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늦었군
“히야. 이번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심더.”
고철민이 한숨과 함께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 고철민을 향해 송민아가 못마땅한 눈길로 핀잔을 주었다.
“너 맨날 그 소리 하잖아.”
“이번엔 진심 200프롭니더.”
평소 던전을 공략하며 숱한 위기를 넘겨 왔지만, 이토록 머리털이 쭈뼛 곤두선 건 처음이었다. 라고 고철민이 덧붙였다.
송민아가 시인했다.
“뭐, 확실히.”
결과적으로는 모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조력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야. 내한테 가장 큰 시련을 준 게 내라니. 역시 내라고나 할까…….”
고철민이 감탄한 듯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고철민이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곳에서 보았던 자신이 보여 준 어마어마한 복잡도의 마도 술식. 하지만 자신 또한 지지 않고 똑같은 술식을 구현. 오히려 거기서 약점을 찔러 역으로…….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별로 믿고 싶진 않았지만, 유일하게 혼자 힘으로 탈출한 사람의 말이니 반박하긴 어려웠다.
“그래, 그래. 너 잘났다.”
“누님은 어땠심꺼?”
“…나?”
송민아가 환각 속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뭐… 별거 없었어.”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 주입쇼. 어떤 누님이 나왔는지.”
고철민이 칭얼거렸다.
시끄러워, 짜샤-.
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청진명이 대답을 받았다.
“그거 좋겠네.”
“엉?”
“각자 얘기해 보자고. 어떻게 해야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오, 좋은 생각!”
고철민이 격하게 동의했다.
각성자의 최전선을 달리는 헌터가 되면, 지금보다 강해질 방법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제는 마석도 거의 필요가 없었다.
이 정도 수준에서 효력이 있는 마석을 구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흡수한다 해도 그 효율이 매우 떨어졌다.
마치, 성장 가능한 한계에 도달한 것처럼.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지금 가진 역량으로도 수많은 던전들을 돌파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당장 오늘 싸운 상대만 하더라도 그랬으니까.
‘엘리아나, 라고 했던가…….’
여우 가면을 쓴 도율에게 얼핏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물결이 굽이치는 듯한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자. 그녀의 이름이 엘리아나라는 것을.
앞으로 싸울 상대는 최소한 그 정도 수준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했다.
‘우리에게 호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눈만 마주쳐도 알 수 있는 위화감이 있었다.
“뭐어…….”
이유를 받아들인 송민아가 거부하는 기색이 옅어졌다.
“내는 이미 다 말했고. 정하주이는…….”
정하준이 안 그래도 굳은 얼굴을 더욱 바닥에 처박았다.
“나는……. 거기서 탈출하는 방법을 못 찾아서…….”
“…….”
정하준은 그 검은 공간을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정처 없이 걸었다. 환각이라는 건 어렴풋이 눈치를 챘지만, 어떻게 탈출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것.
덕분에 또 다른 자신과 만날 기회는 얻지 못했다.
다른 동료들. 특히 막내인 클레어조차 훌륭하게 탈출한 환각을 혼자 끝까지 질질 끌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침울해져 있는 것이었다.
“…마, 마! 그럴 수도 있제. 그, 그라믄…….”
고철민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의외의 곳에서 또 다른 복병이 터졌다.
“난…….”
송민아였다.
“옛날의 내가 나오던데…….”
송민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다 뛰어난 자신. 그게 나오는 환각에서 다른 선택을 한 세상의 자신이 아니라, 단순한 옛날 모습이 등장했다는 건.
“혹시 나, 퇴화했나?”
“…아, 아니. 그건.”
지금의 자신이 옛날의 자신만도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충분했다. 실제로 송민아는 예전의 자신을 상대로도 크게 우위를 점하지 못했기에.
그때 청진명이 끼어들었다.
“그건 대인전 능력을 평가했을 때 그런 거겠지.”
“…그런가?”
실제로 사람을 상대하는 능력으로만 판단하는 거라면.
청진명을 따라서 헌터로 전향한 지금보다, 현역 가디언으로 활동하던 그 시절이 더 뛰어났던 건 사실일 터였다.
지금은 헌터로서의 역량을 보다 갈고 닦았으니. 그 대가로 잃는 게 있었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송민아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뭐야, 그런 거였나? 하긴. 그 녀석이 나보고 살쪘다고 뭐라 하더라고!”
“그건 진짠 거 같다.”
“뒤지고 싶냐?”
송민아가 날카로운 도끼눈을 뜨고 청진명을 노려봤다.
그 시선에 청진명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내 경우를 말할 것 같으면. 이것저것 있긴 했지만, 가장 큰 건 역시…….”
에테리움 드라이브.
환각 속의 가짜 청진명이 사용했던 장비 중 하나였다.
“에테리움? 우리가 팔아넘긴 그거?”
“그래.”
그걸 이용해 새로운 장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법을 알아내는 건 연구 개발진이 해야 할 일이고.
아무튼 앞으로는, 그 아이템을 사용해 보다 강해질 방법을 찾는 게 목표였다.
“또 올 텐데…….”
엘리아나라는 여자가 찾아온 것도 바로 그 아이템 때문이었으니, 여러모로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한 사람 더 있었다.
혼자 환각을 탈출한 사람. 그것도 누구보다도 빠르게.
“막내는?”
“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클레어가 송민아의 질문에 움찔하고 반응했다.
“어, 저는…….”
클레어 역시 할 말이 많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먼저 환각에서 빠져나온 건 사실이지만. 그건 결코 자신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건방지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과연 진짜 자신이었을까.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순식간에……?”
클레어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료들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클레어에게만 우연히 어떤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때 고철민이 손가락을 튕겼다.
“내는 딱 알았다.”
