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개티나
“저기…….”
클레어가 안절부절못하며 이쪽을 바라봤다.
아까 했던 말실수가 아직도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난 온전히 클레어를 구하러 간 거였는데, 지나가는 길에 들러 놓고 생색내는 게 아니냐는 말.
조금 울컥하긴 했지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반응을 못 했던 건 조금 생각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망설임이지.’
마음은 이미 굳혔다. 남은 건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
“전부터 생각했던 겁니다만.”
“네에…….”
클레어가 얌전히 말을 받았다. 눈에 띄게 고분고분했다.
“저희, 남들에게는 부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클레어가 한층 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죠.”
클레어가 힘에 겨운 듯 간신히 수긍했다.
“길었네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 년 남짓. 그 기간은 세월이 흐르는 것 따윈 잊고 산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나에게조차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 긴 시간 동안 이어져 왔던 관계를 바꾸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나도 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오늘 클레어 씨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전 미처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적은 처음이어서, 저도 저 자신에게 놀랐어요.”
그때는 사도니 뭐니 하는 존재들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라크자르가 말하는 보다 재밌는 싸움을 위해서도 아니고. 망량이 꼬드긴 대로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주대현이 말하는 인류의 존망을 건 사명감 따위는 더더욱 아니었고.
“…….”
클레어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할 말이 있지만 몸의 어딘가를 꾹 틀어쥐고 참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배려에 힘입어, 내가 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거짓말도 잘 못하는 편이고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남들을 속이는 게 여전히 불편해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는 클레어를 바라보니, 더는 끌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만합시다.”
그러자 클레어는 실이 끊어진 것처럼 툭하고 고개를 떨궜다.
클레어가 기울어진 고개를 더 아래로 숙이며 끄덕거렸다. 알겠다는 의미의 몸짓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는데.
“그만하고, 저기…….”
한쪽 무릎을 꿇고 품 속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거기서 꺼낸 건 검은 상자였다. 부피가 제법 있기에 움직이기만 해도 들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말았다.
상자의 틈으로 손가락을 넣어 한 손으로 멋있게 열려고 했는데. 틈을 못 찾은 건지 잠금 장치가 있는 건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야, 이, 제발……!”
결국 입술을 깨물고 양손으로 열어서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은색 빗이었다.
손잡이가 따로 달리지 않은, 반달 형태를 하고 있는 빛. 은으로 만들어 하얀 눈의 색을 띄고 있었다.
겉면에 새겨진 꽃을 연상시키는 무늬 위로 몇 가지 보석이 작게 박혀 있었다.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조금도 쓸모가 없어 보였지만, 장식이었다.
“후…….”
조금 절었는데.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제안했다.
“우리 거짓말은 이제 그만합시다.”
눈높이를 낮추고 올려 보자, 고개를 떨어뜨렸던 클레어와 눈이 마주쳤다.
금색 커튼처럼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눈가가 붉게 번져 있었다. 복잡한 시선을 읽어 내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대답은…….
“저기, 그 말은……?”
클레어가 그렇게 되물었다.
‘역시 은빗은 생소했나.’
도은이의 영향인지 한국말은 이상하게 잘하는 클레어였지만. 이런 옛 전통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게 사실이었다.
거듭해서, 보다 직설적으로 물었다.
“저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빗은 그런 의미였다.
이게 클레어를 향한 내 본심이었다. 제법 오래 눈을 돌려 왔지만, 더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말로 전했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몸의 반응은 더없이 정직했다. 이대로 정신을 놓을 것처럼 떨렸다.
이윽고 클레어의 턱을 따라 눈물이 한 방울 타고 흘러내렸다.
“아, 저기.”
내가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다.
클레어의 눈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저번엔 어떻게 그리 매몰찰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잠깐.’
혹시 싫어하는 거라면 어쩌지.
그럼 괜히 건드리는 것보다 가만히 지켜보는 게 맞을 텐데.
갈 곳을 잃은 내 손이 클레어의 얼굴 주위를 맴돌았다.
꺼내야 할 말도 고르지 못하고, 취해야 할 행동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시간이 지나, 클레어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놀랐잖아요…….”
클레어가 물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나는, 당연히 남이 되자는 소리인 줄로만 알고…….”
“한국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시끄러워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쓸데없는 소리긴 했다.
“저기, 대답은…….”
재촉하는 것 같아 영 폼이 살지 않았지만. 그만큼 초조했다.
클레어가 은색 빗을 손끝으로 집어들었다.
“다른 대답,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엉망진창인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미루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여서. 솟아오르는 충동에 휩싸였다.
“클레어 씨.”
“네?”
“한 번 안아 봐도 됩니까?”
“…….”
그러자 클레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좀 아니었나…….
의기소침하게 반성하는 사이, 클레어가 팔을 벌렸다. 흰 뺨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일일이 물어볼 필요 없잖아요.”
그런가.
클레어의 몸을 끌어안았다.
한쪽 팔로도 충분히 다 덮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작은 몸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러모으듯이.
코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클레어의 머리카락으로부터는 꽃다발을 한아름 품에 안은 듯한 꽃내음이 가득했다.
클레어의 손바닥이 내 등을 덮었다.
둘 사이에 남은 공간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밀착했다.
“숙맥.”
클레어가 내 가슴에 입을 대고 말했다. 그 목소리는 진동이 되어 피부를 간질였다.
