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올 거라고 믿었다고
“그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입니까? 장서주(長逝主).”
한 여성체가 침착한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분명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농담거리라면 화제를 잘못 골랐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감히 입에 담아도 될 내용이 아닙니다. 당장 철회하십시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그리 쏘아붙였다.
그러나 장서주라는 별칭으로 불린 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담담히 고했다.
“농담이 아니다, 수월주(水月主).”
그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조각을 도둑맞았다.”
“하…….”
장서주의 확언에 수월주가 치가 떨린다는 듯이 흔들리는 숨결을 내뱉었다.
같은 자리에 있던 은발의 소년이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인 듯, 뒤통수에 손을 얹고 물었다.
“으응? 도둑맞았다고? 설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애들도 아닐 테고. 도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이?”
그러자 장서주가 고개를 저었다.
“동족의 짓이 아니다.”
“아니라고?”
은발의 소년, 라크자르가 의아하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라크자르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수월주는 그 이야기만 듣고도 사건의 전말을 예측할 수 있었는지 빠득 이를 깨물었다.
“하찮은 야만 족속 무리가……!”
“아~”
수월주의 반응에 라크자르도 그제야 이해하고 탄성을 뱉었다.
수월주가 하찮은 야만 족속이라고 부르는 이들이라면, 그 대상은 뻔했다.
던전과 게이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된 세상의 존재들.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르는 그들을 칭할 때 쓰곤 하는 말이었다.
“진짜야? 와! 완전 신기해!”
라크자르가 눈을 반짝였다.
인간이라고 한다면, 마력을 깨우친 지 아직 몇십 년도 되지 않은 종족이었다.
수천 년 이상 마력과 함께 문명과 역사를 쌓아 온 그들에게 있어선 진화가 덜 된 생물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수월주가 괜히 야만한 존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라크자르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유리로 된 상자 안에 만들어진 개미굴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벌써 그 정도로 성장한 거야? 빠르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왜, 재밌잖아.”
그 일에 대한 다른 이들의 감상이 어떠하든.
장서주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이 일의 후속 처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사도.
동등한 자격을 지닌 자들이지만, 그들 사이에서 협력과 결정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암묵적으로 장서주가 조율을 도맡았다.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파편의 회수와…….”
“징벌이겠군요.”
수월주가 말을 잘랐다.
“그래.”
장서주의 긍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월주가 강하게 주장했다.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겉보기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목소리와 말투에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수월주는 이글이글 불타는 분노에 잠겨 있었다.
모처럼 의욕을 내고 있는 지원자가 있으니. 그리 결정해도 좋아 보였다.
“그렇게 하지.”
“에이. 나도 하고 싶은데!”
의외로.
협조나 성실함이라고는 거리가 먼 라크자르 역시 자원했다.
그러나 장서주가 이런 저런 판단을 내리기 전, 한 발 앞서 수월주가 먼저 라크자르를 막아섰다.
“당신은 파편의 회수나 맡도록 하세요.”
“뭐? 싫어. 나도 그 훔쳐 갔다는 애들이 어떤지 보고 싶은 거란 말이야.”
수월주와 달리, 아주 장난기 넘치는 동기.
수월주가 지적한 건 그 지점이었다.
“당신이라면 또 시답잖은 놀이나 하다가 일을 그르치겠죠. 이번 일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진지하게 임할 각오가 없다면 물러서세요.”
“나도 진지하게 재밌을 것 같다고!”
라크자르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수월주가 장서주를 노려봤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장서주 또한 수월주에게 맡기면 일을 철저하게 처리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라크자르의 기분대로 해 주지 않았다가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그 역시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승부해라, 가능한 온건한 방법으로.”
두 사람이 전력으로 힘을 쓰면 주변 가재가 남아돌질 않을 게 뻔했으니.
“아, 그거라면 내가 재밌는 거 알아.”
라크자르가 손을 들었다.
“알아? 인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위 바위 보라는 게임인데. 이게 가위. 이게 바위. 그리고 이게 보야. 하나 둘 셋 하면…….”
라크자르가 인간계에서 배웠다는 게임을 소개했다.
“별 잡스러운 놀이가 다 있군요. 이런 미개한 놀이로 해야 하는 건가요?”
수월주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확실히 단순히 손을 숨겼다가 정해진 모양대로 보여 주기만 하는 게임이라면 주변이 망가질 일도 뭣도 없어 보였다.
장서주가 허락했다.
“그걸로 해라.”
“…….”
근본이 성실한 수월주는 장서주의 말대로 그 놀이를 받아들였다.
‘키힉힉. 바보.’
라크자르가 남몰래 웃었다.
‘이 게임엔 필승법이 있거든.’
인간이라는 자들의 문화에 좀 더 익숙한 라크자르이기에 알고 있는 가위 바위 보의 숨겨진 팁이었다.
“그럼 내가 신호하지. 셋, 둘.”
라크자르와 수월주가 오른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건 바로…….’
장서주가 손을 내리쳤다.
“하나!”
라크자르가 주먹을 뻗었다.
‘처음엔 주먹을 낸다는 것!’
물론.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 * *
“누구냐?”
청진명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를 가진 낯선 인물은, 대답하지 않고 같은 요구를 반복했다.
“손, 떼라고 했을 텐데요.”
청진명이 문으로부터 손을 뗐다.
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는 보통이 아니다. 본능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으니, 한가롭게 문에 손을 올릴 때가 아니기도 했다.
짙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굽이치듯 바닥까지 닿아 있었다. 얼굴은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했다. 눈을 뜬 채로 잠이 든 듯한 인상.
심지어 긴 치맛단이 길게 끌려오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꼴을 하고 싸우러 온 거냐.’
