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기브 앤 테이크
「헥, 헥…….」
바닥에는 나자빠진 백호가 있었다.
망량이 지내는 저택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깎아지르듯 높이 있는 돌산을 오를 필요가 있었다. 그 계단은 하늘로 향하는 문이라 여겨질 정도로 높고 길었다.
그 커다란 몸뚱이를 이끌고 긴 계단을 쉬지 않고 올랐으니 지칠 만도 했다.
‘……두툼하구만.’
이제 보니 깨달은 건데, 이 녀석은 작은 몸뚱이일 때 불려 놓은 살이 커졌을 때도 어느 정도 반영되는 듯했다.
그 작은 몸으로 쉼 없이 처먹어 이 커다란 몸에도 군살이 붙을 정도로 영향을 끼쳤으니, 오히려 대단하다면 대단하고나 할까.
「…어떻습니까, 대협. 저도 아직 안 죽었죠?」
“그래, 그래.”
간신히 고개를 들고 묻는 녀석에게 가벼이 답해 주자, 녀석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늘어뜨렸다.
물론 죽은 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
산골을 호령하던 백호라던 놈이 고작 짐마차 노릇이나 하고 만족하는 걸로 괜찮은 걸까 싶지만.
‘신수답지 않은 녀석.’
뻗은 백호를 내버려 두고 망량의 저택으로 들어가자, 망량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어서 와.”
부드럽고 나긋한 어조와 달리 찻상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보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환대였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많다면 많았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이쪽에서도 느낄 수 있었어, 네 쪽에 사도가 화신체를 보내 접촉했다는 걸.”
라크자르인가.
본래 나를 만나기 위해 온 건 아니었지만. 나와의 싸움에 상당히 만족하고 돌아간 녀석이었다.
에테리움 파편을 빼돌린 건 덤이었고.
“라크자르. 놈에 대해 알고 있나?”
“알다마다.”
망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조룡주(彫龍主). 사도 중 한 명이지. 성격은 보이는 그대로야. 속이 시커멓지 않은 점에선 상대하기 가장 편하지만. 반대로 그런 단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으로도 사도의 자리에 앉을 정도로…….”
“무위가 대단하다는 뜻이겠군.”
“바로 그거야.”
확실히 그랬다.
그때 내가 만난 라크자르는 녀석의 본체가 아니었다. 싸움에서 이기고 난 후, 녀석이 있던 자리엔 속이 텅 빈 부숴진 인형만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 가짜 몸에서 뿜어내는 위력이 대단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어쩌면 그 다음으로 만난 사도, 엘리아나보다도 훨씬 더.
‘직접 만난다면…….’
쉽게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일까.
“그런데 조룡주라는 건?”
망량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용을 조각한다는 뜻의 조룡. 조룡주가 만들어 내는 육신들을 의미하지.”
용을 조각한다.
놈이 이쪽 세상에 올 때 사용했던 가짜 육신. 그것을 용을 조각한다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짜 육신이 용이라고 평할 만한 것인지. 평범한 인간 따윈 간단히 쓸려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가히 그렇게 평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게 아니야.”
망량이 고개를 저었다.
“조룡주가 만드는 용은, 그가 사용하는 화신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건 단지 부산물에 불과해.”
“부산물?”
“그의 조각 중 걸작이라 할 만한 것들은, 모두 그의 육신이 된다.”
화신체가 부산물이고.
걸작은 육신이 된다.
즉, 내가 상대했던 건 실패작들을 재활용한 것에 불과하고. 정말 성공한 것들은 진짜 몸에 섞여 사용된다는 건가.
그 사실을 반영하면, 본체는 그보다 훨씬 뛰어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보다 나은 신체를 갈고닦는 자. 그게 조룡주야.”
분명 라크자르가 싸우는 방식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 없는 것이. 단순히 단단한 신체와 뛰어난 마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충분한 강함을 뽐낼 수 있다. 인간이라면 타고난 한계에 가로막혀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조각인가.’
몸을 바꿔 끼울 수 있다면 성장하는 데에 한계가 없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사도란 자들이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길지 생각한다면. 오랜 세월 선형적으로 강함을 쌓아 온 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더욱 쉽지 않구만.
이 사실을 몰랐다면 조금 당황하게 됐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는 편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아나라는 사도는?”
“엘리아나라.”
망량이 턱을 한번 쓰다듬더니 조금 커다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사도의 자리가 결정되는 건 복잡한 정치나 혈통, 권위 따위가 개입하는 게 아니야. 단순한 힘의 논리지.”
“힘의 논리라.”
“그러니 내가 아는 것과는 달라져 있을 수도 있어.”
최신 정보는 알지 못하는 건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망량은 지금까지 숨어 지내 왔다고 하니까.
“엘리아나라는 자가 그 대표적인 예시야. 내가 알던 사도 중 그런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어.”
“그런가.”
사도 중 그런 이름을 가진 자가 없었다면. 망량이 알던 시절엔 사도가 아니었다는 뜻.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라는 거다.
“사도라는 것에 정해진 기준이 있나? 아니면 자리가 정해져 있나?”
“총 다섯이지.”
다섯이라 함은.
“정해진 자리가 있는데 새로 사도가 된 자가 있는 거라면. 원래 있던 사도가 그 자리에서 내려갔다는 뜻 아닌가?”
망량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정답이야.”
그건 중요한 정보였다.
사도란 자리가 힘의 논리로 결정되고. 마계의 지배자라는 자들이 딱히 노화를 겪지 않으며 계속해서 힘을 쌓아 가는 삶을 가진 자들이라면.
