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데려와요
‘이게 뭐 대수라고.’
클레어가 손을 뻗어 도율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서로의 몸에 손을 대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마사지라든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도율은 마사지니 뭐니 하며 클레어의 몸에 손을 댔다.
거침없는 손길로 온몸을 주무르는 건, 예상을 뛰어넘은 통증을 수반하는 일이어서 미처 정신이 없었지만.
‘그건 안 부끄럽고, 이건 부끄러운 걸까?’
그때는 놀라우리만치 뻔뻔했던 주제에, 지금은 고작 손 잡는 것 가지고 부끄러워하니 어색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잡은 손이었지만, 클레어의 생각은 곧 달라졌다.
‘흐음…….’
오랫동안 손을 잡다 보면, 싫어도 그 감촉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까끌까끌해.’
도율의 손은 조금 거칠었다.
무릇 사내의 손이란 그런 것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어째서일까. 이유를 생각해 보면 짚이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이곳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지냈으니 핸드 크림 따위는 구경도 못 해 봤을 거다. 그곳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이곳에 돌아와서도 얌전히 지내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요리나 설거지, 세탁과 같은 집안일도 도맡아 했으니. 손에 물이 마를 일이 없었다.
그 흔적을 손에 고스란히 남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있을 수 있는 걸까.
‘아.’
그러던 와중. 손가락에 박힌 작은 균열을 찾아냈다.
클레어의 부드러운 손가락은 그 틈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결을 따라 조금 움직이면 그 형태가 손에 잡혔다.
그 감각을 음미하며 클레어가 도율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 느낌도 없나?’
도율은 여전히 진열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한쪽 손을 뻗어 클레어와 맞잡고 있었지만, 고개는 돌아가 있었다.
지금 자기 손을 만지고 있는데. 당사자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즐거워졌다.
자기 뺨에 은근한 미소가 걸린 것도 모른채. 클레어가 손장난을 치며 놀았다.
손을 잡은 도율이 어디로 가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만이었다.
그때 도율이 돌아봤다.
“왜 이렇게 움찔거려요?”
“네?”
아뿔싸.
너무 열중하는 사이 도율의 반응을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클레어가 왜 그러는지는 여전히 깨닫지 못한 듯했다. 그럼 아쉽지만 여기서 마무리할까.
“아무것도 아녜요.”
“…….”
그런 클레어를 무심히 바라보던 도율이 손가락을 엮었다.
클레어의 손가락 사이로 도율의 손가락 마디가 파고들었다. 억세고 단단해서 꽉 붙잡혔다.
흔히 말하는 손깍지였다.
“어수선하게 하지 마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 네에…….”
그 후로는 얌전히 도율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 * *
[급한 일이네.]휴일.
센터장 영감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어서 와 주게.]급한 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수화기 너머로 뚜, 뚜- 하는 공허한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되물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 정도로 급한 일인가.
‘위치야 찾아갈 수 있다지만…….’
어딘지 알려 주지도 않은 건, 센터장 영감의 GPS 위치를 검색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나를 비롯한 몇몇 각성자들에게 공개해 놓은 정보였다.
‘무슨 일이지?’
여태까지 이런 적이 있었나 싶었다.
영감이 자기 입으로 급한 일이니 어서 와 달라고 한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심지어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비밀 실험실을 습격하다가 역으로 당할 뻔했을 때에도. 내게 연락한 건 영감이 아니라 손녀인 최지연이었으니.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닐 거라는 예상과 함께, 가능한 빨리 찾아갔더니.
‘…백화점이잖아.’
GPS를 기반으로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대현 백화점이었다.
뭔가 오류가 있나 싶었는데, 기감을 펼쳐 건물 안을 뒤져 보니 영감이 이곳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진짜 여기 있긴 한 건데. 이런 데에서 급한 일이라니, 무슨 소리냐고.
천천히 걸어 영감이 있는 곳까지 다가가니. 영감은 백우진과 함께 있었다.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의외인 건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제 말의 어디가 틀렸단 겁니까?”
