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2
152화 다행이네
“후우. 내가 좀 늦었나?”
물방울에서 빠져나온 청진명이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늘 그랬듯이, 주위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환각에서 빠져나오는 건 늘 늦곤 했기에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먼저 나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장!”
고철민이 안겨 들었다.
청진명이 그런 고철민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분위기를 살폈다.
“뭐야, 왜 이래들?”
다들 눈에 띄게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마치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것처럼.
고철민 이 녀석이야 원래 겉으로는 이러는 놈이고. 정하준이나 클레어는 워낙 진중한 녀석들이니 사소한 일에도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지만.
“…잘 왔어.”
송민아도 그럴 줄은 몰랐다.
청진명이 멋쩍게 뺨을 긁었다. 늦게 오고 욕 먹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괜히 쑥쓰러워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던 그 여자. 덕분에 여자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준비된 함정도 아니고, 바로 눈앞에서 환각을 걸어 버릴 정도라면. 상당한 실력자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환각에서 나온 후에도 방심할 수 없는 상대이리라 생각했는데.
의아하게도 동료들은 그 여자를 상대하고 있지 않았다. 후회 속에서 죽게 해 주겠다니 뭐니 하는 소릴 해 놓고 환각만 걸고 떠났을 것 같진 않은데.
청진명의 물음에 송민아가 답해줬다.
“그건, 뭐. 조력자가 있어서.”
그 조력자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청진명 또한 알 수 있었다.
환각의 세계에서 들렸던 목소리. 어떻게 해서 환각으로 목소리를 보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 온 조력자가 있다면 그 목소리의 주인임이 틀림없었다.
‘이도율.’
청진명이 멀리 시선을 던져 도율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누군가를 붙잡아 두고 있었다.
* * *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월주 엘리아나가 눈가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환술사인 만큼, 환각이 만능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환각을 깬 사람이 나온다고 해서 일일이 상처 받는 것 정도는 이미 애초에 졸업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하등종. 그것도 그 한계가 뚜렷한, 별 것도 아닌 인간에게 자신이 만든 환각 ‘경화수월’이 파훼당하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저깟 놈이…….’
초월(超越)의 힘에 손을 넣은 건가.
엘리아나가 멀찍이 떨어진 청진명을 노려보았다. 동료들 사이에서 웃음 짓는 남자에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환각의 세계 속에서만 겪었던 일시적인 성장. 혹은 우연이나 착각의 산물이 아닐까.
‘저자들은.’
스스로 경화수월을 찢고 나온 자들. 그것은 정해진 한계 이상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닌 자들을 의미했다.
비록 지금은 한낱 하등종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러한 자들은 내버려 두면 언젠가, 왕의 목을 찢을 송곳니가 된다.
특히나.
환각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 그 존재를 현현시키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금발의 여자. 그녀의 성장은 사도인 자신조차 끝을 알 수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내 둬야만 했다.
처음과 다를 것 없는 결론이었다. 애초에 엘리아나는 이 불경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온 것이었으니.
하지만 불가능했다.
“어딜 가시려고.”
여우 가면을 쓴 검은 머리칼의 사내.
그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를 앞에 두고 다른 인간들을 제거하러 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신 넘치는 태도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힘은…….’
상대하기 껄끄러운 힘을 다루고 있었다.
뒤늦게 알아챘다. 이도율이라는 남자가 쓰는 힘의 근원은 마력이 아니었다.
내공(內功). 오랜 기간 신체에 축적된 기운은 주변에서 힘을 끌어다 쓰는 마력과는 상충되는 성격의 힘이었다. 그렇기에 서로 충돌해 사라지고 만다.
‘설마 인간 중에 내공을 쓰는 자가 있다니.’
본래 그 힘은, 그들이 귀찮게 여기는 한 존재가 쓰는 힘이었다.
엘리아나가 도율에게 물었다.
“망량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질문을 받은 도율이 엘리아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 보았다. 대답할 이유는 없었지만, 어차피 말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게 뻔했다.
“남남.”
“…….”
도율의 입장에선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엘리아나는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무림인이 없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내공을 깨우쳤다는 건 미친 소리나 다름 없으니까. 분명히 망량이 몰래 키운 제자나 조력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뻔했다.
“믿든 말든 네 자유고. 그런데…….”
도율이 내공을 일으켰다.
“이젠 없잖아, 인질.”
도율이 엘리아나를 공격하지 않고 감시하던 이유. 그것은 청진명이 환각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진명이 스스로 빠져나온 지금, 엘리아나는 도율을 멈춰 세울 만한 수단이 없었다. 전면전으로도 밀리고 있었으니.
엘리아나가 손을 뻗었다.
“잠깐…….”
“안 기다려.”
단호하게 대답한 도율이 내공을 손끝에 담았다.
“여뢰(如雷).”
그 손가락은 표지에 불과하고. 뒤따라 오는 내공의 격류가 칼날이 되어 주변을 베어 냈다. 말 그대로 번개의 속도로 이루어지는 참격.
그 표적지는 사도 엘리아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콰앙–!
공기를 찢고 나아간 참격이 한 박자 늦게 굉음을 울렸다.
그리고 그 공격을 받아 낸 엘리아나는.
“…….”
예상한 것과 다를 바 없이, 도율의 참격에 의해 몸이 크게 갈라져 숨을 다했다.
라크자르 때의 속이 텅 비어 있던 인형과는 달리, 이번엔 확실히 손맛이 있었다. 자리에 남은 엘리아나의 시체 역시 생명체의 육신이라는 것을 여지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뒷맛이 찜찜했다.
그 흔적을 노려보던 도율이 직감에 따라 결론을 내렸다.
“도망쳤군.”
[말하지 않았습니까.]목소리가 들렸다.
그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거짓의 주인이라고.]역시나.