“뭐가?”
고철민은 드물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막내의 포텐셜이 그만큼 높다는 뜻 아이가.”
“포텐셜……?”
고철민이 덧붙였다.
“그니까. 막내가 성장하기만 하면 사실 그 여자가 만든 환각 따위는 순식간에 짓뭉갤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거다 안카요.”
“…제가요?”
“막내가…….”
고철민의 말에 클레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에는 그럴싸한 가설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팀 내에서는 막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나이도 가장 어리고 경력도 가장 짧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의 일원으로 함께할 자격을 갖춘 헌터라는 말이 된다.
‘확실히 막내는.’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 팀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독보적인 재능을 보일 때가 있었다.
특히 마력에 관해서는.
‘가능성이 있어.’
게다가 클레어는 아직 전성기라고 부를 만한 시기를 맞이하지 않았다. 아직도 한창 성장하는 도중이었다.
그 재능이 완전히 꽃피우는 시기를 앞당겨 부른 것이라고 한다면.
“과장이에요. 제가 뭘…….”
“아니.”
겸양을 보이는 클레어에게, 청진명이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 넌 언젠가 우리를 뛰어넘게 될 거다.”
지금까지 확실히 말로 한 적 없었을 뿐.
모두가 느끼고 있던 사실이었다.
* * *
“이야기는 모두 끝내 뒀습니다.”
백우진과 합류해 보니 임수길 사장은 이미 돌아간 채 없었다.
“그쪽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을 테니까요.”
“그렇겠군요.”
사장인 임수길은 무사하다지만, 경비팀이 반절 가까이 죽어 나간 대사건이었다. 당연히 한동안은 수습으로 정신없겠지.
게다가 호송하려던 물건인 에테리움의 파편은 도둑맞기까지 했으니.
원하던 물건을 잃어버린 데다가, 몰래 빼돌린 거 아니냐는 해명까지 해야 할 처지에 놓인 셈이었다.
“책임을 떠넘기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백우진은 사람 됨됨이를 다시 봤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당연히 임수길 사장이 내 탓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은 생명의 은인인데.’
그것도 두 번이나.
“일단은 우리도 돌아갑시다. 센터 쪽에도 정식으로 보고를 올려야 하니.”
백우진이 우리가 올 때 타고 왔던 차를 가리켰다.
간단히 상황은 전달했겠지만. 자세한 내용은 직접 가서 설명할 생각인 듯했다.
“뉴스에 나오진 않겠죠?”
“이 일이 말입니까?”
백우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는 없습니다.”
오늘 내가 상대한 것은 ‘사도’라는 자들이다.
나 역시 직접 만난 건 처음이지만,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망량이나 주대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으니.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모르던 사실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니. 이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게 될지 의문이었다.
백우진이 푸념 같은 소리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복잡한 세상이니 말입니다.”
던전이니 게이트니 하는 외부의 위협은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도 각성자니 일반인이니 하는 잣대로 시끄러운 세상.
그런 상황에서 괜히 대중들의 걱정거리를 늘려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 백우진의 설명이었다.
“…그렇군요.”
그 후로 백우진은 각성자 지원 센터로 차를 몰아, 비서장 최지연이 있는 집무실으로 이동했다.
“보고서 봤어요.”
최지연이 우리를 보자마자 이야기를 짧게 마무리했다.
“자세한 건 됐고. 오늘은 이래저래 큰일이 있었으니, 그만 들어가 쉬어요.”
“하지만…….”
“얼른 나가요.”
최지연이 퉁명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백우진은 해야 할 일을 끝마쳐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듯 반박하려 했지만, 최지연의 눈빛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여기서는 최지연이 상사였다. 그리고 조직에서는 명령 체계에 순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럼, 알겠습니다.”
결국 백우진이 받아들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의외로 융통성 있게 굴 줄도 알잖아.
그렇게 생각해 나가기 전 최지연을 슬쩍 바라보니, 그녀는 입꼬리를 미세하게 떨며 웃고 있었다.
‘…어떻게 괴롭혀야 할지 깨달았군.’
백우진 같은 완벽주의자의 신경을 거스르는 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건지. 결국 나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걸 택했다.
“그럼 이만.”
백우진과는 그 길로 헤어졌다.
일이 끝났으니 돌아가는 길에 맥주 한잔 걸치자는 소릴 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연락이 와 있군.’
내게도 다급해 보이는 연락이 도착해 있었다.
연락은 핸드폰을 통해 온 것이 아니었다. 나뭇가지였다. 그다지 굵지도, 얇지도 않은 굵기의 나뭇가지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건 웬 제비가 하늘에서 나를 향해 떨어뜨린 물건이었다.
단순히 평범한 나뭇가지는 아니었다. 숨길 수 없는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고 버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여기 붙여도 되겠지.’
센터에 올 때 타고 왔던 차량 안.
운전석 창문에 나뭇가지를 갖다 댔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쭉쭉 뻗어 나가 원형에 가까운 테두리와 그 안을 기하적으로 채우는 무늬를 만들어 냈다.
깨달을 수 있었다. 유리창에 붙어 만들어진 무늬가 일종의 진법이라는 것을.
“신기한 재주를 다 보는군.”
그러자 창호살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군.]“바빴어. 누구와 달리 틀어박혀 있는 몸이 아니라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소리만 전달되는 술식이었지만, 상대가 조용히 인상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상대는 주대현이었다.
연락하겠다더니, 저번에 만난 이후로 한마디도 없다가 이제 와서 웬 나뭇가지 하나만 툭 던져준 것이었다.
그게 바로 이 술식.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지.]독촉하는 듯한 목소리로 주대현이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사도와 만났나?]역시.
그 부분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다.
“그래.”
주대현의 말대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