신기한 광경이긴 했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백우진을 알고 지낸 경험에서 미루어 볼 때, 백우진은 상명하복을 아주 철저히 하는 남자였다.
자기가 속한 조직의 우두머리인 센터장 영감에게 말대꾸를 할 성격이 아닌데.
“아, 자네 왔군!”
“예. 오긴 왔습니다만.”
“자네가 이 밥팅 좀 설득해 보게.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원.”
밥팅?
백우진이 그런 소리 들을 사람이 아닌데.
그러는 센터장 영감도 열이 단단히 받았는지 툴툴거리고 있었다.
결국 내가 백우진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백우진이 검은 백팩을 꺼내들었다.
“넓고 다양한 수납 공간. 방수에 방진. 가볍고 튼튼함. 백팩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물품을 사는 게 제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 예…….”
쇼핑인가?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당연히 새로운 물건을 사러 온 것이겠지만.
게다가 백우진이 하는 말도 틀린 점은 없었다. 워낙 꼼꼼하고 성실한 인간이니, 이것저것 요목조목 잘 따져서 좋은 물건을 골랐겠지.
근데, 가방은 왜?
그러자 반대편에서 센터장 영감이 또다른 가방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생 여자애가 무슨 그런 딱딱해 보이는 가방을 쓰나! 당연히 이런 캐릭터 가방을 메야지!”
영감이 꺼낸 건 분홍색의 가방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분홍색에, 웬 여자 캐릭터가 윙크를 하고 있는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지퍼도 하트 모양이었다.
그거참, 깜찍하구만. 깜찍하기는 한데.
“그러니까…….”
내가 이마를 짚었다.
이 인간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애가 어떤 가방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싸우고 있었단 말인가.
뭐, 싸우는 건 좋다. 의견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건. 겨우 이런 일 때문에 나를 불러냈단 사실이다.
내가 영감을 향해 물었다.
“죽고 싶습니까?”
“아, 아니…….”
영감이 식은땀을 흘리며 가방을 슬쩍 내려놓았다.
* * *
“사정은 알았습니다.”
주름진 얼굴을 한층 더 쭈그러뜨린 채 영감이 내게 일의 전말을 설명했다.
백우진에게도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가 센터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그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정체 모를 여자아이… 백수아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애지만, 학교에 보내는 것 정도는 센터장 영감의 빽으로 가능했다.
그래서 입학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 학교에서 쓸 물건을 구매하지 않았기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야 하는 물건이 뭐라고요?”
이왕 온 김에, 빠르게 어울려 주고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백우진이 메모에 작성해 놓은 목록을 읊었다.
“가방. 도시락통. 물병. 필기구와 필통. 공책. 실내화. 이름을 붙일 스티커. 이 정도입니다.”
“아, 예.”
원체 무슨 일이듯 철저하고 꼼꼼하게 처리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부분에서도 빈틈이 없었다.
“그럼 얼른 사고 끝냅시다.”
그런 내 주장과 달리.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스테인리스 도시락통이 보온이나 위생 측면에서…….”
“이거 귀엽지 않나? 이 캐릭터 아직도 나오는구만? 이웃집……. 뭐더라? 지연이도 이거 되게 좋아했는데.”
당신 손녀가 좋아했다고 하면 유행이 20년은 지난 거잖아.
그렇다고 백우진의 손을 들어 주기도 뭐한 것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자애가 은색 스테인리스 도시락통을 들고 다니는 것도 모양새가 영.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워낙 커서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조율은 내 몫이었다.
“어떻습니까?”
“자네가 골라 보게!”
미안하지만 나도 그런 결정에 시달리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대신할 사람을 불렀다.
“휴일에 급한 일이라니, 대체 무슨…….”
백화점에 나타난 건 최지연이었다.
각성자 지원 센터의 비서실장이자, 센터장인 최강현의 손녀. 그리고 백우진에게는 상사이자 불편한 관계.
즉, 두 사람 모두에게 천적이었다.
