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잘 지낸다
“쿡.”
엘리아나가 조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현재 도율에게 제압당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감시당하고 있었다. 잔뜩 깔보던 상대에게 그런 짓을 당했으니 치욕에 떨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리니. 도율이 그 이유를 물었다.
“왜 웃지?”
“설마 진심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도율은 현재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청진명이 스스로 환각을 깨고 나오는 것을.
환각의 세계 속에 있는 청진명에게는 전음을 통해 상황을 전해 놓았다. 그러니 남은 건 스스로 깨고 나올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리아나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제가 만든 환각입니다. 꿈과 거짓의 지배자인 제가요.”
도율이 혀를 찼다.
쉽게 볼 여자가 아니라는 건, 오늘 상대했던 라크자르라는 소년과 비교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사로잡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건 상대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엘리아나가 어울리지도 않는 전면전에 어울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조각을 훔쳐 간 건방진 하등종들을 벌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제대로 된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본심을 다한다면 모습을 감추고 상대를 교란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리라. 그리 예상할 수 있었다.
도율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한 번 당해 봤으니까.’
돌아오기 전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환술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 힘으로 꺾는 건 환술사가 기회를 주지 않을 거고. 환각 그 자체를 부수는 건 상대보다 격이 훨씬 높지 않으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술사인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환각이란 건 결국 어떻게든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것도 이전에 지긋지긋하게 상대했던 그 환술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그땐 단순히 자신을 놀리기 위해 조롱하듯 들은 사실이지만.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여자가 아니었다. 사실이란 게 와닿을 때 더욱 열받는다는 원리를 아는 여자였으니.
의외로 확신에 차 담담히 말하는 도율의 말에, 엘리아나는 의외라는 듯 행동거지가 멎었지만. 이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렇다 한들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겁니다.”
단언하는 목소리.
“자신이 대단하시군.”
“당신이 알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벽으로 마주했을 때의 아득함을.”
엘리아나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조용해졌다.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인간들은 쉽게들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대도 자신이니까요. 자신에게 싫어하는 마음의 크기는 완전히 똑같은 겁니다.”
입가가 샐쭉 호선을 그렸다.
“같은 자질. 같은 생각. 같은 기량을 가진 두 사람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지. 그것은 전능한 자라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전능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답이 없는 도율을 향해 엘리아나가 계속해서 떠들었다.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이라도 있을 거 아닙니까?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조금이라도 강해질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약간의 힘만 있었더라도 지금의 자신을 꺾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대는 그런 선택을 몇 번이나 거듭 중첩해 온, 최고의 선택만을 해 온 자신인 겁니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말은 이윽고 일정한 운율을 띄고 있었다.
익숙한 일인 것처럼 엘리아나가 거듭 등을 떠밀었다.
“그런 자신이 되고 싶다고, 바란 적은 없습니까?”
거의 다 넘어왔다.
엘리아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력을 쏟아부어 상대가 저항하지도 못하도록 환각 속에 내동댕이 치는 것 또한 가능한 방법 중 하나였지만. 이 남자를 상대로는 먹히지 않을 게 뻔했고.
이토록 은밀하게. 교묘한 말과 은근한 운율을 타고 마음을 홀리는 것 또한 가능했다.
하지만 도율에겐 먹히지 않았다.
“개수작 부리지 마.”
대꾸할 가치도 없어 잠자코 들어 줬더니 계속 떠들 줄은 몰랐다.
애초에 청진명이 잡혀 있는 것만 아니었어도 진작 끝장을 낼 상대였다. 손속을 두거나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으니까.
“…….”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엘리아나가 다시 입을 꾹 닫았다.
비로소 조용해진 참이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들어 주는 건 견디기 힘들었지만.
‘얼추 알겠군.’
힌트는 얻었다.
이 환각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하는 환각이라는 것을.
그걸 최강의 자신이라 포장하고,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것처럼 세뇌하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나은 자신을 상상하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었다.
결국 이 환각에서 깨는 방법은.
지금의 자신으로 상상 속의 자신을 이겨 내는 것.
‘…크게 다를 것도 없나.’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 * *
“허어억!”