하고 핀잔을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청진명은 감히 그런 말을 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상대를 가늠하며 청진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쪽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쪽도 질문에 답하는 게 어때. 누구지?”
그러나 여자는 오만한 태도로 무시했다.
“알려 줄 이유는 없겠죠.”
“고상하게 생겨서는 째째하구만.”
그러자 여자가 잠시 침묵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의외로, 째째하다는 말이 심기를 거스른 듯했다.
“첫째. 내 이름은 당신들 같은 하찮은 자들에게 밝힐 정도로 가볍지 않습니다.”
그 말에 분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곳에 장비도 없이 마실 나오듯 걸어 나온 여자였다.
겉모습이 인간과 비슷하다고 해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했다.
“그리고 둘째.”
분명하게 적의를 담은 말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제 곧 죽을 자들에게 가르쳐 준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단 한 명이.
청진명의 팀을 몰살하러 왔다는 것을 선언했다.
코웃음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있는 힘껏 허세를 부려보려 해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당장 대화가 통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런 것치곤 꽤 이야기에 어울려 주고 있잖아.”
“아, 그건. 당신들이 무지 속에서 죽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선행이 아닌, 어디까지나 이유가 있어 하는 하는 행동이라는 말.
그녀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기도를 하는 듯한 경건한 자세였다. 단정한 얼굴이 신실한 분위기에 한층 더 힘을 실어줬다.
자애를 노래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알지 못하고 죽어선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징벌에 의미가 없지요.”
“죄?”
청진명이 그리 되묻자, 그녀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겁니까? 당신들이 지은 죄를.”
청진명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 우리가 그쪽 친구를 너무 많이 죽였다던가?”
“누가 그딴 것들이랑 친구라는 겁니까.”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고 일갈했다.
고등한 종족과 그렇지 못한 종족 사이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청진명, 아니 인간이라 불리는 족속이 꾸린 헌터라는 자들이 던전과 게이트를 드나들며 사냥한 몬스터들 중, 그녀가 친구라 일컬을 만한 존재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 모욕에 가까운 일이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서인지. 짧게 한숨을 내쉰 후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위대한 조각에 감히 손을 댄 죄. 잊었다고 하지는 않겠죠.”
위대한 조각.
부르는 말은 달랐지만, 청진명은 그게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에테리움 파편.
최근 팀에서 얻은 것 중 가장 희귀한 거라면 바로 그것이었다.
비밀을 깊이 파헤치기도 전에, 마력을 지배하는 성질이 있다는 것부터 발견될 정도의 물건. 분명히 제대로 활용하면 보다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손에 넣은 보물을 이리저리 굴리는 건 청진명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쪽은 알아서 하라고 헐값이나 다름없는 가격에 넘겼는데.
‘대단한 물건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거물께서 마중을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게 물러설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전투 준비.”
청진명이 창을 쥐었다.
여자도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반응했다.
“후회하며 죽도록 하세요. 죽은 후에도 후회하도록 하세요.”
저주를 담은 말과 함께.
투명한 물과 같은 마력이 가득 퍼져 나갔다.
* * *
“어이! 누구 들리는 사람 있으면 대답해!”
검은 공간에서 청진명이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건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법 넓은 공간이군.’
벽이 있었다면 메아리쳐서 들렸겠지만, 그런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청진명이 발끝으로 바닥을 꾹 짓눌렀다.
‘단단하고 매끄럽다.’
공간 자체가 위험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사방이 어두워도 자신의 모습은 똑바로 보였다. 의아하지만 일단은 받아들였다.
‘일단 이동할까.’
청진명이 앞을 향해 걸었다.
끝을 모를 정도로 넓은 공간인 것 같지만. 자신의 모습이 똑바로 보이는 걸 보니, 걷다 보면 뭔가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도 발견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치지는 않았지만,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정처 없이 걷기만 했다.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된 걸까. 자신처럼 이런 어두운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걸까.
‘여기서 나가려면…….’
탈출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벽 같은 건 만난 적이 없었고, 천장 역시 없어 보였으니까.
보이는 건 오직 자신의 모습 뿐.
어둠에 완전히 적응한 듯한 눈에, 시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일 뿐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확인하던 청진명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렇군.”
창을 양손으로 쥐었다.
겨누는 곳은 바닥. 자신이 디디고 있는 바닥이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건.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창이 다른 손에 쥐여져 있었다.’
창을 한 손으로 들고 다닐 때 주로 쓰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이곳은 수면 아래의 세계.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수면에 맺힌 상, 그걸 지우는 방법은 파문을 만들어 흔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청진명에게 있어, 파도를 만드는 건 가장 익숙한 일 중 하나였다.
마력이 나선형으로 창 주위를 휘감았다.
“깨져라!”
바닥을 향해 힘껏 창을 찌르자, 아무런 피해도 없었을 자신의 모습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흔들림은 더욱 강해져. 이윽고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흩어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을 무렵.
풍덩!
물에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졌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듯 새로운 바닥 위에 착지한 청진명이 주위를 둘러봤다. 이번엔 새하얀 공간이었다.
아까의 반복인가 했지만 이번엔 제대로 창을 쥐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수상하게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같은 수법에 두 번 속진 않는다.
‘그럼 여긴 뭐지?’
청진명이 의문을 품은 순간.
“여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어서.
청진명은 등 뒤를 돌아보는 일이 껄끄럽다고 느껴졌다.
“올 거라고 믿었다고.”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과 쏙 빼닮은 남자였다.
“반갑다, 나.”
호수에서 빠져나온 상(像)은.
하늘 위에 있는 진짜 자신을 마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