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건방지게
“나, 라고…….”
청진명이 중얼거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자신과 완전히 닮은, 또 다른 한 명의 청진명.
S급 헌터로 숱한 던전을 공략해 온 청진명에게 이런 상황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자신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 상대들을 마주한 적 정도는 몇 번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것들은 한낱 환영에 불과하거나. 어설프게 겉모습만 흉내 낸 미달품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오히려 자신과 완전히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반면 저쪽은 여유로운 태도로 농담 같은 인사를 건넬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저게 자신이라면, 다짜고짜 싸움을 시작할 리는 없었다. 그렇게 판단한 청진명이 질문했다.
“넌 가짜지?”
그러자 상대 쪽에서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상처 받잖아. 뭐, 맞지만.”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걸 보니, 상대 쪽에도 제대로 인식이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가 진짜냐는 논쟁으로 실랑이를 벌이기라도 하면 곤란하고 귀찮았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가짜 청진명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여기서 이긴 사람이 진짜가 된다거나. 그런 소리는 안 하는 거겠지?”
“따분하게 그런 소릴 해서 뭐 해. 어차피 난 여기서 나갈 수 없는 몸이다. 그리고, 사실을 말하자면 너와 나는 달라.”
“다르다고?”
청진명 또한 느끼고 있었다. 겉모습도, 습관도, 가지고 있는 재능도 모두 비슷해 보였다. 콕 집어서 말하자면 ‘결’이 비슷했다.
하지만 그것뿐. 자신과는 어딘가 다른 남자였다. 같은 청진명이라는 인간을 토대로, 어딘가 한 군데를 바꿔서 살아가게 만든 것 같은.
그런 다른 세상에서 데려온 것 같은 인상을 받고 있었다.
“난 완벽한 너다.”
“…뭐?”
자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자아도취적인 소리를 지껄이는 광경은.
상당히 메스꺼웠다.
가짜 청진명 쪽도 그걸 아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사실이니까. 세간에선 국내 최정점에 선 헌터이고, 세계적으로 견줄 강자들도 몇 없는 너라도… 있잖아? 실패했던 적이나, 후회하는 일이.”
“…….”
이 남자의 기반이 된 것이 자신의 존재라면.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어차피 둘밖에 없는 공간이다. 청진명은 시원스레 인정했다.
“그래.”
“난 실패하는 일 없이 탄탄대로만 걸어왔던 세계의 너다. 실제로 그런 세계가 있는지 없는진 모르겠다만, 그런 설정이라는 거지.”
가짜 청진명은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현실감 없이 붕 뜬 듯이 얘기했다.
“던전 못 깬 거 없고. 동료 잃은 적 없고. 게이트도 다 제대로 막아서 국민 영웅을 넘어선 신 취급을 받고 있지. 지금까지 손에 넣었던 마석은 모두 적재적소에 사용해 장비나 능력도 최고치다. 그리고 아는지 모르겠는데, 초월 각성이나 에테리움 엔진도…….”
그렇게 하나 하나 설명하던 가짜 청진명은 곧 흥미를 잃었다는 듯 설명을 종료했다.
“뭐, 그런 거다.”
들으면 감이 오는 영역에서부터,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부분들까지.
청진명은 눈앞의 상대가 자신과 같은 출발선에 섰지만, 이미 저 멀리 뻗어 있는 상태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그 완벽한 나에게 부탁이 있는데, 져 주는 건 안 되겠냐?”
청진명이 뻔뻔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자존심 이전에 동료들을 챙겨야 하는 몸이었다. 다른 이들도 각자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면. 상당한 고난을 겪고 있을 테니까.
동료를 돕기 위해서라면 다소 비굴한 꼴을 겪더라도 상관 없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러자 가짜 청진명이 안타깝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봐. 나는 너라고.”
가짜 청진명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또 다른 자신과 싸워 볼 수 있는 거다. 너라면 이런 재밌는 기회. 그냥 넘어가겠어?”
“…….”
청진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또한 재밌을 것 같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쪽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그 기대감을 접어두려 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양보할 생각이 없다면 결국 상대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청진명이 창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더럽게 귀찮은 성격이구만, 나는!”
