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접수
“큭……!”
클레어가 검은 물방울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그 표면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겉보기와 달리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클레어의 다른 동료들이 갇힌 채 미동도 없이 둥둥 떠 있었다. 기포가 가끔 올라오는 걸 보면 숨 쉬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외부에서 공격하면 금방일 줄 알았는데…….’
클레어의 지식대로, 환각은 대부분 외부에서의 충격에 약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물방울을 터뜨리면 금방 환각에서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물방울이 너무 단단해서 안에 있는 사람을 깨울 수가 없었다.
‘일종의 보호 장치…인 건가.’
그렇다고 너무 세게 공격했다가 안에 있는 무방비한 사람들이 다치면 곤란하니.
‘조금씩…….’
인내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 * *
‘반응이 날카롭다.’
도율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수월주 엘리아나라는 여자는, 아까 봤던 라크자르와는 키도 성별도 달랐다.
하지만 가장 다른 건 성격이었다.
‘그쪽은 꽤 즐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라크자르는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벼워 보이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 여자, 엘리아나는 상당히 진지하고 딱딱해 보이는 태도였다.
라크자르는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는 도율에게 패배한 직후에도 화내는 기색이 없었다.
반면 이 여자는 냉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실제론 쉽게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굳은 표정 속에 숨기고 있을 뿐.
‘사도란 것들도 성격이 제각각이군.’
그리고 그것은 중요한 정보였다.
상대의 조직이 획일화된 군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성격인 놈들이 모여 각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지. 상대하기 전에 파악해 둬야 할 점 중 하나였으니까.
특히 이 엘리아나가 눈에 띄게 반응한 말은.
‘마계 출신이라는 말.’
도율의 입장에선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던져 본 말이었다.
라크자르는 도율에게 마계로 오라는 말을 했다. 그곳이 사도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 엘리아나도 당연히 그곳 출신이라 생각해 물어본 거였으나.
어딘가 치부를 들킨 듯 분노하는 것을 보면. 사도란 놈들에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듯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도율이 제안했다.
“지금 물러나면 쫓진 않을게.”
이곳엔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클레어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이 있었으니. 휘말리지 않게 조절하는 것도 어려웠고,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 점도 귀찮았다.
이대로 조용히 물러가 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엘리아나는 하등종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것 자체가 치욕이라는 듯.
“지금 당신들이 내게 협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단칼에 거절했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도율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곁눈질로 엘리아나를 응시했다.
‘거짓의 주인이라는 여자가 이렇게 성격이 딱딱해서야.’
그다지 어울리는 칭호가 아니었다.
엘리아나가 경멸을 담아 도율을 쏘아보았다. 잘난 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인간들 사이에서는 제법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정도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누구나 오갈 수 있는 열린 균열이 아닌, 닫힌 균열을 뚫고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기본적인 자격은 갖췄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 봤자 인간은 인간.’
그 정도는 사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장난질에 불과했다.
그걸로 자신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큰 오산이었다.
‘그 여자…….’
자신의 환각을 깨고 나올 정도의 잠재력을 지녔던, 금발의 헌터.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경화수월’을 깨고 나올 수 있었는지.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해 버렸지만.
실제로 맞상대를 해 보니, 결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나라는 자가…….’
그렇게 되니 조금이나마 불안에 빠졌던 생각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자신에게 그런 생각을 품게 한 여자가. 사실은 별것도 아닌 주제에, 착각하게 만들기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절망을 맛보여 주며 죽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 이도율이라는 자가 등장하자마자 눈에 띄게 안심했다. 아무리 강한 적이 나타나도 이겨 낼 수 있는 아군이라는 것처럼.
엘리아나는 그 점이 거슬렸다.
‘이 남자의 목을, 그 여자의 발치에 던져 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게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우선.”
엘리아나가 마력을 풀었다.
“잠재우는 게, 다루기 편하겠죠.”