“지, 지연이 네가 여길 왜……?”
“할아버지야말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영감이 나를 향해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대체 얘를 왜 부른 거냐고.
백우진에 이르러서는 아예 말이 없었다.
최지연 역시 백우진이 있는 걸 보고 싸늘한 시선을 쏘아 보내는 중이었다. 휴일에 만난 것도 불편한데, 왜 하필 할아버지와 이 둘이 같이 있는 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최지연이 고개를 까딱이며 명했다.
“설명해 봐요.”
설명은 영감의 몫이었다.
얼추 얘기를 전해 들은 최지연이 백우진을 향해 물었다.
“부모 잃은 사촌을 돌보고 있다고요?”
“…예.”
“흐음…….”
최지연이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백우진의 집안이 거덜 나게 된 이유 중 하나로는 최지연의 활약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저쪽 길드가 먼저 할아버지를 해코지하려 했으니, 정당한 보복이자 반드시 갚아야 할 죗값이라고 하는 것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애들의 처지를 듣게 되면, 뻔뻔한 얼굴을 하기가 어려웠다.
백우진이 에둘러 거절의 말을 꺼냈다.
“비서장님까지 합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일이니, 제가 알아서…….”
“됐어요.”
최지연이 말을 자르며 앞장섰다.
최지연을 필두로 한 쇼핑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대단히 실용적인…….”
“촌스러워요.”
“역시 우리 손녀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자, 이쪽 귀여운…….”
“그건 싸구려.”
두 사람의 제안을 무시하고 최지연이 물품을 골랐다.
적당히 쓸 만하면서도 초등학생 여자애에게 어울릴 만한 귀엽고 팬시한 포인트가 살아 있는 제품들.
과연. 영감이 고르는 것처럼 캐릭터나 장식이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지도 않고, 백우진이 고르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품질이나 마감, 실용성도 버리지 않는 것이, 괜히 비서실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부르길 잘했군.
결국 백우진의 필요 물품 목록을 채우는 데에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금방 끝날 것을…….
“…감사합니다.”
백우진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최지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 좋으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요.”
별로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던 최지연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옷은?”
“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백우진이 되물었다. 이해하지 못한 건 나나 영감도 마찬가지였다.
“옷은 샀냐구요.”
“무슨 옷을…….”
“세상에.”
최지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에 손가락을 짚었다.
구겨진 살을 펴는 것처럼 주무르고는, 우리 세 사람을 향해 쏘아붙였다.
“가방이니 필통이니 하는 걸 사기 전에 당연히 옷부터 샀어야죠! 요즘 초등학교는 정글이라고요, 정글!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면 기부터 죽고 들어가는 거예요!”
왜 나까지 혼나는 거냐고.
“옷이라면 충분히…….”
백우진이 손을 반쯤 들고 반박했지만, 최지연이 눈빛을 쏘자 다시 얌전히 수그러들었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면, 백우진이 골랐다는 옷은 그다지 믿을 만한 게 못됐으니까.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체 왜 본인이 없어요?”
그랬다.
지금 자리에 있는 건 백우진과 영감. 부름을 받고 달려온 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류한 최지연뿐이었다.
백수아의 물건을 사는 건데, 정작 백수아가 없었다.
“깜짝 선물이라는 걸로…….”
“선물을 사는 사람이 그런 걸 골라요?”
최지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다시 한번 면박을 줬다.
그 의견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 꼬마애 성격상 뭘 받든 불만 없이 감사히 받았겠지만. 선물치고는…….
“데려와요.”
“예?”
백우진이 멍하니 되묻자, 최지연이 짜증스레 소리쳤다.
“옷을 입어 보지도 않고 살 순 없잖아요! 애 데려오라고요!”
“아, 예…….”
떨떠름한 대답이었지만 행동은 재빨랐다. 과연 상사의 명령은 다르다.
“아주 사람을 잡는구먼.”
자기 손녀를 바라보며 영감이 다른 사람 일처럼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