그러자 가짜 청진명 역시 자세를 잡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청진명과 완전히 동일한 자세. 그런 그가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자업자득이라고, 어이.”
곧이어.
파도와 파도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 * *
“하, 이게 나라고?”
그 말을 한 건 상대방 쪽이었다.
송민아가 마주한 건 지금보다 머리가 짧고 눈매가 날카로운, 선머슴 같은 인상의 자신이었다.
그런 또 하나의 송민아가 가시 돋친 태도로 자신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송민아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싸가지가 없었나?”
그건 과거의 자신이었다.
옛날. 송민아는 각성자였지만 헌터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대신 각성자 범죄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집단, ‘가디언’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사관학교 출신의 엘리트 코스.
조금 날카롭고 까다로운 인상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덤벼.”
긴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가짜 송민아가 겉옷을 벗어던지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아래에는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재질의 의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다소 위험한 차림이었지만. 여기에 있는 건 두 명의 인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할 때 가장 자신 있는 수단이라고 하면.
손과 발이 얽히는 그래플링.
“하, 참…….”
가짜의 도발하는 듯한 눈빛에, 송민아 역시 옷을 벗었다. 그녀 역시 아래에 몸에 달라붙는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이것만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데 그런 송민아를 보고, 가짜가 불만스럽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살쪘잖아.”
그 말을 들은 송민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
“아핫.”
확실히.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몸을 하고 있는 여자는, 팔과 다리에 근육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조각 같은 체형을 자랑했다.
그런 그녀가 보기에 지금 자신의 모습은, 물론 아직 헌터로 활동을 이어 가고 있기에 충분히 다져진 상태였지만, 어느 정도 살이 붙었다고 생각해도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땐 젊어서 그런지 조금만 움직여도 살이 쭉쭉 빠지는 게 느껴졌는데.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가 살벌한 목소리를 입에 담았다.
“죽여 줄게.”
과거의 자신. 조금 귀엽게 보면 동생에 가까운 존재를 상대하는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 모두 자세를 낮추고 손 끝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리를 두고 탐색을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리와 함께 팔을 뻗었다.
* * *
“히익!”
고철민이 새된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바로 옆에는 엄청난 굉음을 낸 폭발로 인한 그을음과 연기가 보였다.
새하얀 공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되돌아갔지만. 그 폭발을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고철민은 그 장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사이 다시 한번 상공으로 빛줄기가 가로질렀다.
이번엔 세 개나.
“끼야악!!”
고철민이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가 있던 곳을 향해 세 발의 궤적이 순차적으로 쏟아졌다.
도망치는 방향까지 예상하듯 그가 몸을 날리는 곳마다 다음 폭발이 따라왔다. 꼴사납게 바닥 위에서 춤을 추듯 구르고, 이번에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고철민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와 이리 강한기가?! 퍼펙트 고철민이!”
그렇다.
자신과 닮은 상대가 나와 엇비슷한 역량을 겨루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사투를 벌이게 될 것이라 예감했지만.
고철민은 싸울 생각은커녕 도망만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큰 격차가 느껴졌다.
“왜인지 알려 줄까.”
“허업…….”
목소리는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멀리 뛰었는데. 공격은 분명히 저 멀리서 날아왔으니, 아까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게 분명한데.
가짜 고철민이 순식간에 등의 바로 뒤까지 접근해 있었다.
“넌 뛰어난 재능을 가장 오래 썩힌 놈이다. 나태하고 뺀질거리는 쓰레기. 네놈과 같은 출발선에 선 자들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눈으로 보고 나서야 확신이 들었나?”
“…….”
가짜는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경멸하는 목소리로 고철민을 매도했다.
고철민이 그런 가짜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즈어……. 질문 하나 괘안켔나?”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완전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믿음에 흔들림은 없는지. 가짜가 대화를 허락했다.
그런 가짜를 향해 고철민이 물었다.
“사투리는 어따 갖다 배맀나?”
“…….”
고철민은 지방 출신이었다.
자신과 달리 노력한 과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이 다르진 않을 테니 똑같이 사투리를 써야 할 텐데.