도율의 짐작대로. 엘리아나는 본신을 숨긴 채 어딘가로 내뺀 것이었다.
언제 그런 짓을 했는지. 짚이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청진명이 환각에서 깨어나길 기다리는 동안이라면 수작을 부릴 시간이 충분했다.
도율에겐 다른 이들을 무사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럼, 안녕히.]엘리아나가 우아한 인사를 건네며 사라졌다.
하지만 피차 알 수 있었다.
“조만간 또 보겠군.”
이미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 * *
“하아, 하아.”
엘리아나가 벽에 몸을 기대고 팔을 감싸쥐었다.
“이런 빌어먹을……! 더럽고 비참한 하등종 따위가……! 갈아서 여물에 섞어도 시원찮을, 염병할 쓰레기가……!”
그녀는 고상한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거친 욕설을 지껄였다.
마지막 순간. 어떻게든 도망치는 술식을 짜내는 건 성공했지만, 완성하기까지 아주 조금 시간이 모자란 상태였다.
환각에 갇혀 있던 남자가 아주 조금만 늦게 빠져나오거나, 도율의 공격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으면 충분히 여유로웠을 텐데.
말 그대로 번개가 꽂히는 듯한 속도에. 엘리아나는 미처 완성되지 못한 술식을 몸을 날려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도율이 다루는 내공은 사도인 자신이 짠 술식마저 망가뜨릴 잠재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젠장……!”
그 결과가 바로 이 상처였다.
오른팔을 깊게 파고든 상처는 아무리 마력을 때려박아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처 위에 잔류하는 내공이 마력의 침입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누구도 잘 오지 않는 외진 곳에서 홀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비참하게 죽여 주겠어. 사지를 잘라서 트롤의 먹이로 던져 주고. 몸뚱이만 남은 애벌레 같은 꼴로 고블린의 소굴에…….”
엘리아나가 저주를 퍼붓는 사이.
누군가 찾아왔다.
“욥.”
“……!”
엘리아나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손바닥을 들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건 은발의 소년이었다.
“조룡주(彫龍主)……!”
조룡주 라크자르.
그녀와 같은 사도 중 한 명이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입니까……?”
“하도 안 오길래 찾으러 왔지.”
“당신이 말입니까?”
엘리아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조룡주 라크자르는 보이는 것과 같이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어서, 다른 누군가를 걱정하거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자가 아니었다.
엘리아나가 그렇게 묻자 라크자르가 뒤통수에 손을 얹고 투덜거렸다.
“나도 나오기 싫었는데. 이번 임무를 같이 맡은… 뭐더라. 전우조? 아무튼 그거니까 내가 가 보라잖아. 귀찮게.”
역시나 다른 사람이 시킨 일이었다.
그때 라크자르가 표정을 바꾸고 히죽 웃었다. 엘리아나의 몰골을 보고 짓는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꽤 성대하게 당한 모양이네.”
“…….”
라크자르의 조롱에 엘리아나가 빠득하고 이를 깨물었다.
확실히, 비웃음을 살 정도로 당하긴 했다. 그깟 하등종들을 징벌하러 나섰다가 역으로 물리고 돌아온 건 커다란 치욕이었다.
그 점을 콕 집어 말하는 라크자르에게, 엘리아나는 가시 돋친 말투로 따졌다.
“그러는 당신도, 임무에 실패한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응?”
라크자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지만, 엘리아나는 그것이 시치미를 떼는 것이라 생각했다.
엘리아나가 비웃음을 머금고 쏘아붙였다.
“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쓰러뜨린 남자가 제게도 왔으니까. 꼴사납게 패배해 방해나 하고.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뭐~? 너도 만난 거야?”
“네. 그렇습니다.”
엘리아나의 말에 라크자르가 손을 내리고 양쪽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분명 걔 때문에 아끼는 인형을 하나 잃기는 했지만. 난 조각의 회수에는 성공했다고.”
“예……?”
사실이었다.
라크자르는 도율과의 정면 대결 대신 조각을 몰래 빼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덕분에 아끼는 인형 중 하나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만큼, 뼈 아픈 선택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임무란 걸 알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해를 받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걸.”
라크자르의 입가가 가늘게 휘었다.
그에 엘리아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쳤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라크자르의 말은 이어졌다.
“게다가 ‘도’라고 말하는 걸 보면. 너는 임무에 실패했나 보지?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갔으면서 말이야.”
“그…….”
엘리아나에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위대한 조각에 손을 댄 건방진 하등종들을 벌한다. 그것이 그녀가 받은 임무의 내용이었지만.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다가 나타난 조력자에게 당해 후퇴한 것이 사실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실패.
그런 그녀에게 라크자르가 속삭이는 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멸시했다.
“이래서 몽마 출신은.”
그것은 엘리아나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밑바닥에서 싸구려 음몽이나 팔던 그녀가 사도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걸로도 모자라, 운이 좋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라크자르와 같이, 몽마 출신의 사도인 엘리아나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때, 라크자르가 돌연 표정을 폈다.
“뭐. 그래도 동료는 동료니, 사이 좋게 지내야겠지.”
“…….”
엘리아나는 남몰래 안도했다. 그마저도 기뻤다. 자신과 달리, 오랜 기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태초의 존재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이.
라크자르가 엘리아나의 팔을 가리켰다.
“그거, 치료해 줄게.”
“예……?”
엘리아나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녀가 알기로, 라크자르에게 치료 따위의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라크자르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간 섬광이 엘리아나의 팔을 잘랐다.
“아……?”
엘리아나가 의아하게 자신의 빈 팔뚝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주인 없는 팔을 대조해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라크자르가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전했다.
“다행이네. 상처가 없어져서.”
“…아.”
뒤늦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아아악!”
텅 빈 골목.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