검은 마력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바다를 메우는 것 같은 거대한 마력이 엘리아나의 손끝을 신호 삼아 도율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격류에, 이 드넓은 장소에서조차 피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설령 피한다 해도 그 너머에는 클레어와 다른 헌터들이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마력은 충격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을 환상 속에 가둔 것과 같은 방식의 마력.
경화수월이었다.
닿는 순간 검은 바다와 하얀 거울의 세계에 갇혀, 다른 이들과 같은 꼴이 되어 있으면. 그 후에 천천히 손을 봐 주면 되는 일이었다.
‘자. 어쩔 거죠?’
거대한 격랑을 마주한 도율이 손가락을 위로 뻗었다.
그 위로 작은 점 하나가 모여들었다.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새까만,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기운이 느껴지는 구멍.
그것은 말 그대로 허공에 생겨난 구멍이었다.
“흑응공(黑凝工).”
그리고 그 작디작은 구멍 속에, 엘리아나의 검은 파도가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무슨……!”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방대한 양의 마력이, 이 일대를 가득 메울 수도 있을 정도의 분량을 지녔던 것들이 모두 고작 점 하나로 빨려 들어간다는 건.
‘다행이군.’
도율이 마음을 놓았다.
상대가 마력을 쏟아붓는 타입이라면 차라리 상대하기 편했다.
라크자르의 경우, 그가 내지르는 주먹이나 손바닥은 흑응공으로 빨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였다. 마력 그 자체가 아닌 실체가 있는 무언가를 불러오거나 만들어 낸 듯했으니.
흑응공은 실제로 있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빨아들일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건 아마…….’
짐작하건대, 도율이 가진 내공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격을 갖춘 물건.
‘녀석의 본체.’
소년 형태의 몸을 ‘인형’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렇고. 한 번에 두 개 이상의 손을 불러내지 않았던 것도 그렇게 짐작할 만한 이유였다.
반면 엘리아나가 뿜어내는 마력의 파도는, 확실히 방대한 양이기는 했으나.
그 밀도에 있어서는 도율이 충분히 간섭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한 점으로 모두 빨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군요.”
엘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겁니까.”
환각으로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접어 두었다.
엘리아나가 마력의 실을 뽑아 냈다. 그녀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실은, 마음만 먹는다면 한 가닥 한 가닥 모두 조종할 수 있었으니. 방금처럼 그 빨아들이는 기술에 손 놓고 당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아까는 남자의 등장에 모두 끊어지고 말았지만, 마력의 실은 그녀의 임의대로 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도율이 물었다.
“넌 인형이 아닌 거냐?”
“인형……?”
그런 도율의 말에 엘리니아는 무슨 소리인지 의아하게 인상을 찌푸리다가 답했다.
“화신체를 말하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군요. 그럼 당신이…….”
화신체를 사용해 ‘놀러’ 가는 건 라크자르의 방식이었다.
조각을 회수하는 임무를 맡은 건 그였으니. 도율이 말하는 인형이라는 것이 라크자르가 사용하는 화신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다는 건. 그쪽을 해결한 것 역시 눈앞의 남자라는 뜻.
“하핫.”
웃음이 나왔다.
그 잘난 체 떠드는 꼬맹이가, 결국 이런 남자한테 발목을 붙잡혔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즐거워졌다.
“그럼, 당신만 쓰러뜨리면…….”
그가 실패한 일을, 자신이 수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엘리아나에게 있어서는 눈이 돌아갈 만한 공적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만개(滿開).”
실의 가닥들이 엮여 뭉쳤다.
한 가닥의 실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이 아닌, 여러 가닥을 뭉쳐 하나의 줄기로 만드는 것. 개수는 줄어들지만, 그만큼 억세고 단단한 채찍이 만들어졌다.
그 위력은 지금까지의 장난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백화제방(百花齊放).”
수월주 엘리아나가 낼 수 있는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수단이었다.
쐐액!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수많은 가닥들이 도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길게 이어진 천과 같이, 사방을 메운 건 아니었다. 굵게 엮인 매듭들은 그 수를 눈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그 협공은 도율의 모든 사위를 에어싸고 있었다. 어디로 피할 수도, 막아 낼 수도 없는 공격.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을 대비해 시간차로 뒤늦게 달려드는 공격들이 있었다. 미래의 수싸움까지 내다보는 연계였다.
