽이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틀린 것도 모르고, 소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 보자고.”
소년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