한 번 사도라는 최강자의 자리를 차지한 존재에게는 계속해서 강해질 일만이 남아 있을 텐데.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이유가 있나?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 내분. 혹은 외부 세력과의 마찰. 그로 인해 기존에 있던 사도가 크게 힘을 잃고 폐위당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어.”
“그럼 이번에도?”
“조금 달라.”
망량이 눈매를 찌푸렸다. 석연치 않은 사실을 입에 담는 것처럼.
“내가 알기로 그런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어. 인간들 중에는 아직 사도에게 이빨을 들이밀 만한 존재가 없고. 나 역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용의자가 없다는 건가.
“그런데 10년 전, 돌연히 원래 있던 사도가 모습을 감추고 말았지. 그건 나도 알 수 있었지만, 새로운 사도가 나타났다는 건 몰랐는걸.”
숨어 있으면서도 망량은 바깥의 굵직한 흐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힘을 썼을 때 나에게 접촉해 온 것도 그렇고. 여기 있으면서도 바깥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한 건가.
그러면서도 새로운 사도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는 건.
“엘리아나는 아마, 제대로 자격을 갖춘 자는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었다.
만약 새로이 사도라는 자격에 걸맞은 자가 등장했다면, 내가 힘을 사용했을 때와 같이 망량이 알아챘을 테니까.
또 10년이란 시간은, 인간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마계에서 새로운 강자가 성장하기엔 충분히 길지 않은 시간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기존 사도가 사라져서 급히 채운 땜빵이다 이건가.’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그럼 그 새로운 사도가 오기 전의 사도는 어떤 자였지?”
죽지도, 힘을 잃은 게 아니라면. 지금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가능하다면 그 자 역시 염두에 두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자 망량이 드물게 무게를 잡았다.
늘상 미소를 입에 걸던 얼굴을 뻣뻣하게 펴고, 무거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 전에 일러둘 게 하나 있어.”
“뭐지?”
“사도들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는 건 그 자체로도 상당한 위험을 부담하는 일이야. 그러니 내가 네게 말해 주는 것들은 모두 내 안위를 걸고 말하는 것이라는 점, 알아 주길 바라.”
지금까지 망량은 사도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라크자르의 이름을 불렀던 나와 달리 망량은 꾸준히 그를 조룡주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름을 부른 유일한 사도는, 그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엘리아나 한 명뿐이었다.
“이름에는 인연이 있어. 내가 여태껏 그들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을 덮어두고 다시는 들추지 않았기 때문이지.”
나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쪽이 아닌 저쪽 세상에서, 인연과 은원에 대한 이야기는 질리도록 들었다.
망량이 가진 기운이 내가 익힌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힘을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것도 이해가 됐다.
“꼭 이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네가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으로도 난 네게 새로운 인연을 이어 준 것이 되지. 내가 가지고 있던 인연으로.”
즉.
더는 지금처럼 숨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망량이 얼마나 오랜 기간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고. 더는 숨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숨어 지내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그런 얘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래 조건이군.”
내가 그리 말하자 망량이 쓰게 웃으며 시인했다.
“맞아.”
정보의 교환.
그것이 망량의 의도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 중 망량이 원하는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고둥이 울렸다는 거, 알고 있었나.”
“어렴풋이.”
그럴 것 같았다.
고둥은 망량이 준 물건이니, 그것의 반응을 망량이 알아챈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심지어 두 번이나.
애초에 부탁을 받은 채 들고 다니던 것이었으니, 어디서 누구에게 그게 반응했는지 말해 주는 것도 도리일 수 있지만.
망량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길 꺼려 한다는 사실을.
“기브 앤 테이크다, 이거군.”
결국 끝까지 숨길 순 없는 법이었다.
* * *
인천 공항.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한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푸념을 내뱉었다.
“더워 죽겠구만.”
아직은 완전히 봄이 오지 않은 날씨. 현지 사람들이 재킷을 걸치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더위를 타는 듯 크게 숨을 헥헥거렸다.
결국 입고 있던 가죽 재킷을 벗어 어깨 위로 걸쳐맸다. 안에 입고 있는 것은 고작 반팔 셔츠 하나뿐이었다.
“이제야 좀 살겠구만.”
휴우.
깊은 숨을 내쉬며 남자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주인 잃은 보석이 굴러다니고 있으니 주워 오라니……. 나참. 누가 사설 탐정도 아니고.”
남자가 사진첩을 뒤졌다.
“어디 보자…….”
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한마디로 하자면 납치.
그렇게 표현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원 주인이 말했던 표현인 ‘회수’보다는 좀 더 인정머리가 있는 선택이라고 자부했다.
플레이아데스 길드의 가장 큰 협력사이자 투자자였던 자신들에게 그것의 소유권이 있다는 보스의 주장이었다.
물론 다른 세력에서 그 말을 잠자코 받아들일 리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저런 ‘조율’을 하느라 시간을 상당히 허비하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라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다른 곳에선 손을 쓰지 않겠다는 보증을 받아 냈으니.
뒤늦게 회수하기 위해 남자를 파견한 것이었다. 이 작은 반도에.
“찾았다.”
인적 사항.
가짜 이름과 거주지가 적혀 있는 메모. 그곳에 가면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까지.
사진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여자아이가 찍혀 있었다. 이렇게까지 표정이 없으면 시체나 인형 같아서 되려 기분이 나빠졌다.
그 감상이 어쨌든 간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일 하자, 일.”
남자가 공항 밖을 빠져나와 줄지어 늘어서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