“너무 늦었잖아요.”
“…미안해요.”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인 만큼, 늦었다는 말을 들어도 쌌다.
떠올려 보면, 지금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클레어의 덕분이었다.
몇 번이나 이 관계를 끝맺으려고 했던 나를 끝까지 붙잡은 건 클레어였다.
그렇게 함께 지내는 사이. 나 또한 이렇게 함께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이젠.’
품에 들어온 여자를 평생토록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남을 수 있도록.
* * *
“그런데 이 빗은 뭔가요?”
클레어가 내가 선물한 은색 빗을 내보이며 물었다.
“마음에 안 드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예뻐요.”
요즘은 취급하는 곳이 많지 않아서 제법 발품을 팔아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예물용 빗은 특히.
“그럼 다행이고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반지는 이미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하나 맞춰 놓은 상태였고. 목걸이는 클레어가 외출 때마다 착용하는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렇다고 귀걸이를 끼고 다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
“월소(月梳)라고 하는 건데, 한국에서 결혼할 때 보내는 선물이에요.”
“그렇군요…….”
클레어가 빗을 품에 안더니 약속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래 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진열장에 넣어서…….”
“아니, 쓰시라구요.”
쓰지 않고 보관하기만 할 거라면 빗일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클레어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까워서 어떻게 써요.”
“안 쓰는 게 더 아까워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고두고 바라보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평소에 사용하여 일상 속에 녹여 내는 것도 추억을 새기는 방법 중 하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클레어가 마지못해 수긍하고 등을 돌렸다.
“그럼 써 줘요.”
“네?”
“내 머리, 도율 씨가 빗어 줘요.”
클레어가 빗을 건넸다.
긴 금색 머리카락이 허리를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와 있었다. 허리가 머리카락에 덮여 가려질 정도로 가늘었다.
“그러죠.”
클레어의 수발을 드는 건 나름대로 익숙한 일이었다. 조금 공백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머리를 빗겨 주는 건 처음이었다.
내게 등을 맡기고 돌아앉은 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다가, 빗을 넣어 천천히 쓸었다.
스륵, 스륵.
빗질을 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윤기 넘치는 머리카락이었다.
그러나 빗살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는 소리가, 손길에 따라 조금씩 움찔거리는 클레어의 뒷모습이 중독적이어서.
길게 풀어 헤쳐진 머리를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상하네.”
별안간 클레어가 불만스러운 소리를 냈다.
“뭐가요?”
“왜 익숙하지.”
고개를 돌려 돌아본 클레어는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잘하지?”
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야 어릴 때 도은이한테 엄청 해 줬으니까 그렇죠.”
보통 이런 건 어머니가 해 주는 편인 걸로 알고 있지만. 우리 집에선 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달리 없었다.
어릴 때의 도은이가 머리를 빗겨 달라고 칭얼거릴 대상은 나 정도뿐이었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바쁘셨으니.
그때의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고 남아 있던 것이었다.
“그렇군요…….”
클레어가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단발이잖아요, 도은이는.”
“그땐 길었어요.”
초등학생 때의 여자애들은 으레 머리를 기르고 싶어 하지 않나. 도은이만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만.
내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여동생한테 질투하는 여자는 좀.”
“읏.”
클레어가 자리에서 화들짝 일어나 빗을 휙 채갔다.
“만족했으니 이만 자러 갈게요.”
방문을 닫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 * *
“못 보던 거네?”
도은이 클레어가 손에 쥔 물건을 보며 물었다.
은색 빗이었다. 순은으로 만든 것처럼 색이 고르고 표면이 매끄러웠다. 그 위로는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바람과 꽃잎의 형상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테두리 부분에는 눈에 띄지 않게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으니.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으로 살 만한 물건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 아. 이거? 그냥…….”
클레어가 멋쩍게 말을 흐리며 도은을 힐끔거렸다.
별거 아닌 척을 하고 있었지만. 빗 같은 걸 가방에 넣지도 않고 굳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남이 봐 줬으면 하는 심리였다.
‘이쁘긴 하다만.’
도은이 잘 알고 있는 클레어는, 명품을 남에게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머리가 마음에 안 드네.”
“…….”
공연히 손에 쥔 빗으로 앞머리를 정리하는 척, 머리 끝을 정리하는 척 계속 빗어 대고 있었지만.
평소엔 전혀 안 하던 짓이었다.
도은은 아닌 척 운전대를 잡으며 클레어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이제 와서 미용에 눈을 뜬 건 아닐 테고. 중삐리도 아니고.’
클레어가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이 있는 이상, 평소와 다른 태도는 원인을 파악해야 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클레어의 이상 사태를 귀신 같이 알아채고 조치를 취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으니까.
어쨌든 이상한 건 클레어 자체라기보단, 갑자기 들고 나온 저 빗으로 추정되었다. 애지중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
‘혹시…….’
그렇다면 남은 건 한 가지.
“언니, 그거 오빠한테 받은 거지.”
“어?”
클레어의 움직임이 멈췄다.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도은이 다시 한번 빗의 모양을 자세히 살폈다. 단순한 선물로 준 거라기엔 생긴 게 제대로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우선은…….
“…어떻게 알았어?”
충고하건대.
“개티나.”
클레어를 평소 상태로 되돌리는 게 급선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