고철민이 게걸스럽게 숨을 집어삼켰다.
웬 검은 액체 속에 온 몸을 담그고 있었던 걸 깨달았지만, 이상하게도 숨이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안에서도 숨을 쉴 수가 있었던 걸까.
“…앗차!”
이럴 때가 아니었다.
고철민이 금방 자세를 다잡고 양팔을 휘둘러 자세를 잡았다. 실제로 근접 전투는 젬병인 원거리 화력 담당인 주제에.
“덤 벼 랏!”
환각의 바깥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정황상, 자신과 동료들을 모두 환각의 세계 속에 밀어넣은 것도 바로 그 여자일 테지만. 밖으로 빠져나온 직후라고 해도 그녀와 싸워야만 하는 상황일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런 고철민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송민아가 있었다.
“…누, 누님.”
“뭐, 깨어났으니 됐다.”
주변을 살펴보니.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깨어나 있었다.
송민아와 정하준. 심지어 막내인 클레어까지.
“서, 설마 내가 꼴찌가?”
“그건 아니고.”
자세히 보니 팀장인 청진명이 없었다.
꼴찌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고철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뻘쭘해진 고철민이 너스레를 떨었다.
“와, 이거 장난 아이던데. 안 그렇심꺼? 난 진짜 빡싰는데.”
평소에 워낙 날티가 나는 고철민이지만.
이번에 하는 말은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철민에게 지금보다 나은 자신을 상상해 보라고 하면, 그 자신을 뒷받침하는 요소는 설명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단지.
나는 천재니까 얼마든지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다. 심지어 끝없이 강해질 수 없다.
마음 한편에서 생각하고 있는 그런 허무맹랑한 망상이 엘리아나의 방대한 마력의 조력으로 모양새를 갖추었을 때.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천재 마도사가 탄생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했기 때문에, 고철민의 현실은 상상을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다른 두 사람인 송민아와 정하준은 클레어가 외부에서 환각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간신히 이길 수 있었지만.
고철민은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 환각을 빠져나왔다.
“비밀로 해 두자.”
저 녀석,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기고만장해할 게 뻔하니까.
송민아의 지시에 나머지 두 사람이 동의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여자는……. 설마 벌써 해치운 깁니까?!”
“아니. 저쪽.”
송민아가 가리킨 쪽에는 도율과 엘리아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행동 없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방금 막 나온 고철민이 의아함을 품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와 저러고들 있습니까? 우리는 와 이러고들 있는기요? 그리고 점마는 누굼까?”
“설명은 나중에 해 줄게.”
송민아는 저 가면의 모양만 보고도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지만. 다른 팀원들은 저 여우 가면의 정체를 모른다.
클레어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니, 가볍게 사실을 말할 일은 아니었다.
“일단은 잠자코 기다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청진명이 들어 있는 물방울은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그가 아직 환각 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다.
클레어와 같이 물방울에 균열을 만들어 도와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해 듣기로, 외부에서의 간섭이 있을 경우 영원히 환각 속에 갇힌다고 들었으니.
저 여우 가면은 지금 환각의 주인이 다른 수작을 부리거나 약속을 어기지 않도록 감시하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송민아가 입술을 깨밀었다.
이전. 청진명의 팀이 거미 몬스터의 환각에 걸렸을 때에도 가장 늦게 풀려난 건 청진명이었다. 그것도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사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청진명은 겉보기엔 쾌활해 보이더라도, 실제론 정신적으로 가장 썩어 문드러진 인간이다.
마음의 상처를 파고들 틈이 가장 느슨한 건, 팀장인 청진명이라 할 수 있었다.
환각을 건 저 여자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단순히 팀장이기에 인질로 삼았는지. 아니면 가장 정신적으로 약한 인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건지. 확실하진 않았지만.
송민아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다른 누가 잡혀 있는 상황보다도 가장 걱정이었다.
* * *
“우리 그러지 말자.”
“응?”
청진명의 제안 아닌 제안에 가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격렬한 싸움 도중. 순간적으로 거리를 벌린 청진명이 급히 이야기를 꺼냈고, 가짜가 들어주는 듯한 뉘앙스를 취하자.