자신이 완벽한 고철민이라 주장한 가짜는, 자연스러운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가짜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익혔다, 서울말.”
하지만 눈에 띄게 굳은 태도를 보며 고철민이 입가를 끌어당겼다.
“햐, 요 맹랑한 아 좀 보게.”
불현듯 없어졌던 자신감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마. 그래서 네 말은 내가 천재다~ 이 말이가? 그래, 알았다. 그럼 할 수 있겠네.”
“뭘…….”
“나도 니랑 똑같은 거.”
고철민이 마력을 빚어냈다.
“……!”
그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말도 안……!”
고작해야 방금 몇 번 본 게 전부인 술식이었다. 그것도 가까이서 분석한 게 아니라 멀리서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면서 훔쳐본 정도로.
천재적인 자질을 타고난 자신이, 몇 년이나 갈고닦아 만든 주문을 모방할 수 있으리라고는.
“마. 뭘 그리 놀라고 자빠졌노.”
그 광경에 눈을 빼았겼던 가짜는, 고철민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까와는 입장이 정반대였다.
“내가 니고. 니가 내다. 그럼 니가 할 줄 아는 기를, 내가 못 할 리가 없지 않나.”
고철민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그에 반발하듯 가짜가 악을 내질렀다.
“웃기지 마라! 쓰레기 자식이! 그깟 흉내 따위, 얼마든지 해 봐라! 진짜의 품격이란 걸 보여 주마!”
“뭘 모르는구마.”
두 개의 주문이 각자의 손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내는 원래 품위랄 게 없는 사람이다.”
고철민이 씨익 웃었다.
마력으로 이뤄진 포격이 쏟아졌다.
* * *
“여기는……?”
클레어가 검은 공간을 탈출하고 온통 새하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곳엔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다. 검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또인가……?”
클레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바닥은 단단했다.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깨고 넘어가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아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새하얗고 광활한 공간은, 분명히 무언가를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만 여겨졌다.
그러나 주역이 없는 텅 빈 극장을 보는 듯한 허무감만이 있었다.
그때.
바스락, 하고. 무언가 발에 밟혔다.
“나뭇잎……?”
그리고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하나의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
갑작스러운 등장에 클레어가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정원은 정신이 없어 놓쳤다는 말도 안 통할 정도로 당당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부자연스럽지만…….’
일단은 가 보는 수밖에 없다.
클레어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뻗어 정원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렸다.
놀라울 정도로 잘 가꿔진 정원이었다.
넓게 펼쳐진 초목 위로 꽃들이 행진하듯 늘어서 있었다. 다양한 색의 꽃이 만발해 형형색색의 화려함이 군데군데 녹아들어 있었다.
인공적인 물건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규칙성 아래에 다듬어져 있는 정원이었다.
마치 꽃과 나무의 왕국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클레어는 발견했다. 덩굴과 가지와 마른 잎사귀를 엮어 만든 침대 위에 누워 잠들어 있는 한 명의 여자를.
그 여자는…….
“나?”
자신과 쏙 빼닮아 있었다.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클레어와 쏙 닮은 여자가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에 취한 듯한 기색이 전혀 없이 자연스럽게.
어딘가 텅 비어 있어 보이는 눈동자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를 살폈다.
“여기는…….”
소름돋을 정도로 자신과 같은 목소리.
그러나 클레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세히 모르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
게다가 아직 상대의 정체 또한 알 수 없었다. 자신과 워낙 닮은 모습이다 보니 동질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던전엔 이런 종류의 함정도 있다는 걸 배워서 알기 때문이었다.
정원 속 잠자는 공주는 이윽고 깨달았다는 듯 여유로운 콧소리를 섞었다.
“아아, 그렇구나.”
그녀가 몸을 일으켜 침대 위를 벗어났다.
“이 나를 모사하려 한 거구나.”
바로 근처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클레어는 없는 존재처럼 무시당했다.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투명감이 넘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굽이 높은 구두를 앞세워 몇 걸음 걸었다.
그녀의 눈이 닿는 모든 곳이 정원이었다. 초목은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하얀 공간을 좀먹어 뻗어 나가고 있었다.
눈송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처럼 가벼이 펼친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건방지게.”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세상이 우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