그에 도율은 흔들림 없이.
“여뢰(如雷).”
손끝에 번개를 담았다.
쇠붙이 없는 칼날이 번개가 되어 천지를 흔드는 굉음을 일으키고. 손가락을 대신 삼아 묘리를 재현하니.
수많은 검격이 사방을 찢어발겼다.
“……!”
엘리아나가 놀랄 틈도 없이. 채찍들을 모두 파괴한 도율이 그녀의 목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반격할 틈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날카로운 내공이 그녀의 목을 떨어뜨릴 수 있었으니.
하지만 도율에게서는 어떠한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엘리아나가 여유롭게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왜 끝장내지 않죠?”
“…일부러잖나.”
피차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눈치채고 있었군요.”
엘리아나의 몸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실이 이어져 있었다.
“내가 죽으면, 저 환각에 빠진 이들은 영원히 저곳에 갇힌다는 걸.”
그 실은 청진명이 갇힌 물방울과 이어져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자신과 영원히 싸움을 계속하는, 무간지옥의 완성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몇 명이든 가능했지만. 그렇게 많은 실을 연결했다간 쉽게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하나만 조용히 만들었던 것이고.
도율 또한 가까이 가서야 그 기운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은밀하게 숨겨진 마력.
엘리아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걸 알아채고 공격을 멈춘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귀찮게 구는군.”
도율에게는 성가신 일이었다.
* * *
“어떠냐?”
바닥에 드러누운 청진명에게 가짜가 물었다.
“어떠냐고 물어도…….”
청진명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가짜의 말대로, 청진명은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힘보다 훨씬 강한 능력을 자랑했다.
기본적인 마력량부터 시작해서 가지고 있는 장비의 수준까지. 특히 그 에테리움 드라이브인가 뭔가 하는 건 정말이지 사기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여, 총합적인 면에서 가짜 쪽이 훨씬 더 우세하다는 건 확실했으나.
“이렇다할 감동이 없단 말이지.”
그렇게 불만을 툴툴거렸다.
자신보다 강한 자신이라고 하면. 자신이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그런 기대는 충족하지 못했다.
가짜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잖냐, 이게 가장 강한 너라는데.”
“그런가.”
왠지 맥이 빠졌다.
그렇게 자빠져 누워 있으니, 가짜도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누워 있는 상대를 치는 건 재미가 없는 일이었으니.
성격까지 자신과 닮은 건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소강 상태로 누워 있는 와중. 별안간 목소리가 하나 들려왔다.
「들립니까?」
“이 목소리는……!”
어딘가 들어는 봤지만 익숙하지는 않은 목소리.
이도율의 목소리였다.
“뭐야!? 어디서 말하고 있는 거야!”
「일단 설명은 생략하죠.」
여전히 싹바가지 없는 놈이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겠습니까?」
도율이 그리 묻자 청진명이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시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심지어 나보다 몸도 좋고 마력도 많고 장비도 비싼 놈을 상대로…….”
당연한 말이었다.
성격이나 스타일이 비슷하니. 다른 것들에서 우열을 가려야 하는데, 그것들은 모두 가짜 쪽이 우세하도록 설정되어 있었으니.
이길 방법은 전무.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지만. 왠지 지루해져서 잠시 누워 있었더니.
그런 청진명에게 왠지 모를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확실하게 귀로 듣지는 않았지만 그런 직감이 들었던 게 착각은 아니었는지, 한결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나오면…….」
도율이 당근을 던졌다.
「합시다, 결투.」
그 말에 청진명이 귀를 의심했다.
“싸워 준다고? 나랑?”
「예.」
분명 한참 전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지만. 모두 청진명이 그러자고 들이댔을 뿐. 상대는 어영부영 미루기만 했던 일인데.
도율이 자기 입으로 직접 싸워 주겠다고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접수!”
청진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