청진명은 창을 잠시 옆구리에 끼우고 허리 위로 손을 얹었다.
“후우. 다른 건 다 인정하겠는데, 우리 템빨은 좀 빼고 하자. 그 에테리움? 나도 그거 가진 적 있거든? 그러니까 쌤쌤으로 쳐. 빼고 하자.”
“…….”
청진명이 팔아 버렸던 에테리움 파편. 자잘한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헐값에 공중에 던져 버린 점프볼이었다.
가짜는 그것조차 자신의 장비로 만들어 소지하고 있었지만. 청진명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에테리움 엔진이라는 놈이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남이, 아니, 또 다른 자신이 제대로 써먹는 모습을 보니 남 준 게 아까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짜는 단칼에 거절했다.
싸우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멍청한 놈은 아니었다.
“차 포 떼고 싸워 주는 놈이 어딨냐.”
지당하신 말씀.
사실 청진명도 숨을 고르기 위해 그냥 해 본 말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진아는 잘 지내냐.”
지나가듯 뱉은 가벼운 말. 청진명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가짜 역시 그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듯 동요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진짜 청진명이 어떤 심정으로 그 질문을 건넨 건지.
그가 가벼이 한숨을 흘리며 물었다.
“너와는 전혀 관련 없는 세상의 얘기다. 그래도 듣겠냐?”
그렇다.
가짜가 대답한다 하더라도, 결국 가짜에 불과한 세상의 이야기.
무슨 대답을 듣는다 하더라도 의미는 없었다. 자신이 가짜란 걸 알고 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기억으로나마 간직하고 있을 뿐인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는.
물거품뿐인 대답이라 할지라도.
“너는 완벽한 나잖아.”
알고 싶은 것이었다.
가짜 청진명 역시 창끝으로 땅을 짚었다. 지금부터 꺼낼 말이 너무 무거워, 더는 무게를 짊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래. 잘 지낸다.”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뭘 하고 지낸다거나. 뭘 먹었다거나. 어딜 같이 갔다거나. 그런 이야기 따윈 하등 꺼내지 않아도 됐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청진명이 다시 창을 들었다. 마음은 가벼운지 무거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선명한 건, 박하의 향이 느껴지듯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아찔하게 떨림이 느껴졌다.
청진명의 창 주위로 파도가 휘감겼다.
늘 새하얀 포말을 만들어, 탁한 색으로 물들어 있던 파도가 이번엔 투명할 정도로 속이 비쳐 보였다.
가짜 세상을 살던 가짜 자신. 가짜가 말한 가짜의 이야기.
그렇지만.
가짜 위안은 아니었다.
“그럼, 작별이다. 완벽한 나.”
“…내가 한 말이지만, 참 듣기 거북하군.”
가짜의 말에 청진명이 피식 웃었다.
감상이 비슷한 건, 역시 자신과 같은 인간이기 때문인가.
가짜 청진명은 완벽하다는 말을 거북해했다. 처음엔 그게 사실이었기에 부끄럽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 와서는.
상대의 창대에 모인 고요한 물결. 그로부터 하해와 같은 기운을 느끼고는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완벽이란 허상에 불과하고, 계속해서 상처받으며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후에는, 더 이상 자신이 완벽하다 느껴지지 않았다.
“날 성장시킨 건 아픔과 후회였다.”
청진명이 담담하게 읊조렸다.
“그걸 빼고서야 내가 아니지.”
히죽. 아이처럼 웃음 짓는 모습에, 가짜 또한 동의하며 웃었다.
“날 만든 작자는 그걸 모르는 모양이더라고.”
결과를 알 것 같았지만, 가짜 또한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기술로 응했다. 가망이 없다고 하여 손가락 빨고 당하는 건 취향이 아닌 데다가.
그래서야 결말이 재미가 없으니까.
“간다!”
기합과 함께 청진명이 창을 찔렀다. 가짜는 같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가라.”
껍질을 부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남자를 배웅할 뿐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온통 투명한 물기로 가득 차고.
촤악!
청진명이 검은 물방울을 찢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